소설리스트

109. 너와 함께할 궐이니까. (109/125)

109. 너와 함께할 궐이니까.

2021.10.15.

중전이 호위대와 함께 대전을 나서고 있었다.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진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놔! 놓지 못해?! 감히 뉘에게 손을 대는 것이야!”

모든 것이 세상에 까발려져 추락할 일만 남은 중전이었지만.

그녀는 아주 고고하고 오만방자한 태도로 고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깜깜하게 내려앉은 밤공기를 갈기갈기 찢는 듯한 중전의 고함.

소진은 고개를 숙인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 사약이 놓인다 해도, 죄를 뉘우치며 곱게 그것을 마실 위인은 아닌 듯싶었다.

그때, 발악하는 중전의 앞에 대비가 우두커니 멈춰섰다.

“감히 뉘에게 손을 대……?”

그녀는 중전이 소리쳤던 말을 곱씹으며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거세게 반발하는 중전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중전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하면 너는 감히 무엇에 손을 댄 것이냐!”

“뭐, 뭐요?! 너는……?!”

“네가 방금 손을 댄 게 무엇인 줄 아느냐? 옥새, 왕의 자리였다!”

대비의 호통에 중전이 잠시 주춤했다.

내내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소리만 내지르던 중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왕의 자리……?”

대비는 휘청거리는 중전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곤 중전이 자신의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꽉 안고 있는 왕자를 지그시 내려다 봤다.

“네가 넘본 것이 왕의 자리라고. 내 말이 어려우냐?”

“……!”

“뭣들 하는 것이야! 왕자를 당장 반역자에게서 떼어놓지 않고!”

“예, 대비마마!”

반역자라는 말에 중전이 더욱, 왕자를 끌어안았다.

“반역자라니! 반역자라니……! 대체 무슨 헛소리를……! 놓아라!”

그 뒤를 따르던 부원군 역시,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호위대에게 포박당하고 말았다.

대비는 중전의 품에 안겨 있는 왕자를 잽싸게 뺏었다.

“아악! 왕자를 내어놓으세요! 왕자는 절대 아니 됩니다!”

왕자를 빼앗기자, 중전이 더욱 발악하기 시작했다.

양팔이 포박된 채로 그녀는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아아악! 왕자는 건드리지 마세요! 왕자는 아니 됩니다!”

그러자 대비는 그런 중전을 지그시 응시하며 왕자를 대전 상궁에게 건넸다.

“반역을 저지른 중죄인에게 주상의 고귀한 혈육을 맡길 수 없지. 그 더러운 손으로 다시는 왕자를 보듬을 수 없을 것이다.”

대비는 울부짖는 중전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싸늘하게 돌아섰다.

“으아아악!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짐승처럼 포효하는 중전의 울음에 대비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물끄러미 그녀를 돌아보며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중궁전에 밀실이 발견되었다지?”

대전 상궁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눈물이 가득 차올랐던 중전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예, 대비마마. 지금 그곳으로 영의정 대감과 세자 저하께서 속히 발걸음 하고 계시옵니다.”

대비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중전의 앞으로 다가갔다.

중전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대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런 중전이 가소롭다는 듯 대비가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가만히 중전의 앞에 서서 그녀의 세찬 시선을 덤덤히 바라보던 대비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쫘악!

“……!”

주저하지 않고 대비는 곧장 중전의 뺨을 내리쳤다.

순간, 대전 앞이 차가운 정적으로 휩싸이고 말았다.

벼락같은 뺨을 맞은 중전 역시, 예상치 못한 대비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굳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 날 선 공기만이 끝없이 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소진 역시, 멀리서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어떡해…….”

등진 채, 뺨을 감싸 쥔 중전과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대비.

조선에서 최고 실세라 할 수 있는 두 여인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곧, 대비가 묵직하게 입술을 뗐다.

“궐을…… 주상과 세자의 신성한 궐을 더럽혀?”

“……!”

“밀실에서 네년이 무슨 추악한 짓을 벌이고 있었는지, 조금도 빠짐없이 모두 다 밝혀낼 것이야.”

“…….”

“마음 단단히 먹는 것이 좋을 걸세.”

그 말을 끝으로 대비가 달빛을 맞으며 다시 돌아섰다.

오늘따라 길게 늘어진 대비의 그림자가 검고 크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굳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소진의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냉정한 분이시지.”

“……아, 저하.”

“하지만 자신의 사람에게는 한없이 인자하고 다정하신 분이야.”

헌이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소진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소진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가 이내, 여전히 굳어있는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

“영의정 대감께선 무사하실 것이니.”

잠자코 입술을 사리물고 있던 소진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물에 헌이 걱정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슬쩍 대전 뒤쪽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곤 궁인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어둠 속에 감추며 와락, 품에 안았다.

“소진아, 어찌 그러느냐.”

“놀랐지 않습니까…….”

투정 어린 그 목소리에 원망도 조금 묻어 있었다.

“어찌 놀라……. 영의정 대감께서 혹 피해라도 입을까 봐?”

“아니요……. 전하께서 미리 그런 것을 써두셨으면 제게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아.”

“놀랐잖아요. 전하께서 정말 옥새를 찍으시는 건 아닐까…….”

“…….”

“중전마마의 꾐에 넘어가 행여, 저하께서 잘못되시는 건 아닐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아찔해지는지 소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헌이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그리며 그녀의 젖은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폐위라도 당할까 봐?”

“조금 전은 정말 그럴 위기셨다구요.”

“내가 너를 두고?”

“……예?”

“한소진, 널 두고 무책임하게 그렇게 물러날 것 같으냐?”

“…….”

“네 벗도 그리고 너의 아버지인 영의정 대감도 모두 내가 지켜야 하는데. 어찌 물러나.”

“저하.”

“물러나더라도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두를 안전하게 지킨 뒤에 물러나야지.”

그 말에 소진이 새초롬하게 헌을 향해 눈을 흘겼다.

“물러나긴요……! 농이라도 그런 소리 마시어요.”

소진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깔끔하게 닦아내며 다시금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쳐 발악하는 중전에게 거세게 맞서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였지만 참으로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헌이었다.

물끄러미 헌을 올려다보던 소진이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곤 주위를 휘휘, 살피며 궁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응?”

마치 참, 잘하였다고 칭찬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소진이 헌의 등을 몇 번 토닥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엇이냐?”

헌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으며 물었다.

“멋있어서요. 우리 세자 저하.”

“멋있어……?”

“참, 멋있으십니다. 저하.”

그 말에 헌도 소진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녀의 팔이라도 다독이려 손을 뻗었는데.

초옥.

“……저하!”

헌이 소진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놀란 그녀가 그의 온기가 묻어 있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금세 그녀의 하얀 뺨 위로 동그란 홍조가 드리웠다.

헌은 그런 소진을 지그시 바라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울다가 웃으며 엉덩이에 뭐 난다?”

“아이참……!”

“그리고 새삼 멋있느냐, 내가?”

“예, 갑자기 멋있어 보입니다.”

소진의 대답에 그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원래 매 순간이 멋이 있는 사내이다. 몰랐느냐?”

그러면서 그가 얼른 가보자는 듯 고갯짓하며 이어 말했다.

“서두르자꾸나. 영의정 대감께서 기다리시겠다.”

“아…… 예, 저하.”

“네 벗, 봉희 댁도.”

봉희라는 이름이 그녀의 가슴 위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근사한 미소를 그리는 헌의 얼굴만 가득 담겼던 소진의 눈동자에 검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예. 봉희가 기다리겠습니다. 서둘러 가시어요.”

마주 본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왕자까지 빼앗긴 그녀는 세상을 잃은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세자 저하 납시오!”

먼저 와 중궁전 밀실 문 앞에 서 있던 중전이 멈칫했다.

자신의 처소인 이 중궁전을 가득 채우는 저 말에 그녀는 가슴 깊이 분노가 끓는 듯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가짜 세자 따위가!”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개의치 않다는 듯, 헌은 저벅저벅 밀실 문 앞에 섰다.

“저하, 끝까지 자신과는 무관한 장소라며 열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호위대장의 말에 내내 여유롭게 행동하던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언제 저 죄인에게 열쇠를 내어 오라고 하였느냐!”

“저, 저하……!”

“당장 문을 부수지 못해?!”

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위대들이 달려들어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소진과 영의정, 그리고 대비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모습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봤다.

그때, 윤현이 다른 무사들 무리를 이끌고 급히 중궁전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무사님!”

소진이 서둘러 윤현을 불러 세웠다.

“예, 아씨.”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김 도령을 추포하러 가야 합니다.”

“아…….”

잊고 있던 김 도령마저 헌이 끝까지 추격하려는 모양이었다.

“분명 오늘 새벽 안으로 어떻게든 한양을 빠져나가려 할 것이니, 생포해 궐로 데리고 오란 저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 말에 영의정이 가만히 뒷짐을 지고 있다, 윤현에게 말했다.

“우참찬 조 씨의 집을 주시하여야 할 것이오. 김 도령과 조 씨 사이에 끈끈한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이니.”

“예, 대감마님.”

고개를 조아리며 황급히 사라지는 윤현과 무사를 바라보던 영의정이 걱정스레 운을 뗐다.

“……궐과 한양의 모든 문을 지키려면 저 수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예?”

영의정의 혼잣말에 소진이 가늘게 눈을 떴다.

“김 도령, 그자까지 추포해야 하니 좀 더 저하를 보필할 군사들의 수가 많았으면 하는데.”

잠자코 생각하던 영의정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시금 헌을 돌아보았다.

“이럴 때…… 민추환 대감이 힘을 좀 보태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소진도 덩달아 가슴을 졸였다.

‘인력이 많이 모자란 것일까.’

영의정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부원군과 중전, 그리고 우참찬 조 씨까지 포박이 되어 있으니.

밖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김 도령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였다.

어떻게 해서든 중전을 구하기 위해 숨겨 놓은 군사들과 궐로 쳐들어온다면.

김 도령을 찾기 위해, 그리고 도성문과 뱃길을 꼭꼭 막기 위해 호위대들이 여기저기 포진된 틈에 경비가 허술한 궐문을 밀고 들어온다면.

상황이 끔찍하게 역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수심에 잠긴 소진의 시야에 산산이 부서진 밀실 철문이 들어왔다.

“봉희야……!”

소진은 빨개진 눈으로 헌의 곁으로 뛰어갔다.

“저하……, 봉희와 마을 여인들이 무사히 버티고 있었겠지요?”

그녀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을 꼭 모았는데.

“어……?! 저, 저기 안에……!”

“사, 사람?!”

문을 뜯어내고 지하실 안으로 속히 들어간 무사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여기에 여, 여인들이 있사옵니다!”

“저하! 사람이 있사옵니다!”

무사들의 외침에 경악하는 궁인들과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대비.

헌은 언제나 어두컴컴하던 지하실이 드디어,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것을 응시하며 소진의 손을 꽉 잡았다.

“똑똑히 보아라, 소진아.”

“…….”

“내가 어떻게 이 더러운 궐을 청소하는지.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은 오늘 이후로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저하.”

“여기는 너와 함께할 궐이니까.”

“……!”

“너와 평생 함께 살아갈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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