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2021.10.11.
헌의 등장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대전 궁인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상선도 고개만 조아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 앓기만 하던 상궁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누구?”
왕은 옥새를 찍으려다 말고 손을 멈추며 대전 입구에 서 있는 헌을 돌아보았다.
헌은 왕자를 꽉 안은 채, 왕의 곁에 꼭 붙어 서 있는 중전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냐, 넌!”
그러자 왕은 중전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헌을 경계하며 그녀를 자신의 뒤에 숨겼다.
“웬 놈이냐고 묻지 않느냐!”
“……아바마마.”
역시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소리치기만 하는 왕을, 헌이 허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웬 미친놈이 감히 나에게 아바마마라고 해?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포박하지 않고?!”
왕의 외침에 중전은 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그의 뒤에 달라붙었다.
“영의정과 그의 무리가 세자로 떠받들고 있는 자입니다. 전하…… 부디 신첩과 왕자를 지켜주세요!”
그러자 헌이 호위대에게 눈짓하며 소리쳤다.
“아바마마의 뒤에 있는 중전마마를 당장 떼어놓아라!”
“이놈들! 누가 중전이야! 중전은 죽었다!”
“아바마마, 지금 아바마마 뒤에 서 있는 자가 중전마마이옵니다!”
“닥치거라! 누구를 포박하라는 것이야, 누구를!”
왕은 눈이 뒤집혀 자신과 중전에게 다가오는 호위대를 향해 다시금 장도를 주워 겨누었다.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모두 다, 죽여버릴 것이야!”
소진은 차마 대전 안으로 들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대전 문밖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감히 흐트러진 왕의 모습과 중전의 얼굴을 함부로 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 소리가 소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세자 저하께…… 누구냐니? 정말…… 소문대로 전하께서 노망이 드셨구나……!’
소진은 말없이 대전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영의정은 그 모습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중전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왕을 바라보기만 하던 헌은 저벅저벅 호위대를 헤치고 왕의 앞에 섰다.
그러곤 물끄러미 옥좌 위에 얹힌 종이를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그러쥐었다.
동시에 왕은 장도를 대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헌의 멱살을 거세게 잡았다.
“네놈은 왜 우리 세자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야!”
허무맹랑한 왕의 외침에도, 왕의 손길에 곤룡포가 한껏 구겨져도 헌의 시선은 오로지 종이 위에 닿아 있었다.
“세자를 폐위하고…… 왕자 이 열(李悅)을 세자에 책봉한다……?”
검은 글씨가 헌의 눈동자에 잔인하게 박혔다.
온전한 정신이 써 내려간 것이 아니라고.
왕의, 아버지의 진심이 결코 아니라고.
머리는 끝없이 그렇게 흩어져가는 헌의 이성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끓는 가슴은 이런 연약하고 허무한 결정을 내린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이렇게 무너지게 한 그 간악한 병마(病魔)가 원망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종이를 쥔 헌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왕은 그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다, 바닥에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는 옥새를 주워 헌이 들고 있던 종이를 뺏어 들었다.
그러곤 보란 듯이 그 위에 도장을 찍기 위해 으름장을 놓으며 헌을 바라봤다.
“네가 주제도 모르고 세자 노릇을 한다는 그놈이지?”
“아바마마.”
“누가 네 아비야! 그 입 닥치거라! 그래, 내가 오늘 네 그 곤룡포를 벗겨주마!”
옥새를 그러쥔 왕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영의정이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하! 소신, 영의정 한성준이옵니다!”
영의정의 목소리에 왕의 손이 멈추었다.
그러곤 한껏 구긴 얼굴을 들어 무릎을 꿇는 영의정을 휙, 돌아보았다.
“오호라…… 영의정 대감?”
한 손에 옥새를 그러쥔 왕이 저벅저벅 영의정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대가 내 여인을 죽이려고 했다지?! 그것도 모자라 나의 세자까지!”
그렇게 소리치는 왕을 향해 영의정이 힘껏 고개를 추어올렸다.
“전하께서 지금 잡고 계신 그 손은 조 숙원이 아닙니다!”
이내 영의정은 눈을 번뜩이며 조 숙원 행세를 하며 왕을 홀리고 있는 중전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저 여인은 조 숙원인 척하며 전하의 장자이자 이 나라의 국본(國本)이신 세자 저하를 몰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
“중전 김 씨입니다!”
그러자 중전이 영의정을 향해 핏발이 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중전 김 씨라니! 내가 대감의 친구입니까?! 나는 전하의 여인입니다! 예를 갖추시지요!”
그녀의 외침에 영의정이 비틀린 조소를 뱉어냈다.
“전하의 여인이시라, 예를 갖추라……? 예, 맞는 말입니다. 한데 어쩌지요?”
“……?”
“아무리 전하의 여인이라도 중죄를 지은 이에게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중죄라는 말에 뒤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부원군의 입꼬리가 덜덜 떨렸다.
그 순간 중전은 영의정을 직시하고 있던 눈빛을 거두어 왕을 바라봤다.
중죄라는 말에도 중전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소리쳤다.
“전하, 무얼 망설이십니까? 이리 전하와 신첩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이들에게 보란 듯이 전하의 권위를 보여주셔야지요……!”
제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만이 살길이니, 그녀에게는 이것이 더 급선무일 테였다.
그러면서 오가는 고함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왕자를 꽉 끌어안은 중전은 옥새를 쥐고 있는 왕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얼른요,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 그 여인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절대, 아니 되옵니다!”
중전과 영의정이 대치를 벌이는 동안, 헌은 말없이 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덤덤한 헌의 태도에 영의정과 다른 궁인들은 더욱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저하…… 저하 어떻게 좀……!”
상선이 헌의 곁으로 다가와 옥새를 쥔 왕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여전히 헌은 멍하니 피식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하, 어서요! 어서!”
중전이 왕을 다그치자 허탈하게 조소만 그리고 있던 헌이 휙, 중전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헌의 입술이 거칠게 열렸다.
“중죄를 짓고도 완벽한 국모의 자리에, 제 자식까지 국본의 자리에 앉게 되면.”
“…….”
“모든 죄가 없어진다고 믿고 있는 겁니까?”
“닥치세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대들이 나를 끌어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바마마께서 혼몽하신 틈을 타 날치기로 세자를 바꿔치기하겠다?”
“날치기라니……! 엄연히 이 아이도 전하의 핏줄, 그리고 이것은 전하께서 내내 고집하셨던 뜻입니다! 말씀 가려 하시지요!”
그 순간이었다.
헌이 중전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자 왕이 들짐승처럼 포효하며 종이 위에 옥새를 쾅 찍었다.
“으아아악! 다들 조용히 하지 못 해?! 나는 내 여인과 내 자식을 지킬 것이야!”
“안 돼!”
“아니 되옵니다, 전하!”
결국, 왕은 유지에 옥새를 새기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힘이 풀린 듯, 왕은 기절하듯 바닥에 주저앉았고 상선과 대전 상궁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 모습에 영의정이 절망하며 털썩 바닥에 널브러지고 중전 역시, 다리가 풀려 털썩 앉았다.
그러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왕자를 꽉 안았다.
“되었다…… 열아, 되었어……! 너는 이제 이 나라의…… 왕세자란다!”
두어 걸음 물러나서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기만 하던 부원군이 서둘러 중전의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납작 엎드리며 만세 하듯 외쳤다.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중전은 자신의 앞에 납작 엎드린 부원군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이제야…… 아버지께서 내 발아래에 무릎을 꿇는군요.’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중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중궁전 상궁과 그녀의 궁녀들이 쪼르르 달려와 부원군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조아렸다.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이미 중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듯 굴었다.
“종이 한 장에 무슨 힘이 있다고!”
끝까지 이 상황을 부정하려는 듯 영의정이 소리치자 부원군이 고개를 비틀어 그를 노려보았다.
“힘이 왜 없어. 모두 다, 하늘 같은 어명이신데! 이제 중전마마의 왕자 아기씨가 아닌 이 나라의 왕세자 저하를 사살하려 한 것으로 죄가 커지니 두려운 것입니까?!”
중전의 무리가 오만한 얼굴로 영의정과 헌을 힐끔거리며 이죽거리고 있던 그때.
이상하리만큼 말도 없이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헌이 입술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왕의 옥새가 선명하게 찍힌 유지 위에 닿아 있었다.
“결국……. 나의 아우가 세자가 되었군요?”
그 말에 중전이 헌을 가소롭다는 듯 위아래로 훑으며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궁인들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느냐? 세자…… 아니, 이제 폐서인이 된 이 자를 대전에서 치우지 않고!”
중전의 명에 서로 눈치만 살피던 중궁전 궁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헌에게로 다가갔다.
헌과 동행한 호위대들이 일단 그들이 더는 헌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지만.
이 상황이 너무 황망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다들 멍한 얼굴로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이제 헌은 세자에서 폐위가 된 것인지.
중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이 된 것인지.
혼란스러운 듯 대전 안의 궁인들은 우왕좌왕했다.
“뭣들 하느냐! 전하의 어지(御旨)를 이리 두 눈으로 보고도 머뭇거리는 것이야?! 당장 영의정과 폐서인 이 씨를 치우지 못해?!”
부원군이 벌떡 일어나, 중전을 호위하며 궁인들을 향해 소리치던 그 순간.
헌이 갑작스럽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의 웃음에 궁인들은 모두 얼음이 되고 말았다.
중전 역시, 난데없는 헌의 웃음이 거슬리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내 헌은 저벅저벅 부원군을 가볍게 밀치고 중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가 쥐고 있는 왕의 유지를 향해 까딱, 고갯짓 해 보였다.
“해서 그 종이 한 장이 중전마마의 처소에 있는 지하로 통하는 밀실의 문을.”
“……!”
“영영, 잠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뭐?”
일순, 중전의 동공이 흔들렸다.
헌은 허리를 굽혀 중전과 시선을 맞춘 채, 쯧쯧 혀를 찼다.
“우리 아우가 중전마마의 이런 못되고 비열한 짓을 배울까 겁이 납니다.”
“뭐, 뭐라?!”
“중전마마, 세자라는 이 자리가 이딴 종이 한 장에 쉬이 뒤집힐,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하려면 제대로 하셨어야지요.”
조롱 섞인 헌의 말투에 중전이 눈을 번뜩였다.
“이딴 종이 한 장이라니! 전하의 뜻입니다!”
중전이 발악하며 그렇게 대꾸하는 순간.
“밖에 도승지 대감 있소?!”
갑자기 도승지를 찾는 헌의 목소리에 대전 안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대전 문 쪽으로 향했다.
중전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는데.
“예, 저하……. 도승지 들어있사옵니다.”
“도승지 대감과 어의는 당장 안으로 들라!”
어의까지 어쩐 일로 이 시각에, 이곳에 있는 것인지.
궁인들이 숙덕이며 조심스럽게 열리는 대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의와 도승지가 굳은 얼굴로 저벅저벅 들어서고 있었다.
헌은 굽혔던 허리를 펴 근엄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종이 한 장에 힘이 실리려면.”
“……?!”
“미령하신 전하의 뜻이 아닌, 옥체와 정신이 건강한 어지여야만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는 척입니까?”
“그게 무슨…….”
“도승지는 일전에 전하께서 따로 이른 어명을 전하라!”
거센 헌의 음성에 도승지가 들고 있던 족자를 펼쳐 들었다.
그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왕이 직접 어명을 내리듯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과인은 오랜 세월 정체 모를 병에 걸려 때때로 혼몽한 채, 헛소리를 지껄일 때가 있다.”
“…….”
“죽은 조 숙원을 찾으며 중전 김 씨를 숙원이라 일컫고. 세자 헌의 존재를 부정하며 중전 김 씨가 회임한 아이를 세자에 책봉하겠다는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하고는 한다.”
도승지의 말에 중전과 부원군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행여 과인이 정신이 투명하지 못할 때 그릇된 어명을 내려 나의 장자인 세자 헌을 폐위시킬까, 염려되어 도승지를 통해 직접 과인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안 돼.”
“조선의 왕세자는 이헌, 단 하나이며 과인은 결코 세자를 폐위할 생각이 없다. 과인의 뒤는 오직 세자, 헌만이 이을 수 있다.”
“……!”
“혹여 과인이 또다시 정신을 잃고 세자 헌을 폐위하고 중전 김 씨의 아이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명을 내린다면 그것은 결코 과인의 뜻이 아니며, 중전 김 씨를 조 숙원이라 칭할 때에 내뱉는 어명은 모두 잘못된 것이니 효능이 없는 것임을 미리 밝히는 바다.”
그러자 중전이 비명을 내지르며 절규했다.
도승지가 들고 있는 족자에는 역시, 옥새가 찍혀 있었다.
“하면 지금 이 나라의 지존이신 전하께서 노망이라도 걸렸단 말이냐?!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발악하는 중전을 가엾게 응시하던 헌이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전하께서 어의에게 이런 명을 내리셨지요. 어의는 전하의 뜻을 전하라.”
그러자 이번에는 도승지의 곁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어의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 저하…….”
“…….”
“전하께서 도승지 대감께 어지를 전하실 때 소신도 옆에 있었사옵니다. 혹시 전하의 병명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말들이 나오며 전하의 병세를 부정하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며. 전하께서 따로 소신에게 전하의 병명을 때에 따라 알려도 좋다고 하였사옵니다.”
어의는 고개를 들어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는 중전을 향해 반듯하게 이어 말했다.
“입에 담기 민망하옵고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
“전하께서는 오랜 시간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들으며 전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병세에 시달리고 계시옵니다.”
“하면…… 전하께서 노망이라도 걸리셨다는 말이야?!”
함부로 한 나라 왕의 병세를 떠벌리기라도 하겠냐는 듯, 중전이 되묻자 어의가 명료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중전마마. 전하께서 앓고 계신 병은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매병(呆病) 혹은 백치(白癡) 불리는 정신 질환 중의 하나이옵니다. 속된 말로 노망이라고도 하지요.”
모든 것을 잃은 얼굴로 중전이 스르륵 주저앉았고.
부원군은 괴로움에 얼굴을 감싸쥐며 중전에게서 등을 돌리고야 말았다.
다시 승기를 잡은 헌은 자신의 호위대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당장 중전 김 씨를 포함한 중궁전 궁인들을 모두 포박하라! 감히 전하의 옥새를 함부로 넘보다니.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이야.”
“예, 저하!”
헌은 주저앉은 채 포박당하는 중전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중궁전에 이상한 밀실이 하나 있던데. 자물쇠로 꽁꽁 잠겨 있어서 말입니다. 열쇠를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헌은 이내, 피식 웃으며 손사래 치며 말을 번복했다.
“아니, 아닙니다. 지금 정신이 없을 텐데 열쇠까지 내어놓으라 하면 마마께서 더 혼란스러우시겠지요.”
“……뭐?”
“열쇠 따위는 필요 없다! 당장 중궁전 밀실의 문을 부수어 박살을 내어라. 그 안에 무엇을 감춰둔 것인지 낱낱이 밝혀내야 할 것이야!”
싸늘하게 등을 돌리던 헌은 자신의 발아래에 기진맥진해 있는 중전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제게 대리청정을 명하시던 때, 이런 비극을 대비해 미리 장치를 심어둔 것이지요.”
“……하아.”
“이제 알겠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치고 발악해보았자, 이 궐 안에 중전마마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