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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세자를 폐위하라. (107/125)

107. 세자를 폐위하라.

2021.10.08.

“중전마마…… 돌아가심이…….”

“닥치거라. 곧 전하께서 나를 찾으실 것이니.”

추국청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중전은 대전 앞에서 왕자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이 넘어가고 있었다.

중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갈 때쯤, 대전으로 누군가가 쿵쿵거리며 들어섰다.

“마마, 마마!”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부원군이었다.

순간 중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슨 일이 터졌구나, 좋지 않은 직감이 그녀를 휘감는 순간이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대전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우참찬 대감이…… 추국청으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중전은 표정 하나 변함없었다.

오히려 터질 것이 터졌다는 듯 담담하기까지 했다.

“중전마마…….”

“경거망동 마세요. 우참찬이 잡혀간 것과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의연하게 대처하려는지 중전은 고개를 더욱 꼿꼿하게 치켜세웠다.

언제 어느 때, 자신들을 잡으러 올지 모르는 헌의 호위대였지만, 중전은 조금의 당황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요…….”

부원군은 대전 궁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은밀히 물었다.

그러자 중전은 대답이 없었다.

여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찬 바닥에 서서 왕자를 앉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왕의 부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쩌시려고요. 무작정 기다리고만 계시려고…….”

그때, 부원군이 초조한 얼굴로 중전을 다시 중궁전으로 데려가기 위해 팔을 뻗었는데.

대전 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숙원…… 조 숙원……!”

조 숙원을 찾는, 아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중전의 눈이 커졌다.

“되었습니다, 되었어요!”

중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왕자를 꼭 끌어안고서는 문앞에 바짝 다가갔다.

“뭣 하느냐? 열지 않고?”

중전이 대전 상궁을 향해 눈을 흘기자, 상궁은 난감한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조 숙원을 들라 하라! 조 숙원을!”

안에서 들려오는 왕의 외침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상궁은 요지부동이었다.

왕은 중전이 아닌 조 숙원을 찾고 있었지만, 중전은 자신이 들어가겠다 문을 열라고 하는 것이니.

“뭐 하는 것이야?! 속히 문을 열지 않고?!”

중전이 표독스럽게 소리치자 상궁이 그제야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오나 전하께서 그 누구도 안으로 들리지 말라는……!”

그 말에 중전이 상궁의 뺨을 우악스럽게 내리쳤다.

“아앗……! 마마……!”

한 손에 왕자를 안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쳐버린 중전의 얼굴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상궁은 부풀어 오른뺨을 감싸며 놀란 얼굴로 중전을 바라보았다.

“어, 어찌 쇤네의 뺨, 뺨을……!”

“내가 조 숙원이라면 조 숙원이 되는 것이고, 내가 문을 열라고 하면 넌 그저 열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어찌 아이를 안고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는지.

상궁은 벌벌 떨며 뺨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은 채, 궁녀들에게 문을 열라 눈짓을 해 보였다.

뒤에 서 있던 부원군도 악독한 그녀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전하…… 중전…….”

중전마마 들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상궁은 중전의 세찬 눈초리에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조 숙원…… 마마 들었사옵니다.”

그 말에 그제야 중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버님께선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지요.”

중전은 고고하게 허리를 곧추세운 채, 궁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조 숙원 왔사옵니다.”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중전이 왕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초점 없는 눈동자로 대전을 헤집고 다니며 조 숙원을 부르던 왕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중전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꼭, 어미를 잃고 헤매던 어린아이가 어미를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조 숙원!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왕의 흐트러진 모습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던 궁인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상선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에 가긴요. 신첩은 밖에서 내내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신첩을 찾으실 때까지 말입니다.”

왕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다가, 중전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보고는 흠칫했다.

그 와중에도 왕의 동공은 힘없이 풀려 있었다.

“이 아이는 누구…….”

왕의 물음에 중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왕자를 안겼다.

“전하께서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왕자 아기씨입니다!”

그 말에 왕이 화들짝 놀라며 왕자를 꽉 안았다.

“세상에! 우리 세자란 말이냐, 조 숙원?!”

곧바로 왕의 입에서 세자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중전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푹 숙여 있던 상선의 고개가 들렸다.

“전하…… 세자 저하께서는 동궁전에…….”

“씁. 어디 전하께서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

중전은 상선에게 입을 다물라며 호통쳤다.

왕은 믿을 수 없는지, 연신 포대기 속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 중전의 손을 끌어다 마른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고맙다, 고마워. 조 숙원 네가…… 세자를 낳아 주었구나…… 세자를!”

그리고 대전 밖에서 부원군과 대전 궁인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말과 동시에 중전은 이때다 싶어, 왕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숙원…… 어째서 무릎을 꿇는 것이야.”

이미 제정신이 아닌 왕은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꿇은 중전을 놀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전 역시,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께서 미령하시고 신첩이 출산하던 틈을 타.”

“……?”

“영의정이 신첩과 우리 세자를 죽이려 했사옵니다!”

“뭐, 뭐라?!”

왕은 파르르 떨며 중전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포대기에 감싸져 있던 왕자는 놀라 울음을 터뜨렸고, 대전에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퍼지고 있었다.

“영의정이?! 감히 누가 내 여인과 내 아들에게 손을 댄단 말이냐! 반드시 지킬 것이야. 내가…… 내가 꼭, 지켜낼 것이야!”

부들부들 떨던 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중전은 그런 왕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물을 슬쩍 닦아내며 더 연약한 소리를 냈다.

“전하…… 신첩은 무섭사옵니다. 우리 세자와 신첩을 꼭 지켜주셔요.”

더욱이 왕의 품을 파고들며 중전이 흐느끼자 왕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밖에 누구 없느냐! 밖에 누구 없어!”

그의 호통에 대전 문이 열리고 대전 상궁과 근위대들이 황급히 들어섰다.

중전과 왕자를 끌어안고 있는 왕의 꼴을 직시하자, 그들은 모두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나이까, 전하…….”

“지금 당장 영의정을 끌고 오거라! 우리 숙원과 세자를 해치려 한 파렴치한 인물이다!”

그러자 대전 상궁은 중전에게 뺨을 맞아 빨개진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근위대와 궁인들 모두 상궁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뭐…… 뭐 하는 것이야! 지금 당장 영의정을 끌고 오라니까?!”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뭐라?”

상궁은 눈물을 삼키며 입술을 뗐고 그 모습을 중전이 세찬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앞에 계신 분은…… 숙원 마마가 아니시옵니다.”

“뭐야?!”

“그리고 저하께서는…… 동궁전에 따로 계시지 않사옵니까.”

목숨을 건 상궁의 발언에 중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왕의 품에 안긴 왕자를 뺏어 안고 왕의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전하! 부디 저 간악한 무리로부터 신첩과 세자를 보호해주세요! 저들 역시 영의정의 무리입니다!”

“중전마마! 지금이라도 전하께 사실대로 고하셔야지요! 전하께서 정신이 혼미하신 틈을 타, 이러시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닥치지 못하느냐?! 저 보십시오, 전하! 이젠 신첩과 세자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전하를 병자 취급하고 있사옵니다!”

찢어질 듯한 중전의 외침에 왕의 얼굴을 시뻘게졌다.

왕은 엉금엉금 기어 장검(長劍)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칼집에 부딪혀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대전의 공기를 갈랐다.

순간,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던 궁인들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단숨에 그 장도를 상궁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세자가 따로 있어……?”

“……전하!”

“숙원이…… 숙원이 아니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신이 혼미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구나!”

그러면서 그녀의 목을 베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장도를 들자, 중전이 황급하게 막아섰다.

“전하! 이런 천한 것들 때문에 전하의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아니 되옵니다! 우리 왕자를 봐서라도 부디 참으시옵소서!”

중전의 가증스러운 울부짖음에 왕의 손이 멈추었다.

곧 그는 그녀를 갸륵한 눈으로 바라보다 장도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이리 착하고 어여쁜데…… 왜 우리 숙원이 아니라는 것이야…….”

왕의 눈에는 애틋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그의 눈에는 중전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 조 숙원이었던 것이었다.

상궁은 이 참담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절레절레 도리질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중전은 자신을 응시하는 왕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가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숙원, 어째서 자꾸 무릎을 꿇는 것이야.”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습니다.”

“……!”

“우리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주세요.”

그 말에 궁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중전을 내려다보는 왕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이 났다.

그는 한껏 흐트러진 모습으로 휘청이다 중전의 앞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럴까? 우리 숙원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야?”

“예, 전하.”

“…….”

“우리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여 전하께서 지켜주세요.”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이리 무릎까지 꿇는 것이야. 내 숙원이 아들을 낳으면 당연히 세자로 책봉해 줄 것이라고 약조하지 않았더냐?”

“……지금 당장 해주십시오, 전하. 이대로 대전을 빠져나가면 신첩은 왕자와 함께 영의정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대로 대전에서 물러나면 다음 차례는 중전, 자신이 될 것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우참찬 조 씨가 개처럼 끌려갔듯, 곧 자신이 추국청으로 질질 끌려가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져 난도질당할 것이라는 걸.

살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 중전은 애원했다.

그 말에 왕이 겁에 질린 얼굴로 도리질했다.

“그건 아니 되지! 누가 누구를 죽여! 나는 절대 너를 못 잃는다, 숙원!”

“하면…… 신첩이 살길은 단 하나입니다.”

“어찌해줄까? 응?”

“지금 저들이 동궁전에 있다고 우기는 세자를 폐위하고.”

“……!”

“이 왕자. 신첩, 조 숙원이 낳은 이 왕자를 지금 이 순간부터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어지(御旨)를 밝혀주십시오!”

뒤에 서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부원군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 헌을 폐위하고 중전이 낳은 아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순간.

이 모든 상황은 반전되고 말 것이었다.

권력을 잃은 헌은 이 모든 사건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고, 세자의 생모가 되는 중전은 이 사건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있는 것처럼, 궁지에 몰려도 당당하게 일관하던 작태의 까닭을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네가 아들 유세 한번 제대로 부리는구나.’

중전의 말이 대전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궁인들이 안 된다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그것은 절대 아니 되옵니다!”

상선과 상궁이 나서 적극, 중전의 말에 반대했다.

하지만 왕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으므로 그들의 반발이 더욱 왕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좋다. 내 조 숙원의 뜻대로 해주지.”

“……전하!”

“상선, 지금 당장 옥새를 내어 오너라!”

상선은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왕이 그런 헛된 결단에 옥새를 찍기 전에 헌을 데리고 와야만 했다.

그러자 상선의 꾸물거림에 왕이 핏, 조소를 터뜨리며 직접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다, 영의정과 한통속이라 이것이지?! 그래 좋다! 내가 직접 가져오지!”

그러면서 그가 터벅터벅 옥좌로 걸어가 붓과 종이를 꺼내 유지(諭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전은 반색하며 왕자를 끌어안고 그에게 다가가 황급히 입술을 열었다.

“이 아이 이름은 열입니다. 이 열(李悅).”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휘청휘청 붓을 움직였다.

“너희들이 세자라 생각하는 작금의 세자를 폐위하고!”

“……아니 되옵니다, 전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왕자, 열을 세자로 책봉하겠다!”

그리고 더듬더듬 옥새를 찾아, 그 말도 안 되는 유지 위에 찍으려는 순간.

“전하! 세자, 헌이옵니다!”

헌이 영의정, 그리고 소진과 함께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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