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명령입니다.
2021.09.27.
소진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궐을 나섰다.
동이 트자마자 집을 나서 종일 아버지 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더니, 여기저기 삭신이 쑤신 것 같았다.
헌이 보낸 무사들과 자신의 호위무사와 함께 집 앞에 다다른 소진은 대문 앞에서 한참 서성이고 있던 숙자를 발견했다.
“숙자야!”
그녀의 부름에 숙자가 서둘러 소진의 앞으로 뛰어 왔다.
“아씨!”
“어머니께서는?”
“안채에 계셔요. 왜 이리 늦으셨어요. 걱정했잖습니까.”
숙자는 소진의 팔을 꼭 잡은 채, 그녀의 몸을 살폈다.
행여 상한 곳은 없을까, 살펴보는 숙자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하였다.
“이리저리 다니느라……. 참, 보은군 대감께서는?”
소진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숙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숙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가시었습니다…….”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소진이 막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숙자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민추환 대감마님께서 직접 와 데리고 가셨어요.”
그 말에 소진의 두 다리가 굳고 말았다.
“뭐?”
그녀가 흠칫 동공을 떨며 숙자를 예민하게 돌아보았다.
그러자 숙자가 슬쩍 안채를 바라보다, 재빨리 소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까 정말 분위기 이상했다니까요?”
“소상히 말해봐.”
“보은군 대감마님께서 안방마님 곁을 오전 내내 지키고 계셨거든요?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쇤네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는데. 갑자기 오후에 민 대감마님께서 직접 오셨어요.”
“……해서 뭐라 하시더냐?”
“뭐 보은군 대감마님이 여기에 있는 게 오히려 아씨와 영의정 대감마님을 곤란하게 하는 거라며 화를 내셨어요.”
“화를……?”
숙자의 말을 듣고 있는 소진의 뺨이 점점 굳어갔다.
흙빛이 되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숙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보은군 대감마님께서도 민 대감마님과 맞섰습니다. 싸우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맞섰다는 게, 보은군 대감께서 못 간다고 했다는 말이야?”
“예. 그러셨어요. 게다가 여기에 무사들을 배치하라고까지 하셔서 정말 민 대감마님과 크게 설전이라도 벌일 뻔하였어요.”
“…….”
“보은군 대감마님께서는 호위무사를 배치하라고 하지, 민 대감마님께서는 입을 꾹 다물고 계시지. 아주 곤란해 죽는 줄 알았어요.”
민추환이 기어이, 자신의 아버지와 척을 지겠다는 말일까.
선뜻 나서서 도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번에 선을 그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너무 대신들을 호락호락하게 생각했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밀려왔다.
“말로는 우리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 민 대감마님, 저희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지요?”
“…….”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인 쇤네도 바로 알겠던데……. 참,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숙자 역시, 민추환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소진은 그런 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돌아서는 소진을 숙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고 이내 굳게 닫혔던 안채의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최 씨 부인은 애써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소진아. 얼른 들어오거라.”
* * *
해가 저물고 사위가 어둑해지자, 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 영의정이 갇혀 있는 옥사(獄舍)로 향했다.
그 곁에는 우참찬 조 씨가 비열한 조소를 연신 그리고 있었다.
“이참에 아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짓밟아 놓아야 합니다, 부원군 대감.”
조 씨가 안달이 난 얼굴로 부원군의 곁에 바짝 다가가 섰다.
“아니. 짓밟아도 되살아날 영의정이지.”
“……?”
“하니 죽여 놓아야 하오. 그것이 중전마마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명이오.”
우참찬 조 씨는 이제 완벽한 부원군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원군의 말에 조 씨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옥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래 끌지 맙시다.”
“…….”
“완벽히 만들어낸 증좌도 있으니, 더 끌 것 없습니다. 부원군 대감.”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중전마마께서 왕자까지 떡하니 낳았으니.”
“…….”
“우리 왕자님께 새 시대를 열어주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옥사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양반다리를 하고서 앉아있는 영의정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 세월 영의정의 사람으로 살아왔던 두 사람의 배신.
영의정이 자신들을 마주하면 노발대발하겠지, 속으로 짐작하며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들려오는 인기척에 영의정이 감고 있던 눈을 지그시 떴다.
“…….”
영의정은 조 씨와 부원군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태연한 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두 사람이었다.
“포기한 것인가.”
부원군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지워내며 물끄러미 영의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조 씨가 이죽거렸다.
“자포자기했겠지. 감히 그리 큰 죄를 짓고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소.”
그제야 덤덤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던 영의정이 피식, 웃었다.
짙은 조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갔다.
“그간 어찌 참았소?”
“……뭐?”
“이런 내 모습이 보고 싶어, 어찌 참았느냔 말이오.”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든 영의정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러다 우참찬 조 씨를 지그시 응시하며 다시금 입술을 뗐다.
“중전마마께서 왕자를 생산하셨다고 하니,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싶었소?”
“…….”
“하긴. 어쩌면 중전마마께서 왕자를 생산하시길 그 누구보다 고대했던 것이 그대였을 수도 있었겠군. 까딱 공주 아기씨라도 낳으셨으면, 그 얼굴이 볼만했겠소.”
“그 입, 닥치시지.”
“내 말이 틀렸소? 중전마마께서 아들을 낳아 이리 떵떵거릴 수나 있지. 딸을 낳으셨으면 이런 패악을 어찌 부렸겠소.”
의미심장한 그 말에 조 씨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이겨 물며 허리를 굽혔다.
오만한 얼굴을 하고서 영의정을 쏘아보던 조 씨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직 민추환 대감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다지?”
“…….”
“혹 그날 밤을 후회하고 있소, 대감?”
“그날 밤?”
“중전마마를 화론 파에서 제외하겠다, 선언했던 그날 밤.”
“…….”
“또한, 중전마마께서 떡두꺼비 같은 왕자 아기씨를 출산하시었던 경사스러운 그 날 밤 말이오.”
그러자 영의정이 껄껄껄, 소리를 내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난데없는 그의 웃음이 냉기만이 가득했던 옥사가 꽉 매웠다.
“후회한다고 하면.”
“…….”
“나를 여기서 꺼내주기라도 하려고?”
그 말에 부원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로 영의정의 멱살을 잡아 창살 앞까지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그의 손에 힘없이 끌려온 영의정이지만, 눈빛만큼은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오만방자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소.”
“……두고 볼 시간이나 있고?”
“뭐?!”
살기 서린 영의정의 말에 부원군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기서 내 멱살을 잡아끌 시간이…… 없을 텐데요?”
“……!”
“속히 저하께 가, 나를 얼른 처단하라 간곡히 청을 넣어도 부족할 텐데.”
혼잣말인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영의정의 멱살을 부원군이 거칠게 놓았다.
“나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
“중궁전이 위험해지리라는 것.”
“……!”
“두 대감 모두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찌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소?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내 명줄을 쥐고 있는 세자 저하를 찾아가 얼른 내게 엄벌을 내리라 징징거리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자마자 부원군은 분을 참지 못하고 영의정이 갇혀 있는 창살을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영의정이 피식거리며 절레절레 도리질했다.
“그래 봤자 네 발만 아프지.”
“뭐?!”
비아냥거리는 투가 다분한 영의정의 중얼거림에 부원군의 눈이 커졌다.
“지금 그대들의 꼴이 꼭, 맨손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격이니. 자꾸만 웃음이 나서.”
“네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 인정하기가 싫겠지.”
“…….”
“하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니까.”
부원군이 부들거리며 영의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영의정 역시, 바르게 치켜세운 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조소만 터뜨려댔다.
그때, 세 사람의 귀에 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예. 아니 그래도 증좌가 부족해서.”
“……!”
“영의정 대감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가 힘들었던 참인데.”
“저, 저하……!”
“잘 되었습니다.”
입구 쪽에 반듯하게 서서 뒷짐을 지고 있던 헌이 부원군과 조 씨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두 사람은 얼어붙었고 영의정은 지그시 헌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가만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던 헌이 휘적휘적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어쩐지 웃음기가 진득하니 묻어난 얼굴로 둘의 앞에 바짝 붙어섰다.
“그대가 나 대신, 영의정 대감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이겠습니까?”
“저하…….”
어째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부원군은 솟아나는 의뭉스러움을 밀어냈다.
그러곤 반듯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우나 고우나, 지금 영의정의 명줄을 쥐고 있는 것은 헌이었으니 부원군은 그에게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헌에게도 눈엣가시였던 영의정이었으니, 부원군은 당연히 이번 일만큼은 헌이 자신과 같은 편에 서리라, 장담했었다.
“그것을…… 어찌 제게…….”
그런데 왜, 이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헌의 눈빛에 저를 향한 경멸이 담겨 있는 것인지.
부원군은 힐끔힐끔 헌의 눈치를 살피며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한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고작 무사들의 말만으로 영의정 대감에게 그 죄를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
“그저 자결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여서요.”
“저하. 하오나 우참찬 조 대감의 증언도 있지 않았습니까?”
“…….”
“또한, 당시 함께 자리했던 화론 파 대신들이 아직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은.”
“…….”
“그날 밤,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영의정이 그런 사악한 짓을 벌였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감의 증언이…….”
“……?”
“과연 오랜 시간 화론 파를 이끌고 왕세자인 나와 맞섰던 영의정 대감을 무너뜨릴 만큼 힘이 있을까요?”
영의정은 헌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참찬 조 씨를 소상히 파헤쳐 보라, 소진을 통해 전달했던 자신의 청이 헌에게 닿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물끄러미 영의정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난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
“진실은 결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아바마마께서 누누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조 씨가 왜 갑자기 자신을 거론하며 넘어지는 것인지, 불안한 얼굴로 헌을 바라볼 때쯤이었다.
영의정과 느긋하게 시선을 주고받던 헌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조 씨를 바라봤다.
“해서 조 대감의 증언에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
“지금부터 조사해볼까 하는데.”
“예?”
“조 대감 사가의 대문을 한번 열어봐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당황해하는 조 씨를 대신해, 부원군이 헌의 앞에 바짝 다가가 서며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그게 무슨. 우참찬의 사가를 왜 조사하겠다는 것입니까?”
조금은 격앙이 된 목소리로 부원군이 따져 묻자, 헌은 입가에 그렸던 미소를 싹 거두었다.
“지금 내가 대문을 열어봐 달라, 청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
“명령입니다.”
간단한 그 말에 조 씨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하면 왜 영의정의 일에 조 대감의 사가를 뒤져봐야 하는지 연유를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호락호락하게 비켜나지 않을 기세로, 부원군이 되물었다.
그러자 헌이 씨익, 웃으며 옥사 입구에 서 있던 윤현을 향해 단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윤현, 지금 당장 추포했던 무사들을 이쪽으로 끌고 오거라.”
“……?!”
“오늘 나를 사칭해, 영의정 대감의 여식을 죽이려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헌의 호통에 부원군이 불안한 기색으로 조 씨를 바라보았다.
헌을 사칭했다는 말에 조 씨가 예민하게 어깨를 떨며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그들이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할 때쯤이었다.
“조 대감의 사가를 조사할 명분을 말하라 하였습니까?”
“저하, 그것은.”
“이젠 이 일에 나까지 연루되어 있다고 하면, 명분이 되겠습니까.”
“……!”
“이것은 나를 끌어들여 나를 사칭하고, 내가 영의정의 여식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감히 나를 몰아내고자 한.”
“저하!”
“반역의 움직임, 왕세자 권력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렇게 소리친 헌이 윤현을 향해 우악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지금 당장 우참찬과 부원군, 그리고 영의정. 또한,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대신들의 사가를 샅샅이 뒤지거라! 감히 누가 나를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것인지, 나는 반드시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