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자꾸만 너를 안고 싶어서.
2021.09.24.
“대체 할아버지께서 왜 여기에 계신 것입니까.”
최 씨 부인의 뒤에 서 있던 보은군이 딱딱한 얼굴로 민추환의 앞에 섰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은 난감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다가 옆으로 물러났다.
“못 들었습니까? 모시러 왔…….”
“들었습니다. 데리러 왔다고 하신 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마마. 내려오시지요.”
민추환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보은군 역시, 호락호락하게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직접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것은, 이번 영의정의 일에 발을 빼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아니 애초에 발을 담그지도 않았으니 영의정과의 사이에 선을 확실히 긋겠다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영의정 대감의 등을 돌려도…… 할아버지만큼은 끝까지 그편에 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영의정과 함께 해온 그였다.
그랬기에 이번 일 역시,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 여기며 당연히 영의정을 구제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피바람이라 할지라도 영의정의 손을 결코, 놓지 않을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은군의 착각이었다.
민추환은 그런 보은군의 예상을 적나라하게 깨뜨리고 있었으니까.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치며 보은군이 다시금 입술을 뗐다.
이래도 자신을 데리고 가겠냐는 듯한 얼굴로.
“아직 소진 낭자께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민추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은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요.”
곁에 서서 고개를 슬쩍 숙이고 있던 최 씨 부인은 민망함에 볼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영의정과 선을 그으려는 민추환의 태도가 그녀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한 규수가 걱정이 되는 것이면 무사를 보내겠습니다.”
“할아버지.”
“마마께서 직접 여기에 계신 건, 오히려 더 영의정 대감과 한 규수를 곤란케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반듯하던 보은군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평소 그답지 않은 조소였다.
“우리가 곤란해지는 것은 아니고요?”
민추환이 말꼬리를 잡는 보은군을, 최 씨 부인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가 왜…… 곤란해집니까. 지금 마마께서 뭔가 단단히 비뚤어진 시선으로…….”
“시선이 비뚤어진 것은.”
“……?”
“내가 아니라 화론 파 대신이겠지요?”
“마마……!”
“영의정 대감을 여지 것과 다른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보은군은 안채를 나서 천천히 돌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영의정 대감 소유의 무사들도 이곳을 지키고 있겠지만.”
“…….”
“우리도 이곳에 우리의 무사를 배치하시지요.”
그 말에 민추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불순하고 추악한 누명을 쓴 영의정을 보호한다는 건, 그 누명을 함께 쓰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달리 말하면, 중궁전에게 목덜미를 그대로 내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왜요? 못하시겠습니까?”
민추환이 머뭇거리는 시각이 길어지자 보은군이 다시, 조소를 뱉었다.
그러곤 무어라 말을 잇기 위해 입술을 달싹일 때쯤이었다.
“마음만.”
“……?!”
“황송한 그 마음만 받겠나이다.”
잠자코 둘을 지켜보던 최 씨 부인이 대꾸했다.
그러자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직시하던 보은군과 민추환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소진이 돌아오는 대로 연통 넣겠사옵니다, 마마. 하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민 대감과 함께 돌아가시지요.”
“……부인.”
“저희 가문을 염려하고 걱정해주시는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민추환과 보은군의 설전을 더 듣고 있다간, 민추환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최 씨 부인의 말에 보은군은 입술을 짓씹으며 민추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빙그르르 돌아, 최 씨 부인을 올려다보며 송구하다는 낯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면…… 가보겠습니다. 소진 낭자 돌아오는 대로 연통, 꼭 넣어 주십시오.”
“예. 마마. 살펴가시옵소서.”
반듯하게 허리를 굽히는 최 씨 부인의 모습을 끝으로 보은군은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민추환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들어오거라.”
무사히 동궁으로 온 헌과 소진.
소진은 이곳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처음 온 것처럼 낯선 얼굴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동궁 안으로 사뿐히 들어서자 드르륵 문이 닫혔다.
쿵, 문 닫히는 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헌의 말에 소진이 고개를 조아린 채로 그의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괜스레 궁녀 옷을 입고 그의 앞에 서니 꼭, 자신이 헌의 침소 나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게 됐다.
다소곳해진 그녀의 태도에 자리에 앉던 헌은 피식,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편히 앉거라.”
그 말에 소진이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동궁 한 가운데 앉아 있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듣는 귀는 많으니, 가까이 붙어 앉아야 할 것이야.”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바로 곁에 앉으라는 듯, 슬쩍 옆자리를 내어주며 방석을 톡톡 두드렸다.
“그쪽…… 으로요?”
소진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헌을 응시했다.
“응. 이쪽으로.”
“아이참…… 낯간지럽게. 그냥 여기에 앉겠습니다.”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터뜨리며 치맛자락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곤 그의 곁이 아닌 맞은편에 살포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헌이 불쑥 손을 뻗었다.
“앗……!”
단숨에 소진의 팔을 그러쥔 그가 힘주어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잡아당겼다.
스르륵.
거침없이 그녀는 앉은 채로 헌의 곁으로 끌려갔다.
“참, 말 안 듣네?”
장난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소진이 핏, 웃고 말았다.
“뭐야…… 놀랬잖습니까.”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인데.”
“…….”
“너랑 있는 동안만큼은 숨통이 좀 트여야 살지 않겠느냐?”
그 말에 소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예. 저 역시…… 요즘 편히 잠도 못 자는데. 저하와 함께 있을 때면 그나마 숨이 쉬어집니다.”
“그러느냐?”
“예……. 저하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란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하는 것을요?”
그러자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에 헌이 미소가 어린 얼굴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그의 그윽한 시선이 소담히 내려앉았다.
“하면 정말 하루빨리 같이 살아야겠구나.”
동시에 헌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기도 잠시, 그가 소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손에 볼을 비비던 헌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입술을 올려다봤다.
“이런 와중에도.”
“……!”
“네 입술만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참 미쳤구나, 싶다.”
“저하…….”
“어떡할 것이냐, 이제.”
“예?”
사뭇 진지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꾸만 너를 안고 싶어서 큰일이지 않으냐?”
“예에? 그것이 뭐…… 제 탓이라는 말이옵니까?”
새침한 얼굴로 소진이 대꾸하자 헌이 손을 뻗어 그녀의 뾰로통하게 내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맞지, 네 탓.”
헌의 말에 그녀의 뺨이 수줍게 달떴다.
소진은 그의 가슴팍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하면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그녀의 너스레에 헌은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반쯤 상체를 세우다, 그는 멈칫하며 소진의 목을 한 팔로 보드랍게 감았다.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촉,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두 사람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뽀뽀를 받아든 소진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 헌을 돌아보았다.
“저하! 아무리 아무도 안 본다지만…….”
“방금의 것은 평생 날 책임지겠다는.”
“……?”
“기특한 너의 말에 대한 내 대답이다.”
“예?”
씩, 미소를 그리는 그의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잘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소진은 이렇게 계속, 행복만 했으면 싶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환하게 밝아만 가던 소진의 얼굴이 멈칫하며 씁쓸한 빛을 보이자, 헌이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행복만 하고 싶다, 너와 함께.”
“……아.”
“그러기 위해 지금은 열심히 달려야겠지?”
부러 더 힘찬 목소리로 헌이 그렇게 말하며 소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그가 고갯짓을 해 보였다.
소진이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이 손 꽉 붙들고 시작해볼까?”
“예, 저하.”
“우선 영의정 대감께서 하신 말씀부터 차근차근해보아라.”
그녀는 깊은 헌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입술에 힘을 주었다.
* * *
“영의정 대감께서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이지.”
“예, 저하.”
“일이 복잡하게 되었구나. 김 도령 쪽이 우리라 알고 있는 사람이 영의정 대감이 되었으니.”
헌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마를 쓸었다.
곁에 앉은 소진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소진에게 영의정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갛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소진도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의 뒤로 다가갔다.
“하면 더 고민할 것도 머뭇거릴 필요도 없겠구나.”
“예?”
헌은 그저 가만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고심에 잠겨 깊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헌을, 소진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생각 정리를 하는 모양이다 싶어 그녀는 그를 더 재촉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의 곁만 지키고 있던 소진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때.
“치러 가자, 중궁전.”
“……저하.”
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음성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헌은 소진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깊숙이 교차했다.
“영의정 대감을 더, 곤경에 빠뜨리게 할 순 없다. 이것은 영의정 대감의 목숨과도 연관된 문제다.”
“……하오시면.”
“그들이 영의정 대감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대감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겠지.”
“……!”
“오히려 잘 되었다. 때만 기다리고 있던 내게도.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고팠던 대감에게도.”
“…….”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야.”
소진은 헌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일이 갈무리될 때까지…… 아버지의 곁에 머물 수는 없겠지요?”
그녀의 눈동자에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하였다.
“이곳에 나와 머물며 함께 일을 해결하자, 하고 싶지만.”
“…….”
“사가에 있는 부인께 얼른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예, 그렇지요. 한데 저희 아버지께서 당장이라도 어떻게 되실까 봐 너무 겁이 납니다.”
“…….”
“처음부터 아버지와 중궁전의 비밀을 의논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버지께서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
“그 생각이 들자, 꼭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네 탓이 아니라는 것, 잘 알지 않으냐.”
헌은 초조해하는 그녀를 품에 꼭 보듬었다.
“지금 당장 영의정 대감에게 갈 것이다.”
“……저하께서요?”
“내가 직접 가야지. 가서 모든 것을 대감에게 말하마.”
“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의 시발점이었던 1년 전의 일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그 말에 소진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 눈을 크게 떴다.
“저하…… 그럼.”
“그래.”
“……!”
“내가 기억을 잃었고.”
“하…….”
“잃어버린 내 기억을 소진이 네가 갖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말할 것이야.”
영의정에게 결국,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겠다는 헌.
소진은 먹먹한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패 하나는 내어주어야, 대감 역시 나를 믿고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