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덫을 놓은 자, 덫을 파괴하는 자.
2021.09.20.
“아버지, 아버지……!”
헌의 도움으로 영의정이 추포되어 있는 옥으로 들어온 소진.
궁녀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영의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미리 매수해놓은 문지기 덕분에 소진은 쉽사리 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영의정이 화들짝 놀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여기다……!”
영의정은 다급하게 손짓을 하며 소진을 불렀다.
소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그의 앞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아버지……!”
“소진아.”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안 본 사이 부쩍 야윈 듯한 그의 모습에 소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영의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창살이 야속할 뿐이었다.
“나는 괜찮지. 네 어미는? 어머니는 괜찮은 것이냐?”
“예, 저희 걱정은 마셔요. 저희는 아버지가 걱정일 따름입니다.”
“……그래. 나도 괜찮다. 내 걱정은 말아라.”
“진지는 끼니마다 잘 잡숫고 계신 것이지요?”
소진은 그렇게 물으며 눈물을 뚝, 뚝 흘렸다.
그녀의 하얀 볼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방울에 영의정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소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럼. 이 아비는 이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다. 하니 울지 말아라. 이 아비는 강한 사람이라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하지만…….”
“한데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너를 이리로 끌어들인 것은…….”
“…….”
“이제 너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의정의 말에 소진이 눈물을 훔치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갈 때쯤, 영의정이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한다.”
“말씀하세요, 아버지.”
사뭇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소진은 더욱이 그에게 집중했다.
은밀하게 낮아지는 영의정의 음성과 점점 더 굳어가는 소진의 얼굴.
영의정은 소진의 손을 꼭 잡으며 부르튼 입술을 엄중하게 뗐다.
“너도 대충 들어서 알다시피 나는 지금 함정에 빠졌다.”
“예, 아버지.”
“이 함정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아느냐?”
“함정을 설치한 자를 찾아내어…… 무고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소진이 눈을 반짝이며 영의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영의정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도리질했다.
“아니.”
“…….”
“함정을 설치한 자를 찾아내 무고를 밝혀내 봤자, 언제든 내 목에 칼을 겨눌 자들이지.”
“……하면요?”
“함정을 놓은 자를 박살내어 덫마저 없애버리는 것. 나를 건드린 그 모든 것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조리 부수어 놓는 것.”
“아버지.”
“그것이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이다.”
견고한 그의 눈빛을 바라보던 소진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녀 역시, 눈물을 지워낸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단단히 치켜들었다.
“중궁전.”
“아…….”
“이제부터 중궁전의 몰락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배후를…… 중전마마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그렇게 묻는 소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체 영의정은 왜 배후를 중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저 손 놓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누명을 쓰고 이곳으로 추포되어 온 것인데.
이렇게까지 그가 확신하며 중궁전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자 영의정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배후든 아니든, 그따위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다만, 너를 건드렸다는 것.”
“……!”
“감히 영의정의 여식을 건드렸다는 것, 그것이 제일 큰 죄악이지.”
홀로 읊조리던 그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돌고 있었다.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소녀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마침 소진에게도 중궁전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군과도 같은 존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대신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비밀이라 하시면.”
순간 긴장한 소진의 목울대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영의정은 조금 전보다 더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으며 자세까지 낮추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중전이.”
“……?”
“마을의 여인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
그 말이 소진의 귀에 닿자마자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여인들을…… 데리고 장난이라니요?”
우선은 모르는 척, 영의정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역시, 내내 중궁전을 의문스러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던 것을 소진도 알고 있었다.
“너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겠지.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진다는.”
“예에…….”
“그것이 중궁전과 연관이 있는 것 같구나.”
“확실한 증좌가…… 있습니까?”
소진의 물음에 영의정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 확실한 증좌를 내 손에 넣지 못해…… 내가 쉬이 중궁전을 치지 못하였지.”
“하면 어떻게 중궁전을 처리하시려 하옵니까?”
“미리 매수하려던 궐 문지기들도 누군가가 먼저 데리고 갔더구나.”
“…….”
“또한, 도성문과 뱃길마저 일찌감치 꽁꽁 묶어둔 것을 보면 나 말고 중궁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가 더 있다는 것이다.”
“예, 아버지…….”
“김 도령이라는 이번 일과 큰 관련이 있는 그 사내 역시 누군가가 저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포도청에 덫까지 설치해 놓은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간 중궁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홀로 많은 것을 알아낸 그였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헌이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소진은 입술을 꾹 앙다문 채 영의정의 말만 잠자코 들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야.”
뒤이은 영의정의 말에 소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해서 네가 그 사람을 좀 찾아주어야겠다.”
영의정의 말에 소진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자는 분명 궐과 연루된 사람일 것이다.”
“……!”
정확한 그의 추측에 소진의 고개가 세워졌다.
“도성문과 궐문을 그리 마음대로 잠그라, 명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람이거나.”
“…….”
“그자의 권력에 비빌 수 있는 인물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예…….”
차마 그것이 헌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소진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
“이곳에 갇히기 전까지 이것저것 알아놓은 것이 다행이었지. 세자 저하께서 아무래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소진의 동공이 숨김없이 떨리고 있었다.
“도성문과 바닷길을 차단한 것이 세자 저하라고 하더구나.”
“그렇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영의정이 고개를 슬쩍 주억거리며 소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세자 저하께 그대로 전하고.”
“…….”
“중궁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자를 좀 찾아달라, 청을 드려야 한다.”
영의정의 말에 그녀가 입술을 꾹 감쳐 문 채, 슬그머니 영의정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해서 중궁전이 감추고 있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를 찾아내어 어찌할 생각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그가 가진 증좌를 합하여.”
“…….”
“내가 직접 중궁전을 칠 것이다.”
“직접…… 요?”
이 일은 헌과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영의정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하다가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선, 헌과 상의를 해 방도를 잡아 놓은 후에 영의정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직접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영의정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이미 내가 그들의 의심을 받고 있을 것이다.”
“예?!”
“중궁전에서는 아마, 자신들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거머리 같은 인물로 나를 지목하고 있을 테지.”
“……어째서요?”
“포도청 사람과 몇 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 내가 그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그들이 알고 있고.”
그 말에 소진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알겠습니다. 속히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영의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느 때 보다 힘이 있었다.
* * *
-이 모든 것을 저하께 전하고 한 가지 더. 우참찬에 대해 은밀히 알아봐 달라는 말도 덧붙여 주어라.
옥을 나서는 소진의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그녀의 발아래에는 꼭 쇳덩이라도 매단 듯이 무거워 보였다.
질질 신을 끌며 그녀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며 영의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참찬…… 조 대감님 말씀입니까? 그분은 왜. 오랜 시간 아버지와 함께 뜻을 해온 분이 아닙니까?
-그랬지. 그런데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그자다.
-어째서……!
-찾고 있었거든, 내가. 중궁전에게 따박따박 정보를 갖다 바치는 쥐새끼 같은 놈을.
-……아.
-캐보면 분명 마을에 사라지는 여인들과 중궁전 그리고 우참찬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알겠다고 굳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차마 영의정을 홀로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만 했던 소진.
그녀는 자신을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던 문지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곤 밖으로 완전히 나오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버지…….”
중궁전의 비밀을 완벽히 터뜨리지 못하면 영의정은 이대로 누명을 쓰고 몰락할 수도 있었다.
이제 그 일에 제 아버지와 가문의 명줄까지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그때, 주저앉은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고개를 젖히는 소진의 눈동자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소진아.”
흐릿하던 시야 앞에 커다란 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손을 내밀며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저하…….”
소진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뜨거운 그의 열기가 그녀의 작은 손 위에 고스란히 닿았다.
휘청이며 소진이 일어서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소진의 양팔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러곤 명료하고 단호한 음성으로 입술을 떼며 그녀와 시선을 수평으로 맞췄다.
“이제 내게 말해 보거라.”
“…….”
“네 아버지를 살릴 방도.”
그 목소리는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단번에 뚫는 강렬한 빛이었다.
“내가 무조건…… 영의정 대감을 살릴 것이야. 그러니 영의정 대감께서 네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
“소상히 일러주겠느냐?”
이 순간, 헌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이 어찌나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지.
소진은 당장이라도 헌을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헌을 향해 입술을 뗐다.
“예. 아니 그래도 아버지께서 저하께…… 간곡히 청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헌이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여기는 위험하니 동궁으로 가자꾸나.”
덫을 놓은 자와 덫을 파괴하려는 자의 피 튀기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헌의 뒤로 다가갔다.
저하를 모시는 동궁전 궁녀처럼 행동하며 그녀는 그와 함께 동궁을 향해 걸음을 뗐다.
* * *
한편, 영의정의 사가.
보은군은 소진이 돌아올 때까지 최 씨 부인의 곁을 지키려 했다.
그때, 숙자의 목소리가 안채 밖에서 들려왔다.
“저…… 안방마님.”
조금은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보은군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래, 무슨 일이냐.”
“……보은군 대감마님을 뫼시러 오셨습니다.”
그 말에 보은군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최 씨 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보은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괜찮으니 가 보세요, 마마.”
“소진 낭자…… 오는 것은 보고 가겠습니다.”
“마마를 직접 모시러 온 것 같은데……. 소진이가 무사히 오면 연통을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안채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밖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아…….”
보은군 역시, 휘적휘적 최 씨 부인의 뒤로 다가와 조금 더 머물다 가겠다고 말하려 하는데.
“……할아버지.”
민추환이 직접, 보은군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마마. 사가로 모시겠습니다.”
빳빳하게 세워진 그의 고개를 바라보는 최 씨 부인의 눈동자에 절망이 번져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