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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안 놓아요, 결코. (101/125)

101. 안 놓아요, 결코.

2021.09.17.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헌의 호위대.

헌은 소진과 말 위에 올라선 채로 물끄러미 무릎을 꿇고 있는 무사들을 바라봤다.

“저하……. 어찌하올까요?”

윤현의 물음에 헌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들을 내려다보다, 지그시 입술을 열었다.

“어찌하긴. 모두 궐로 데리고 가거라.”

“바로…… 말씀입니까?”

헌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인 채, 무심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죄명은.”

“…….”

“왕세자 사칭 및 반역 도모다.”

반역 도모라는 말에 무사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치켜들어 헌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러자 헌은 빳빳하게 고개를 정면으로 세운 채로 거세게 소리쳤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냐!”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그의 음성에 모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다.

그중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와 헌의 앞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

“반역 도모는 결코 아니옵니다! 결코!”

“닥치거라.”

“저하……! 반역이 아니라 그냥 잠깐 장난을 친 것뿐……!”

그저 장난을 쳐본 것이라는 무사의 말에 헌이 크게 분노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지체 없이 그 무사의 목에 겨누며 말을 씹어 뱉었다.

“장난이라 하였느냐.”

낮은 그 목소리에는 독기가 그득했기에 모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소진 역시,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잔뜩 긴장해 그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눈빛만 쏘아대며 그의 목에 세차게 칼을 겨누고 있던 헌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나도 네 목숨을 갖고 장난 한번 쳐 볼까?”

금방이라도 무사의 목을 베어낼 것만 같은 그의 냉기 서린 음성에 무사는 온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역의 연유야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

“…….”

“걱정들 하지 말거라. 내 왕세자의 이름을 걸고 너희를, 반역자로 처넣어 줄 것이니.”

그 말을 끝으로 헌이 무사의 목에 겨누었던 칼을 겨누며 윤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윤현이 호위대와 함께 그들을 모두 일으켜 한줄로 세우고 있었다.

소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다.

“저하…… 이제 어쩌실 작정입니까?”

“그간 너무 때만 기다린 것 같구나.”

“……하오시면.”

“이젠 그, 때가 된 것이지.”

헌은 소진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말 고삐를 바짝 움켜쥐었다.

“가자꾸나.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예?!”

그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소진을 태운 헌의 말이 무사들을 지나쳐 어딘가로 급히 향하기 시작했다.

* * *

“밤새 영의정을 찾은 이도 또한, 찾아와 달라 부탁한 이도 없다 하옵니다.”

“쯧쯧. 하긴. 감히 국모의 아들을 죽이려 한 중죄인을 누가 보호하겠느냐?”

중전은 조소하며 품에 안긴 왕자의 뺨을 살살 쓸었다.

“한 규수는.”

“무사들을 보낸지 꽤 되었으니 곧 좋은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중전은 불편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영의정보다 한 규수, 그년이 더 거슬린단 말이지.”

“한데…… 마마. 민추환 대감도 그렇고 보은군 마마도 그렇고.”

“…….”

“그렇게 영의정 대감 뒤에서 호사란 호사는 다 누리더니……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비춘답니까?”

상궁이 그렇게 종알거리자 중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 원래 그토록 간사하고 치사한 법이란다. 이제…… 슬슬, 보은군을 움직이게 해볼까?”

의미심장한 그 말에 상궁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은군 마마를요……?”

“내 아드님께서 장성하시기 전에, 걸림돌이 될 인물은 죄다 치워놔야지.”

“……어찌.”

“보은군을 심리를 자극해, 세자의 자리를 빼앗게 하면…… 어떨까? 그러다 결국, 둘 다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이지. 하하하!”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 중전이 깔깔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그 순간, 중전의 귀에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중전마마, 민 소용 들었사옵니다.”

그러자 중전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민 소용……?”

곁에 있던 상궁이 황급히 왕자를 품에 보듬으며 중전을 바라봤다.

“어찌 하올까요?”

“축하 인사는 받아야겠지. 들라 하여라.”

그러면서 중전이 반듯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내 중궁전의 문이 열리고 당의 안으로 손을 다소곳하게 집어넣은 민 소용이 저벅저벅 들어서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조아린 그녀가 중전의 앞에 서서 반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그러자 중전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민 소용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앉게.”

짧은 그 말에 민 소용이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중전을 직시했다.

곧 민 소용이 중전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꺼낸 첫마디는 중전을 웃게 했다.

“감축드리옵니다, 중전마마.”

잔뜩 예를 갖춘 채 그렇게 말을 꺼낸 민 소용은 다시금, 중전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내가 아들을 낳았으니…… 내게 없던 예의라도 갖추고 싶은 것인가?’

속으로 콧방귀를 껴대며 중전이 오만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려는 순간, 민 소용이 고개를 들어 이어 말했다.

“영의정 대감을 뜻하시던 대로 가두게 되었으니.”

“……?”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뼈가 있는 듯한 민 소용의 말에 중전의 얼굴에 금이 갔다.

“……하면 지금 감축드린다는 것이.”

“예.”

“……!”

“영의정 대감을 손에 넣으셨으니 응당, 감축드려야 할 일로 사료가 되어 영의정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리로 온 것입니다.”

“민 소용! 이리 방자한 년을 보았나!”

중전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영의정은 내 왕자를 사살하려 한 중죄인이다! 한데 지금 네가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연유가 무엇이야!”

“연유……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라?”

“영의정 대감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요.”

“……!”

“내 영의정 대감과 오랜 시간 막역하게 지내온 사람으로서 결코, 이번 일은 영의정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대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가엾구나. 대체 너희는 영의정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냐?”

중전의 비아냥거림에 민 소용이 비릿한 조소를 터뜨렸다.

“행복하십니까?”

난데없는 그 물음에 중전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렇게 묻던 민 소용은 다시 이어 말했다.

“아니, 행복하셔야지요. 마마께서는.”

“무슨 뜻인가.”

“마마의 행복을 위해 무구한 목숨을 희생시켰으니.”

“……!”

“당연히 행복해지셔야지요.”

중전은 서안을 세차게 내려치며 분노했다.

“누구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 그 세 치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냐!”

“…….”

“다신 그 입 못 놀리게 해주랴?!”

세찬 중전의 고함에도 민 소용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동안 소인이 왜 침묵을 택하였는지. 아십니까, 마마?”

“……헛소리 지껄일 거면 당장 꺼지거라. 네 시답잖은 소리나 듣고 앉아 있을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적어도 마마의 안중에는 내 사람이 없었으니 그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방관이라 말하며 중전을 마주하는 민 소용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예. 소인 역시, 방관자이니 죗값을 치르라면 치르겠사옵니다. 하나.”

“…….”

“혼자 죽지는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네 뒷배를 자처하던 영의정이 큰 죄를 저지르고 옥에 갇혀 있으니…… 왜. 초조하기라도 한 것이냐?”

“…….”

“해서 영의정 다음으로 내가 제거할 인물이 네 아들일까 봐.”

“…….”

“그게 노심초사 되어 이리 사색이 되어 달려와 고작 협박 따위를 퍼붓는 것이야?!”

그러자 민 소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찬 눈빛으로 중전을 쏘아보았다.

“그간 입을 다물고 죽은 듯이 살았던 것은 내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

“침묵하는 죄 역시, 중전마마가 저지른 일에 동조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역시 모두, 내 아들인 보은군 때문이었지요.”

“…….”

“보은군을 건드리지 마세요.”

“……민 소용.”

“마침 직접 아들을 낳아 보셨으니 제 마음을 잘 아시겠지요?”

그러면서 민 소용은 짙은 냉기를 뿜어내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건드리지 말라면 내가 고분고분 네년 말을 들어야 하느냐?”

움켜쥔 중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곧 그 불똥은 옆에 있던 상궁에게 튀고 말았다.

“한 규수가 어찌 되었는지, 왜 여태 감감무소식이야! 네가 직접 나가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여라! 얼른!”

* **

한적한 숲속, 훤히 트인 전경을 내려다보며 헌이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이어 소진을 땅으로 내려주며 그 손을 꽉 잡았다.

“밤새…… 걱정하였지, 소진아.”

“아버지께서는…… 무사한 것이지요?”

“강경하신 분이지 않으냐. 잘 버티고 계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궐로 끌려가신 거라…….”

“…….”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계시지는 않을까, 내내 걱정하였습니다.”

영의정의 생각에 소진의 눈시울이 빨개지고 있었다.

헌은 그런 소진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나는 영의정 대감과 척을 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

“이제 그와 같은 길을 걸어보려 한다.”

“저하……!”

그의 말에 소진이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헌의 보드라운 시선이 그녀의 빨개진 눈을 그윽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영의정 대감과 나는 한평생을 다른 곳을 보고 다른 길을 걸으며 살아왔지만.”

“…….”

“이 순간만큼은 각자의 신념을 묻어두고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거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헌의 옷깃을 꼭 붙든 그녀의 작은 손에 힘이 실렸다.

그는 제 옷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꽉, 쥐고 있는 소진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한소진, 너.”

“……!”

“너를 지키겠다는 그 마음만큼은 영의정 대감과 같으니까.”

“저하…….”

“대감을 대신해 내가 너를 지키고, 대감 역시 나를 대신하여 너를 지켜줄 것이야.”

소진은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영의정 대감께서 꼭 너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내게 부탁하시었다.”

“아버지…… 흐윽.”

“평생 함께해온 화론 파 대신들도 아닌, 너를 찾았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야. 다른 이도 아닌 꼭 너여야만 한다고 하였으니.”

“…….”

“네가 영의정 대감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것 같구나.”

헌은 그렇게 말하며 소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 수 있겠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그가 허리를 굽혀 물었다.

그러자 소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헌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해보겠습니다.”

“오늘처럼 난 항상 네 뒤를 지키고 있을 것이니.”

“…….”

“아무 염려 말고 영의정 대감을 만나러 가거라. 혹,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주저 말고 이야기하고.”

그의 따뜻한 말에 소진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촉, 제 입술을 맞추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소진이 다부진 얼굴로 다시금 말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헌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깊숙이 안았다.

“소진아.”

“예, 저하…….”

“이 겨울이 끝나면.”

“……?”

“함께 살자꾸나.”

그의 말에 소진이 얼떨떨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무리 거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해도, 내 이 손은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니.”

“……!”

“꽃 피는 봄이 오면 이 맞잡은 손에 같은 가락지를 나눠 끼고. 같은 집에서 같은 꽃을 바라보며 함께 살고 싶구나.”

“…….”

“그때까지 잡은 내 손, 놓지 않을 수 있느냐?”

그의 물음이 그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금세 소진의 커다란 눈에 뜨거운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그녀의 눈을 울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예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소진은 생긋 웃으며 그와 꽉 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놓아요, 결코.”

그 말에 헌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다시 말 위에 앉혔다.

그러곤 가만히 소진의 손을 다시금 그러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놓는다고 해도 내가 다시 잡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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