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100/125)

100.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2021.09.13.

“늘 보던 곳은 위험할 수도 있어, 그저 궐 근처 동산에서 보자 하시었습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저하와 늘 만나던 곳은 정자나무 언덕이었는데……, 참일까?’

무사의 대답에 보은군은 속히 소진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온기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숙자와 호위무사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소진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호위무사가 따를 것입니다. 대신 정 걱정되시면…… 제 어머니를 좀…… 곁에서 지켜주세요.”

“낭자.”

“부탁합니다.”

그리고 소진은 곧장 숙자를 잡아끌어 등을 돌렸다.

그러곤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입을 열었다.

“너는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혹 세자 저하께서 보내셨다는 무사가 또 나타나거든.”

“……예?”

“내가 궐 근처 동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거라.”

“아씨, 그건…….”

“혹시 이 자가 덫이라면.”

“……!”

“덫을 놓은 이를 잡아야지.”

그 말에 숙자의 눈이 번쩍 떠지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이딴 덫을 놓아,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자는 분명 제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작자일 것이었다.

소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숙자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예, 아씨.”

이내 소진은 헌이 보냈다는 무사의 뒤를 따랐다.

그러곤 보은군을 향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보은군은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응시하다, 그녀의 호위무사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낭자를…… 잘 부탁하오.”

“예, 알겠습니다.”

* * *

소진은 최대한 그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연신 주위를 살피며 무사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소진은 별안간 좋은 묘수가 떠오른 듯, 후다닥 그의 뒤로 다가갔다.

“저…….”

그러자 앞만 보며 걷던 무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예?”

소진은 아까와 달리 경계를 풀고서 히죽 웃었다.

“저하께서 따로 전해주신 서찰 같은 것은…….”

“……?”

“없사옵니까?”

그녀가 무사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저하와 함께 있던 무사분…… 아닙니까?”

그 말과 함께 소진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괜히 겁먹은 얼굴로 미간을 구긴 채, 무사를 위아래로 훑었다.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에요……? 본 것…… 같은데?”

“……아.”

“어제 제가 낮에 저하께 전할 서찰이 있어…… 잠시 뵈었었는데……?”

“그것이…….”

“모릅니까? 분명 여러 무사와 함께 오셨잖습니까?”

“……!”

“아닙니까?”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잔뜩 흐린 눈으로 무사의 위아래를 훑었다.

“뭐야……. 저하께서 보내신 무사가 아닌 것이야?”

다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진이 무사를 힐끔거리자, 그는 당황한 듯 이내 소진이 반응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맞, 맞습니다.”

“맞습니까? 하면 답신은…….”

“아, 그것은 지금 저하께서 직접 주신다고 하시었습니다.”

“어제 제 서찰의 답신을 말입니까?”

“예, 아씨.”

무사의 대답이 소진의 귀에 닿자,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자가 함정이었구나.’

소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활짝, 웃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속히 갑시다. 저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예…….”

무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자신의 호위무사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무사님.”

낮고도 은밀한 그녀의 목소리에 호위무사가 꼿꼿하게 정면을 유지한 채, 입술만 벙긋거렸다.

“예. 아씨.”

“저 무사…… 저하께서 보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호위무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마 더 많은 무사가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 저놈의 뒤를 가격하는 것이…….”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무사를 생포하고 배후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한 명은 가볍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호위무사가 소진을 슬쩍 뒤로 잡아당겨, 막아서려는데.

“……?”

소진은 서둘러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나무 막대기를 주워들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고.”

호위무사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소진은 여유 있게 싱긋, 미소 지었다.

“혼자보단 둘이 낫지요.”

두 사람은 동시에 앞서 걷는 무사의 뒤를 바라봤다.

* * *

“……뭐라?”

허겁지겁 정자나무 언덕으로 올라온 무사는 숙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헌에게 전했다.

그러자 헌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다른 무사가 한 규수를 데리고 갔다?”

“예. 궐 문 쪽에 있는 동산으로 모시고 갔다 하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헌은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왔던 말에 서둘러 올라탔다.

“저, 저하……!”

그러자 무사 역시, 말에 올라타며 헌의 뒤를 비호하려 했다.

“날 비호 할 필요 없다. 너는 지금 당장 궐로 가 영의정에게 가거라. 가서 한 규수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리거라!”

“예, 알겠습니다!”

멀리서 헌을 지키고 있던 호위대들도 우르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모두 궐문 쪽 동산으로 향한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면서 깊은 새벽, 윤현과 은밀하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불안하구나. 중궁전이 영의정까지 잡아둔 마당에…… 한 규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도 않고.

―제가 뒤를 따를까요.

―너는 지금 강 씨 부인이 잘 감금되어 있는지 확인 후에 환궁하지 말고.-

―…….

―곧바로 영의정의 사가로 향하거라.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그는 윤현을 불러 소진을 지키라 일렀었다.

‘내가 내일 궐 밖을 나가 한 규수를 무사히 만날 때까지 한 규수의 뒤를 네가 따르도록 하여라.’

‘예, 저하.’

그렇게 명을 미리 내려둔 것이 다행인 일이 될 줄이야.

헌은 말의 배를 툭, 차며 속력을 올렸다.

“그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내 오늘 중궁전을 필시 무릎 꿇리고 말 것이다.”

배후를 알아보고 말 것도 할 것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소진을 습격한 것은 중궁전이 틀림없을 테였다.

허리를 낮춘 채 속도를 내는 헌의 얼굴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서둘러라! 감히 세자를 사칭한 반란의 무리다!”

헌과 그의 호위대는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맹렬히 저잣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너를 홀로…… 궐밖에 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헌은 고개를 치켜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모든 것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모든 세력을 처치하고 소진을 제 곁에 둘 참이었다.

그때, 모래바람 때문에 뿌옇게 된 그의 시야에 아까 무사가 말한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려, 한소진.’

이를 악문 그의 눈빛은 모래바람 속에서도 불같이 번뜩이고 있었다.

* * *

“하아, 하아……. 또 있어?”

한참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낸 무사를 공격하고 보니 여기저기서 무사들의 무리까지 튀어나왔다.

소진과 호위무사,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윤현까지 세 명이서 그들을 제압했는데도 또 한 무리가 더 나오고 있었다.

소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막대기를 다시금 움켜쥐었다.

호위무사는 생각보다 많은 세력에 조금 당황해하며 소진을 뒤로 보호했다.

일찌감치 나타나 함께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윤현 역시, 표정을 굳히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한데…… 대장님께서는 어찌 알고 오신 것입니까?”

소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윤현을 올려다봤다.

“저하께서…… 미리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저하께서 이쪽으로 오실 것입니다.”

한 수 앞까지 내다보고 명령을 내린 헌에게 감복하기도 잠시.

점점 더 거리를 좁혀오는 무사들의 무리에 그녀의 호위무사가 소진의 등을 떠밀었다.

“아씨. 여기서부터는 무리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막아설 테니, 아씨께서는 속히 달아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놈들을 모두 생포해 배후를 밝혀야 하오. 이놈들이 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무리와 같은 배후일 것이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한껏 긴장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피하십시오, 아씨!”

“……!”

그들이 소진을 향해 검을 겨눈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윤현이 있는 힘껏, 소진에게 달려드는 무사를 제압하며 소리쳤다.

“얼른요!”

이미 호위무사와 윤현은 그들과 한데 엉켜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소진은 사람들을 더 데려오기 위해, 저잣거리 쪽으로 막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앗!”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무사 한 명이 튀어나와 그녀를 잡아채려고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발을 움직였다.

“잡아라! 계집이 도망친다!”

자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무사들을 돌아보곤, 소진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숙련된 무사들을 앞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잡히면 안 돼, 잡히면 안…… 앗!’

그때였다.

“……!”

이쪽으로 달려오던 웬 말을 탄 사내가 저잣거리 쪽으로 달려가는 소진을 휙, 낚아채 말 위로 올렸다.

놀란 소진이 파르르 떨며 휘청거리자 그 사내가 소진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곤 그녀가 미처 누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칼을 뽑아 들어, 소진을 공격하던 무리를 쳐내기 시작했다.

“누, 누구……!”

그를 선두로 뒤에서는 화살촉이 무수히 날아오고 있었다.

소진이 한껏 몸을 웅크리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보듬어 자신의 몸과 밀착시켰다.

그러곤 겁에 질린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소진아.”

“저하……?!”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아라! 모두 잡아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그렇게 소리치는 헌의 목울대에 굵은 핏대가 섰다.

소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몸에 등을 기댄 채 바들바들 떨었고, 그는 능숙하게 말을 몰며 무사들을 한 손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저하…….”

“잠시면 된다.”

그 말과 동시에 헌이 소진의 눈을 한 손으로 살며시 가렸다.

칼을 휘두르는 장면을 그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작게 움츠러든 소진의 몸을 단단히 자신의 품에 고정한 채, 헌은 이를 악물고 그들과 맞섰다.

소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 * *

“대감마님, 대감마님…….”

헌이 보낸 무사는 은밀히 옥(獄) 안으로 들어와 영의정을 찾았다.

그러자 반듯하게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있던 그가 번쩍 눈을 떴다.

소진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영의정은 다급하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무사 하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저하께서 보내는 것이냐?”

“예, 대감마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는 말에 영의정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누군가가 한 규수를 노리고 있습니다.”

“뭐야?!”

짜증스럽게 소리를 내지르며 영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주먹으로 문을 쾅, 쾅 내려치며 터지려는 분노를 꾹, 꾹 삼키고 있었다.

“저하께서 미리 손을 써두신 탓에 큰 위기는 없을 것이오나, 대감마님께서도 아시고 계셔야 할 것이라며…… 저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괜찮은 것이냐?! 소진이는…… 소진이는 무사할 수 있는 것이야?!”

“예. 저하께서 곧바로 달려가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하……!”

영의정은 침통에 잠긴 채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여식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라니.

그는 참담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자신을 대신해, 그녀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헌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

“내 여식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경고하였을 텐데.”

그렇게 읊조리던 그가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네년이 노리고 있는 것이 내 여식의 목숨줄이라면……. 나 역시, 너를 궐에서 내칠 수밖에 없겠구나. 단.”

“……!”

“살아서는 못 나간다. 내 여식을 건드린 죗값은 치러야지.”

어느새 독으로 얼룩진 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중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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