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한발 뒤로 물러나, 뒤를 따르겠습니다. (99/125)

99. 한발 뒤로 물러나, 뒤를 따르겠습니다.

2021.09.10.

민추환의 사가로 향하는 길.

보은군과 소진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새벽길을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저잣거리는 한산했다.

“걱정…… 많이 하셨습니까?”

내내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걷기만 하는 보은군을 향해 소진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바닥만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옅은 실소를 터뜨렸다.

“괜찮습니다, 저는.”

“낭자…….”

“다만…… 홀로 갇혀 계실 아버지가 걱정이지요.”

“제 외조부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말에 소진이 걷던 걸음을 멈추곤 가만히 보은군을 응시했다.

그 역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차분한 눈길에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이번 일로…… 대감을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어요.”

소진의 말에 보은군의 굳게 맞물렸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낭자, 그것이 무슨.”

“아버지께서…… 중전마마의 아기씨를 사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셨답니다. 대감께서도 들어서 아시지요?”

그렇게 묻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었다.

“예……. 그리 들었습니다.”

“하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누명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제 아버지의 일로 보은군 대감까지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낭자.”

“아버지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기에 따로…… 다른 대감께 연통을 넣지 않은 것이겠지요.”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역시 보은군의 예상을 빗나가는 소진이었다.

보은군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새 울어 눈이라도 퉁퉁 부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담담해 보였다.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이 보은군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니 애쓰지 마셔요, 대감.”

“…….”

“민 대감님을 만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의 자초지종을 묻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만 해달라고 청을 드릴 생각입니다.”

“그 정도는…… 제가 부탁을 해도 될 것이에요, 낭자.”

자신에게도 그 짐을 좀 나누어주면 좋으련만.

보은군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외조부님께 낭자 대신 청을…….”

“아니요, 대감.”

하지만 소진은 단호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괜한 불똥이 대감께 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불똥이라니요……. 낭자의 가문과 우리 가문은 늘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

“그 정도는 기꺼이 외조부님께서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니, 따로 낭자께서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가만히 보은군을 바라보던 소진은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 봤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명색이 화론 파를 짊어지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 크고 위험한 누명에요.”

“…….”

“제 아버지를 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다른 화론 파 대신들을 위해서라도 민 대감님께서 쉬이 나서주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낭자.”

“게다가 보은군 대감께서 직접 청을 넣었다고 하면…… 다른 대신들도 크게 동요할 것입니다.”

“…….”

“하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그분의 여식인 제가 나서는 것이 옳은 처사일 것이어요.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실 수 있으시지요, 대감?”

그녀의 물음에 보은군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다,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잡았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속히 가시지요.”

두 사람은 민추환의 사가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 * *

“그래, 앉거라.”

예상대로 이른 아침이었지만, 민추환의 사가에는 여러 대신이 모여 있었다.

영의정의 추포 소식에 모두 버선발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아니야.”

소진이 안채로 들자, 모여 있던 대신들이 서로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그녀의 등장을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듯, 소진을 힐끔거리며 안채를 나섰다.

“밖에 누구 있느냐. 따뜻한 차를 내어…….”

“아닙니다. 차는 괜찮습니다, 대감마님.”

소진은 그의 앞에 반듯하게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곤 물끄러미 민추환을 올려다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대감마님.”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하던 소진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대감마님’이라 불렀다.

“그래, 소진아. 말해 보아라.”

“어젯밤, 제 아버지의 소식은 들으셨지요?”

“…….”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대감마님.”

“그래.”

“저희 아버지가 왜 누명을 쓰신 것이지요?”

소진은 거침없었다.

민추환을 직시하는 그 눈빛도 제법 영의정을 닮아,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명…….”

“중전마마의 아기씨를 사살하려 했다는 누명 말입니다. 어젯밤, 이곳에서 저희 아버지가 대신들께 무슨 말씀을 하시었습니까?”

“…….”

“소상히 일러주십시오.”

“네가 직접…… 네 아비를 구하려고 하느냐?”

민추환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물으며 소진의 빛나는 눈동자를 살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그가 생각에 젖어있는 그녀를 향해 다시금 입술을 뗐다.

“소진아. 영의정 대감께서도 원치 않을 것이야.”

“…….”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기다리고 있거라. 지금 대신들과 함께 네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논의 중이니. 아무 염려 말고…….”

소진은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민추환의 말을 끊으며 입술을 벌렸다.

“아무도 구해주시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까요.”

“……뭐?”

“선뜻 구하기 힘드시리라는 걸 잘 아니까, 소인이 온 것입니다.”

그 말에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민추환은 얼얼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소진의 말을 수습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연히 구해야지. 우리를 이끌고 하나로 만든 장본인이 영의정 대감이신데.”

“…….”

“어찌 우리가 대감이 위기에 처한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어.”

“아버지께 연통이 온 것이 있었습니까?”

“아직……. 우리도 기다리고 있단다.”

“아버지께서 아무런 명령도 전하지 않고 그저 당신 발로 궐까지 가시었습니다.”

“…….”

“얼마나 촘촘한 덫에 걸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이 밝도록 대감마님께도 아무런 소식을 전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

“대감마님과 다른 분들이 나서는 걸 원치 않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민추환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새벽 내내 영의정에게서 연통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더 민추환과 화론 파 대신들은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누명을 썼으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서찰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영의정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을 뻗치지 않고 있었다.

민추환은 애써 밝은 얼굴을 해 보이며 말했다.

“화론 파에 누가 끼치지 않길 바라시는 대감의 뜻일 수도 있겠지만.”

“…….”

“소진아, 걱정하지 말거라. 우린 대감을 꼭 지킬 것이야.”

소진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다,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대감마님.”

“하지만 어젯밤의 일은 너도 알고 있어야겠지……?”

“…….”

“어제 별다른 이야기는 없으셨다. 중전마마의 산고로 그저 대신들이 모여 산실청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셨습니까.”

“한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만…….”

민추환이 아랫입술을 질끈 씹으며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덩달아 소진의 가슴도 쿵, 쿵,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중전마마를…… 화론 파에서 배제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었다. 그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중전마마를요? 무슨…… 말씀을 덧붙이시면서요?”

왜 중전을 손에서 놓으려고 했는지.

생각해보면 재간택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신뢰를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지금까지 끌고 와 출산을 앞둬 예민해져 있는 대신들 앞에서 말을 했다는 건, 조금 의아했다.

중전이 아들이라도 출산한다면, 화론 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군 마마를 얻는 것이 될 텐데.

그런 경솔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소진의 의구심을 건드렸다.

가만히 어젯밤의 일을 헤집던 민추환이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화론 파의 독이 될 것이라 하시며……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지.”

이유라는 말에 긴 소맷자락 속에 감쳐졌던 그녀의 하얀 주먹이 동그랗게 말렷다.

“독이요…….”

민추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소진을 응시했다.

“걱정할 것 없어. 대감께서 연통을 주지 않으셔도 지금 막, 궐로 입궐하려던 참이었으니.”

“대감마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이라.”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눈빛은 견고했다.

민추환은 선뜻 대답을 내뱉지 못한 채, 굳어가는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제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보은군 대감.”

소진은 차분하게 그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누가 볼까 봐 그럽니다. 이 와중에 대감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 없으니까요.”

그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에도 보은군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그럼 한발 뒤로 물러나, 뒤를 따르겠습니다.”

“대감…….”

“무사히 들어가는 것은 내 두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그럽니다.”

그러면서 보은군은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로 걸음을 멈추었다.

뒷짐을 진 채, 먼저 가라는 듯이 그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휴, 참.”

그런 그를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던 소진은 다시 그를 향해 마주 보고 섰다.

“하면 속히 갑시다. 아무도 못 보게.”

“그럽시다.”

“뒤에 호위무사도 따르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되신다고…….”

“잘 들어가면 잘 들어갔다.”

“……?”

“잘 못 들어가면 잘 못 들어갔다, 소식을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엷은 웃음을 띤 그는 소진의 눈길에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대감.”

“예?”

소진의 부름에도 그는 정면만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

“항상.”

항상이라는 두 글자가, 귀에 닿고서야 보은군이 지그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해드린 것 없는 제게…… 이리 과분한 마음을 주셔서.”

소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자신과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말에 보은군은 실없는 미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해준 것이 왜 없습니까.”

“…….”

“태어나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준 이는…… 낭자인 것을요.”

같은 마음이지 못해, 그리고 그 마음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소진은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뱉지 못한 채 꾹, 꾹 삼키고 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천천히 도리질하며 포근한 미소를 그렸다.

“대감…….”

“갑시다. 영의정 대감, 뵈러 가야지요.”

“…….”

“외조부님께서 입궐하였다가 상황을 봐서 낭자께 연통을 넣어준다고 하였으니. 기다려봅시다.”

“예, 대감.”

그렇게 둘은 소진의 집에 다다랐는데.

웬 처음 보는 무사 한 명이 대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멈추었다.

“누구지……?”

그때, 소진을 발견한 그 무사가 서둘러 그녀의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가 황급히 그 사람을 제지했다.

“뉘십니까.”

소진 역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호위무사 뒤에 숨었다.

보은군도 그녀를 보호하며 무사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러자 당황한 듯, 소진을 바라보던 무사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입술을 열었다.

“궐에서 왔습니다.”

궐이라는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소인은 세자 저하의 사람입니다. 지금 바로 한 규수를 모시고 오라는……. 옥에 갇혀 계신 영의정 대감의 일로 보내시었습니다.”

그 말에 호위무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진을 돌아보았다.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보은군의 낯빛이 딱딱해졌다.

‘형님께서……?’

무사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보은군이 소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위험합니다, 낭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제 외조부께서 소식을 가져다주실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심이…….”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진도 얼른 헌을 만나 일의 자초지종과 지하실의 여인들도 무사한지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무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늘 헌의 곁을 지키던 윤현이 아니었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쳤지만, 소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보은군 대감, 혹시 궐에서 소식이 오거든 제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낭자.”

“저하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호위무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호위를 부탁하오.”

그러자 호위무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소진의 뒤에 섰다.

헌이 보냈다는 무사는 속히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는데.

소진이 그 무사의 팔을 툭, 잡아채며 입술을 달싹였다.

“한데 말입니다.”

“……?”

“저하께서 어디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시었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