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세자 저하가 보낸 무사.
2021.09.06.
날이 밝도록 소진은 잠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물론 최 씨 부인도 오지 않는 영의정이 걱정되어 내내 마당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때, 궐에 소식을 들으러 갔던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님! 안방마님!”
최 씨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대문으로 달려갔고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소진 역시,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마님께서…… 지금 추국청에서 꼼짝도 못 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옥에…… 갇히셨단 말이냐?”
최 씨 부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덩달아 소진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굳고 말았다.
“대체 연유가 무엇이라고 하더냐.”
“그것이…… 그 대감마님께서 중전마마의 왕자 아기씨를 사살하려고…….”
그 말에 소진과 최 씨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그것이 말이 되느냐?!”
“어머니! 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하인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소진이 최 씨 부인의 팔을 잡으며 이건 아니라는 듯이 도리질했다.
“어머니……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함정에 빠지신 것 같아요.”
“그러게. 왕자 아기씨 사살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소리를……!”
“어떡하죠? 제가 아버지라도 만나봐야 하는데.”
어쩔 줄 몰라하며 대문 밖만 연신 기웃거리는 소진에게 하인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소인도 어떻게 해서든 대감마님 얼굴 한 번 뵙겠다고 문지기들을 구워삶아 봐도 절대, 절대 안 된다고 하네요.”
최 씨 부인이 털썩, 흙바닥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황급히 하인들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고 소진은 입술을 꽉 악문 채 파르르 떨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어찌…….”
소진은 궐에 가서 소식을 듣고 온 하인의 팔을 붙잡았다.
“소상히 말해보게. 아버지께서 어떻게 중전마마의 아기씨를 사살하려 했단 누명을 쓰게 된 것인가.”
“그것이…… 소인도 잘…….”
“증좌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아무 증거도 없이 아버지를 옥에 가둬둘 만큼 무자비한 궐이 아닐 것이야.”
“……아!”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하인이 눈을 반짝이며 소진을 바라봤다.
“그…… 무슨 무사들이.”
“무사들?”
“궐문 앞에서 생포가 되었다고 문지기가 말해줬습니다.”
그 말에 소진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권문 앞에서 무사들……!”
어젯밤, 헌과 궐을 나서다 본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분명 그 무사들은 분명히 중궁전 사람들이었다.
중궁전에서 밀실의 여인들을 빼돌리기 위해 미리 배치해 놓은 세력이었는데, 그것을 감히 자신의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우다니.
“괘씸한 놈들.”
소진이 파르르 떨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머니, 저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가려고! 그러다 너까지 위험해진다, 안 돼!”
“일의 자초지종을 들으려면 민추환 대감님을 뵙고 와야 할 것 같아서요.”
“민 대감을……?”
“예. 아버지께서 분명 어젯밤 늦게까지 민 대감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셨어요.”
“그래, 그랬었다.”
“하면 뭐 수상한 낌새는 없었는지…….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앞뒤 상황은 제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소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최 씨 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 때 보다 소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소진아.”
“민 대감님께 청을 드려볼게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중전마마의 왕자 아기씨를 사살하려 했다는 누명이다.”
“…….”
“그 정도면 누명이라면 반역과도 같은 무게를 두고 네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야.”
최 씨 부인의 얼굴에 근심이 뚝뚝 묻어났다.
좋지 않은 예감이 자꾸만 그녀를 덮쳐왔고 행여 그 먹구름이 하나뿐인 자식 소진이까지 덮칠까, 노심초사했다.
“그럼 민 대감께서도 분명 연루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실 것인데.”
“……어머니.”
“행여 네가 문전박대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녀가 상처라도 입고 돌아올까,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소진은 최 씨 부인의 염려와 달리 밝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소진아.”
“큰 기대는 없어요. 원래 한마음 한뜻이다가도 조금의 해를 입을 것 같으면 금세 파를 나누고 돌아서는 것이 정당(政黨)이 아니겠습니까?”
제법 어른스러운 대답으로 소진은 최 씨 부인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래도 오랫동안 아버지와 뜻을 함께해온 대감이시니 문전박대까지는 하지 않으실 거여요.”
“혼자 괜찮겠니?”
“예. 숙자와 호위무사와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서둘러 다녀와야 한다. 아버지께서 그런 큰 누명을 쓰고 갇혀 계시니 불똥이 우리에게까지 튀는 것은 시간문제야.”
“명심하겠습니다.”
소진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며 숙자의 손을 잡았다.
숙자 역시, 영의정의 걱정에 한숨도 자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가씨는 쇤네가 잘 모시고 오겠습니다. 하니, 마님……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셔요.”
“그래, 알겠다.”
소진과 숙자가 대문을 나서자 호위무사가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애써 어머니 앞에서는 담담한 척 씩씩하게 대답하며 나섰지만, 막상 민 대감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 문전박대를 당할 수도 있었다.
소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숙자야…… 우리 아버지 괜찮겠지?”
“암요. 누구십니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한양 최고의 실세, 영의정 대감마님이 아닙니까?!”
숙자가 소진을 위로하며 그 손을 꼬옥 잡아 흔들었다.
오히려 더 숙자가 언성을 높이며 밝게 이야기하자 아버지의 걱정에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녹는 것 같았다.
“그래. 서둘러 민 대감을 만나러 가보자꾸나.”
그렇게 소진이 애써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보은군이 이쪽으로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었다.
“어?! 보은군 대감……!”
그날의 고백 이후, 처음 마주하는 보은군이었다.
보은군이 영의정의 사가를 향해 달음박질을 치다, 소진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소진 낭자!”
그날 이후로 보은군은 소진을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했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소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영의정의 압송 소식은 한양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보은군은 소진에게 달려가고 있던 길이었다.
행여, 그녀가 울고 있지는 않을까.
영의정을 만나지 못해, 안절부절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를 도울 일이 있다면 백방(百方)으로 돕기 위해 민추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곳으로 오고 있던 것이었다.
“대감……!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못 본 사이,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에 보은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낭자를 뵈러.”
채 말을 잇지 못하며 보은군이 소진의 야윈 팔을 꼭 그러쥐었다.
“저를요……?”
의외라는 듯이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보은군을 직시했다.
“낭자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소진의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 * *
“그래. 영의정은.”
중전이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밀실의 여인들을 내보내지 못했다는 것과 소진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게 너무도 찝찝해 중전은 한숨도 잠을 못 이뤘다.
“아직 옥에 있습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방어 태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합니다.”
“……자포자기할 인물이 아닌데.”
“참, 그리고 한 규수에게 보낼 무사를 따로 준비했습니다.”
중전이 미간을 구기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무리 아들을 낳아 속이 통쾌하다고는 해도 출산 후의 몸이라 평소보다 많이 미령해져 있었다.
“중전마마…… 안색이 안 좋습니다. 속히 누우시지요.”
“무사는 잘 채비시켜 보낼 것이지?”
“예, 마마. 마음 놓으십시오. 저하께서 부르신다며 한 규수를 끌어들여 어디까지 알고 있나, 낱낱이 캐물을 것입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년을 살려두는 것은 무리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중전이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누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마마의 뜻대로 휘저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중전을 눈을 감았다.
밤새 못 잔 잠을 이제라도 청하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는데, 별안간 중궁전 밖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대비마마 납시셨나이다……!”
대비라는 말에 중전이 짜증스럽게 눈을 홱, 치켜떴다.
“저 늙은 년은 또 왜.”
“……아무래도 왕자 아가씨 출산을 감축한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이 미령하니, 나중에 다시 들라 전하거라.”
중전은 새침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상궁은 그 이야기를 대비에게 전하러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중궁전의 문이 덜컥, 열렸다.
“……!”
놀란 상궁과 중전이 문 쪽을 세차게 바라보니, 대비가 문을 직접 열고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대비마마…… 지금 이게 뭣 하는!”
“늙은이라 다리가 아파 지금 중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또 언제 예까지 걸음을 옮길지를 몰라서.”
“체통을 좀 지키시지요?!”
중전이 앙칼지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대비 역시 그 앞에 치마를 나풀거리며 앉더니 비웃음을 터뜨렸다.
“풉. 체통이요?”
“……?!”
“중전께서 언제 그런 걸 따지셨다고? 어제도 채신머리없이 소복 바람으로 동궁으로 쪼르르 달려가 영의정을 엄벌에 처하라, 징징거리셨다면서요?”
“대비마마!”
“한데 무슨 체통이야. 체통은, 쯧쯧.”
대비는 혀를 끌끌 차며 중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중전 역시,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젠 이유 있는 당당함이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으니, 허리를 세울 만도 했다.
그 모습에 대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아들 유세를 부릴 모양입니다?”
“시비 걸러 오시었습니까?”
“시비라니요. 말본새는…….”
그러자 중전이 대비를 노골적으로 세차게 노려보며 거칠게 입술을 뗐다.
“한데 왜 골이 나셨습니까? 신첩이 왕자를 낳아 불만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순산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중전.”
“눈엣가시던 영의정까지 옥에 갇혀 있겠다, 뭐가 불만이기에 이토록 배배 꼬이셨을까.”
중전의 중얼거림에 대비가 여유 있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눈엣가시……? 내겐 그다지 영의정 대감이 눈엣가시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부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마마.”
“뭐요?”
“신첩 아니었으면 영의정이 갇힐 일도 없었을 텐데.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세요, 마마.”
“영의정이 옥에 갇혔다고 내가 왜 중전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건지. 세자와 반응이 똑같습니다.”
“뭐요…… 세자?”
“어제 세자를 찾아갔을 때도 딱, 그렇게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채 내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하던데.”
중전의 말에 대비가 눈을 세차게 치켜뜨며 조소를 터뜨렸다.
“죽으라면 죽었지.”
“……!”
“누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그게 무슨.”
“중전의 도움을 받겠다고 했다면 난 아마 세자에게 크게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대비마마…….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자 대비가 휙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중전을 내려다봤다.
“아들을 낳아 감축은 드리나 잘 지켜내는 것 또한 어미의 도리일 것이오, 중전께서 앞으로 평생 고민하고 해나가야 할 일일 겁니다.”
“악담을 퍼부으시는 겁니까, 지금?!”
“악담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
“아, 한데 감히 영의정을 건드렸으니.”
“……?!”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가 되겠군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대비가 다시 중궁전의 문을 거칠게 열고 나섰다.
중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고 있었다.
* * *
밤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건 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소진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어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윤현! 윤현……!”
그는 정무를 모두 끝내자마자 윤현부터 찾았다.
헌의 부름에 윤현이 곧장 동궁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시었나이까, 저하.”
“소진이를 만나러 나가야겠구나.”
“제가 직접 모시겠나이다, 저하.”
“아니. 너는 강 씨 부인을 감시하러 가야지.”
“하면…….”
“네가 믿을만한 무사에게 곧장 영의정의 사가로 가서 한 규수를 데리고 정자나무 언덕으로 올 수 있도록 명을 내리거라.”
그렇게 말하며 헌이 곤룡포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나는 너를…… 버린 것이 아니다. 부디 오해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지도 말아야 한다, 소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