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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내 여식을 건드리는 것은 못 참는다. (97/125)

97. 내 여식을 건드리는 것은 못 참는다.

2021.09.03.

헌과 마주 선 영의정의 눈빛은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자신이 이 시각에, 이곳까지 불려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는 평온한 얼굴로 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훤히 비추는 추국청 안.

헌은 돌계단 위에 서서 영의정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입을 열었다.

“대감.”

“예, 저하.”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묻겠습니다.”

그러자 영의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문하시지요.”

헌이 손가락을 들어 포박된 무사들을 가리켜 보였다.

“저 무사들.”

“…….”

“대감의 무사들입니까?”

명료하고도 단호한 헌의 어투에 영의정의 고개도 그쪽으로 향했다.

시커먼 옷을 입은 무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의정의 표정은 무감각하기만 했다.

가만히 무사들을 한 명 한 명 뜯어보던 영의정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하.”

“…….”

아니라는 것을 헌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헌의 시선이 다시 한 점 동요도 없는 영의정에게 닿았다.

“저들은 배후로 영의정 대감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군요.”

덤덤한 그의 대답에 추국청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의정은 건조한 눈동자로 헌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나를 지목한 이상, 오늘 밤은 내가 여기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겠군요.”

헌은 아무 말 없이 영의정과 중궁전 쪽 무사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추국청 안으로 중전의 부친인 부원군이 저벅저벅 들어섰다.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요!”

그렇게 소리치며 들어서는 부원군은 기세가 등등한 모습이었다.

영의정의 고개가 찬찬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원군이 영의정을 세차게 노려보며 헌과 영의정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감히 조선의 국모가 원자를 생산하는 동안……! 무장한 살수들을 궐에 보냈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추국청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부원군의 목소리에 영의정이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조소에 부원군이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대감?”

“감축드리오, 중전마마께서 왕자 아기씨를 출산하셨다지요. 아주 경사스러운 밤입니다.”

살벌한 부원군의 태도에도 영의정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헌의 한쪽 눈썹이 흥미롭게 솟구쳤다.

“감축……? 참 태평하십니다? 그 왕자 아기씨를 위협하려 살수들까지 궐에 보낸 주제에.”

“…….”

“감히 감축이요?”

노발대발하던 부원군은 꼭, 중전이 헌에게 애원하던 것처럼 헌을 올려다보며 목구멍에 힘을 주고 있었다.

“저하. 반드시 이 일의 책임을 영의정에게 물어.”

“…….”

“타당한 죗값을, 아니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부원군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곤 짙은 실소가 가득 차오른 입술을 벌려 대꾸했다.

“어찌 부녀가 이리 똑같은지.”

비아냥거리는 헌의 말투에 영의정이 힐끔, 그를 바라봤다.

“중전마마께서도 버선발로 동궁으로 뛰어와 영의정 대감을 엄하게 벌해 달라, 그리 청하던데.”

“……?”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부녀가 이리 나서서 청을 해오니 난감할 따름입니다.”

“난감할 이유가 무엇 있습니까! 조선의 법도대로 엄벌에 처해야지요!”

언성을 높이던 부원군은 포박된 무사 중 하나의 멱살을 질질 끌어 헌의 앞으로 데려왔다.

그러곤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해, 고개를 치켜세웠다.

“말해보아라, 네 배후를.”

“……영, 영의정 대감께서 시키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라고 했지?”

“그, 그것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던 무사가 힐끗 영의정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

“아기씨를…… 죽, 죽이라고……!”

무사의 대답에 추국청 안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숙덕대기 시작했다.

또한, 그 대답을 들은 헌의 동공 역시 커다래지고 말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모든 사람이 술렁이며 무사의 대답에 동요하고 있었지만, 오직 단 한 사람 영의정만큼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덤덤하게 땅바닥만 바라본 채, 조금도 입술을 달싹이지 않았다.

“뭐라.”

“…….”

“방금 그 말이 사실인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헌은 엄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무사가 벌벌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예, 사실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이 무사의 대답에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냐는 듯, 부원군이 영의정을 세차게 훑어보며 우악스럽게 입을 벌렸다.

“이것이면.”

“…….”

“이 살수의 대답이면 저하께서 더 난감해하실 연유가 없겠지요?”

부원군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헌이 지그시 영의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영의정 대감, 그대의 반론은.”

건조한 헌의 목소리에 부원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참에 눈엣가시던 영의정을 해치워 버리자고. 세자가 이 적절한 기회를 설마 멍청하게 날려버리진 않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부원군이 느긋하게 영의정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제가 할 반론이 무엇인지.”

“…….”

“저하께선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어라.”

절벽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영의정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눈동자를 검게 번뜩이며 대답했다.

“저깟 살수들의 대답 따위에 좌지우지될 저하가 아니라는 걸, 소신은 잘 아옵니다.”

“……!”

“하오나 아무런 증좌도 없이 저들의 말 한마디에 나를 옥에 가두시겠다면.”

“…….”

“그리 하시지요.”

자포자기한 것인지, 부원군은 영의정을 예민하게 바라보았고 헌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영의정을 꼿꼿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세력이 명확하고 그들의 뜻도 확고한데.”

“…….”

“이제 제 목숨은 저하의 손에 달린 것이겠지요.”

“영의정 대감.”

“저하 역시 저들과 함께하겠다, 마음먹은 것이라면 제가 아무리 반론을 하고 변명을 하고 나는 이들과 무관한 관계라 소리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의정의 말에 부원군의 낯이 후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괜스레 헛기침하며 부원군은 영의정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대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다?”

헌은 영의정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부원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들이 영의정 대감과 한통속이었다는, 그리고 정말 산실청으로 쳐들어가 전하의 자식을 사살하려 했다는 더 강한 증좌가 필요합니다.”

“…….”

“저 간사한 살수들의 말만으로는 결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부원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헌이 그렇게 말할 때쯤이었다.

“증좌라면…… 내가 더 증언하면 되겠습니까, 세자 저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됐다.

“……우참찬?!”

추국청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우참찬 조 씨였다.

조금 전까지 산실청에서 들려올 소식을 함께 기다리던 그.

화론 파 세력이자 영의정과는 오랫동안 정사(政事)를 함께 논하던 인물이었다.

우참찬 조 씨의 얼굴을 확인한 영의정은 그제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중전의 세력에 붙으려던 것이 너였구나, 우참찬……!’

갑작스럽게 부원군의 편에 붙은 우참찬이 아무래도 김 도령을 포함한 중궁전의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제 관직을 걸고.”

“……!”

“또한, 제 가문을 걸고 증언하지요.”

우참찬 조 씨는 비릿한 조소를 입술에 매단 채, 영의정을 지그시 돌아보았다.

“오늘 밤, 영의정 대감은 화론 파 대신들을 민추환 대감의 사가에 모아 이렇게 전했습니다.”

“……!”

“중전마마께서는 화론 파의 독이 될 것이며 이 시각 이후로는 중전마마와 그 세력들을 화론 파에서 배제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참찬이 헌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보이자 헌의 입술이 힘껏 일그러졌다.

순간, 헌의 눈빛이 영의정에게 맹렬히 닿았다.

‘대감께서…… 지독한 덫에 걸리셨군요.’

영의정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바짝 움켜쥐었다.

우참찬까지 나서 증언한 마당에, 이대로 영의정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 역시 말에 불과하니 영의정이 정말 중전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할 증좌로 채택되긴 어려웠다.

그러나 영의정이 무고하다는 증좌가 나오기 전까지 영의정을 함부로 사가로 보낼 순 없는 일이었다.

‘소진이가…… 많이 걱정을 하고 있겠지.’

소진의 걱정에 헌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헌은 참담한 마음으로 망망대해에 외로운 돛단배처럼 서 있는 영의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영의정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우참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한 증좌가 필요는 하겠지만.”

“…….”

“오늘은 사가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 말에 영의정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우참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곤 오직 헌만이 들을 수 있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제 여식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꼭 전해줄 말이 있습니다.”

“……!”

“이제 소신은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제 여식을 은밀히 불러주십시오.”

“대감.”

“제가 함정에 걸린 이상, 소진이도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나를 건드리는 것도 또한, 내 가문을 욕보이는 것도 모두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적시 적격에 터뜨리기 위해 꽁꽁 감추고 있던 중궁전 비밀을 소진에게 모두 알려줄 참이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영의정은 파르르 떨었다.

헌이 놀란 얼굴로 그를 직시했고,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칠었다.

“내 여식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못 참습니다.”

그리고 영의정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근위대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헌이 서로 낄낄대며 좋아하는 부원군과 우참찬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 역시. 내 여인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못 참지.’

곧 헌은 윤현에게 다가가 은밀히 소진을 궐로 불러들일 방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 * *

“뭐?! 영의정의 여식이……?!”

추국청에서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중전이 반색하며 기뻐하기도 잠시.

상궁이 전한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영의정의 여식이…… 강 씨 부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예……. 알고 있는 것까지는 모르겠사옵니다만, 강 부인의 노리개를 갖고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수소문하는 것을 김 도령께서 보셨다 하옵니다.”

그 말에 중전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역시……. 그년을 볼 때마다 내 기분이 께름칙하다고 했어. 내 발목을 잡을 년이었구나.”

“하오나 어차피 영의정 대감이 옥에 가둬져 있는 이상, 그년도 별다른 힘을 못 쓰지 않겠습니까?”

“……지하실의 비밀까지 모두 알고 있다면?”

“설마요.”

“아니야.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 강 씨 부인을 납치한 것도 영의정, 그간 마을에 사라진 여인들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닌 것 또한 영의정이라니.”

“…….”

“거기에 그 여식까지 나서서 내 목을 옥죄고 있었다면. 필시 지하실의 비밀까지 알고 있을 수도 있어……!”

반듯하게 누워 있던 중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조금 전, 동궁에 가 영의정을 함께 치자던 자신의 거래를 참으로 냉혹하게 쳐냈던 헌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자와 그년이 꽤 친밀한 사이라지?”

“아무래도 간택전에서 보였던 행동이나…… 저하까지 나서서 세자빈으로 한 규수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

“무언가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상궁의 은밀한 목소리에 중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간택 때도…… 어찌 알고 그리 딱, 그년을 구했다지.”

“예, 마마.”

“영의정은 쉽게 몰락할 사람이 아니야.”

이부 자락을 꽉 움켜쥐며 중전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곧 풀려나 언제든 내게 반격을 해올 위인이지. 그러니 그 전에 영의정을 해치워 버리려면.”

“……?”

“한 규수. 그년을 없애버려야겠다.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이상, 살려두긴 힘들지.”

“……예?!”

놀란 상궁이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중전이 이어 말했다.

“영의정의 손발이 묶여있는 틈을 타, 세자를 이용해서.”

“……!”

“한 규수, 그년부터 없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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