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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동궁입니다. (96/125)

96. 동궁입니다.

2021.08.30.

깊은 새벽이라 그런지 저잣거리는 조용했다.

영의정을 태운 보교만이 달빛을 받으며 고요한 저잣거리를 가르고 있었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영의정의 표정은 심란함으로 엉망이 되었다.

“아들을…… 기어이 아들을 낳았다고.”

대신들의 앞에서는 중전이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상관없이 중전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이제 화론 파는 더, 중전과 부원군을 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지만 못내 중전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흐음.”

영의정은 헛기침을 뱉어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잠자코 눈을 감은 채,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영의정의 귓가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누구요!”

순간, 영의정의 눈이 떠졌다.

“무슨 소란이야.”

그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대감마님, 사가인 듯합니다?!”

보교꾼의 말에 영의정의 눈이 커졌다.

“뭐……? 우리 집?”

서둘러 자신의 집 쪽으로 돌아보니 웬 무사들이 대문 앞에 잔뜩 몰려 있었다.

“저것들이 다 뭐야……! 가마를 내리거라!”

영의정은 황급히 가마에서 내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마당까지 무장한 무사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뭣들 하는 짓이야!”

영의정의 고함에 그의 사가에 들어차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최 씨 부인과 소진이 영의정을 발견하고는 영의정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대감……!”

그러자 영의정이 소진을 끌어안아 자신의 등 뒤로 감추며 형형한 눈빛으로 무사들을 바라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들 몰려와서 행패인 것이야!”

짐승의 포효 같은 영의정의 고함에 무사들이 쭈뼛쭈뼛 물러났다.

최 씨 부인이 파리한 안색으로 영의정의 팔을 잡았다.

“대감…… 궐에서 온 사람들이라 합니다.”

궐이라는 말에 그의 눈빛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궐에서 이 시각에 어인 일로. 게다가 나까지 없는 집안을 무뢰배들처럼 쳐들어 와?!”

그러자 그의 노발대발에 대장이 저벅저벅 걸어와 영의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보였다.

아무리 궐에서 죄인으로 치부하고 압송하라 일렀지만, 함부로 그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영의정 대감.”

“무슨 일인가.”

“궐에서 속히 대감을 압송하라는…….”

압송이라는 표현에 영의정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누굴 압송해!”

“……대감.”

무사들을 한 명, 한 명 뜯어보는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그들의 목덜미를 뜯을 기세로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등 뒤에 감춘 소진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일렀다.

“너는 속히 별채로 가거라.”

“아버지…….”

태어나 자신의 집에 이렇게 무장한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제 아버지를 압송하러 왔다는 그들의 말은 소진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태산 같던 자신의 아버지가 흔들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소진은 울먹이며 영의정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괜찮다. 난 괜찮아.”

그러자 정말 괜찮다는 얼굴로 그가 소진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부인, 얼른 소진이 데리고 별채로 가 있으세요.”

“대감.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영의정은 최 씨 부인의 팔을 꼭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추며 무사들이 들리지 않게 읊조렸다.

“중전마마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소진은 눈빛을 떨며 영의정을 직시했다.

‘중전마마께서 아들을 출산하신 것과 아버지의 압송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일까?’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영의정을 올려다보았는데, 그가 다시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그 때문에 나를 경계하려, 압박을 넣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영의정이 다시 소진을 바라봤다.

“아무 걱정 말고 어머니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아버지.”

“궐에 다녀올 테니, 문단속 잘하고. 알았지?”

그리고 한쪽에 서 있는 자신의 무사들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이 소진과 최 씨 부인을 감싸며 별채로 안내했다.

영의정과 멀어지는 소진의 눈동자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

그때, 영의정이 궐에서 나온 무사들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어느 전에서 떨어진 명령인 것인가.”

그의 물음에 소진의 걸음도 멈추었다.

그녀의 두 귀가 쫑긋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중궁전이겠거니, 생각하며 소진이 이를 악물었는데.

“동궁……입니다, 대감.”

동궁이라는, 상상치도 못한 의외의 대답에 소진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

덩달아 영의정의 낯빛도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히, 중궁전에서 내린 명령일 줄 알았다.

소진은 별채로 향하다 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최 씨 부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최 씨 부인은 평온한 얼굴로 소진의 손을 꽉 잡았다.

“어머니…… 세자 저하께서 왜…… 아버지를.”

동궁과 척을 지고 있는 아버지기에,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자신이 기꺼이 세자의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까.

헌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가기로 했으니 당장은 제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까지 함께 있던 그가 궐로 돌아가자마자 영의정 압송 명을 내렸다니, 믿기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소진이 최 씨 부인을 바라보자, 최 씨 부인이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믿어야 한다, 소진아.”

“어머니.”

“의심하면 아니 돼. 언젠간 아버지와 저하께서 대립하리라는 걸, 너 역시 예상하지 않았느냐.”

그 말에 혼란스럽게 탁해지던 소진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최 씨 부인을 향해 꽂혔다.

“그 길을 가려 한 것도 네 선택.”

“…….”

“하니, 이 시련 역시 너의 몫이다.”

“예…… 어머니. 저하를 믿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별채로 향하는 소진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하…… 저하를 믿겠습니다. 소인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에요.’

* * *

“어떻습니까? 나의 제안이?”

중전은 헌의 대답을 이미 들은 것처럼, 오만한 얼굴로 헌의 앞에 바짝 다가가 섰다.

그러자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헌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영의정을 버리고 중전마마의 손을 잡아라?”

“그렇지요. 내가 기꺼이 화론 파의 배반자가 되어 세자의 뒤에 서 줄 터이니.”

“…….”

“세자께선 마음 놓고 화론 파를 파멸시켜 주춤하던 수론 파의 세력에 불을 지피세요.”

묵묵히 중전만 바라보던 헌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윤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의정 대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의금부 무사들이 추포 하러 갔으니 곧 궐로 올 것입니다.”

그러자 헌이 휙, 중전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하면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면 될 일.”

“……?”

“내가 왜 영의정을 버리고 중전마마의 손을 잡아야 합니까? 이것이 왜 그쪽으로 이야기가 튀는 것이지요?”

그 말에 중전이 당혹스러움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뭐…… 뭐라고요?”

무표정하다 못해 무료해 보이기까지 하는 헌의 얼굴이었다.

“배후가 없는 것도 아니고, 배후를 발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호들갑입니까?”

“세자.”

“막 출산을 하여 과민한 건 이해하겠지만, 이건 아니지요. 중전마마. 체통을 지키셔야지.”

냉랭한 그의 대답에 중전의 뺨이 화르르 빨개졌다.

“그깟 일로 몸도 다 추스르지 못했으면서 여기까지 쪼르르 오셨습니까? 정 불안하면 아랫것들을 시켜 호위를 더 강화하라 하면 될 것을.”

“…….”

“이러다 몸이라도 성하게 되면 또 누굴 탓하시려고요?”

“내가 누굴 탓한다고!”

“탓하기 딱 좋은 먹잇감 아닙니까?”

“말을 왜 그렇게……!”

“물러가시지요. 호위대에서 못 잡은 것도 아니고 생포까지 해서 추국청에 데려다 놓았다고 하니.”

싸늘하게 대꾸하며 헌이 돌아섰다.

“지금 내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까?”

중전이 헌을 세차게 노려보며 앙칼지게 물었다.

그러자 헌이 피식, 입매를 비틀었다.

“거절하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뭐요?”

“저는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을 생각입니다.”

“……!”

“영의정 대감의 손을 쳐낼 생각도 또한, 중전마마의 손을 잡을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나 홀로 내 갈 길을 갈 것이니 중전마마께서도 제 살길 알아서 찾아 가십시오.”

그러면서 피곤하다는 듯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저벅저벅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중전이 쪼르르 달려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이 좋은 기회를…… 어찌 이리 허망하게 놓치려 합니까, 세자?!”

“좋은 기회요?”

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돌아선 채로 고개만 비스듬히 꺾어 중전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 함께 하자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지금 중전마마께서는 위기일 수도 있었던 이 상황을, 좋은 기회라 말씀하십니까?”

“……?!”

“하마터면 내 아우가 죽을 뻔할 수도 있었는데?”

묘하게 변해가는 중전의 얼굴에 헌이 능청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들을 노렸다며, 노발대발해 눈물을 흘릴 땐 언제고. 이제 와 그 끔찍할 수도 있던 일을 기회라 이야기하며 그것을 이용하려 하십니까?”

“……그건.”

“일의 전말을 따져 물어 다시는 이리 궐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써야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중전마마께 무척 실망했습니다.”

조금도 굽히지 않는 헌의 태도에 중전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여유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 지금 몸이 좀 피곤해서 그러는데 물러가 주시겠습니까?”

“……!”

“중전마마께서도 막 출산한 뒤, 이리 돌아다니시면 옥체(玉體) 상하십니다.”

“…….”

“게다가 이제 내일부터는 홀로 그 왕자와 부원군 대감과 그리고 중전마마의 외가(外家)까지 지켜내셔야 할 텐데.”

“……세자!”

“건강하셔야지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헌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오만하고도 방자한 태도였다.

“여봐라!”

“예, 저하……!”

“중전마마 나가신다는구나. 중궁전까지 안전히 모셔다 드리거라.”

“예!”

그리고 활짝 열린 동궁 문.

부들부들 떨며 중전이 그 자리에 서서 헌을 노려보고 있자, 헌이 피식 웃었다.

“방금 잡아들인 영의정 쪽 무사들, 티끌 하나 남김없이 소상히 문초해.”

“…….”

“영의정 대감이 왜,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궐문 앞에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정말 영의정 대감의 무사들이 맞는 것인지까지.”

“……!”

“모조리 다, 알아내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중궁전으로 가시지요. 우리 아우는 내 날이 밝는 대로 만나러 가지요.”

꼭 그 말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아 뒤돌아서던 중전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의 무사들이 맞는 것인지까지……? 저딴 말을 하는 연유가 뭐야.’

중전은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상궁들의 부축을 받아 동궁을 나섰다.

그리고 헌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영의정 대감을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입니다.”

지금 궐로 오고 있다는 영의정이 과연, 중궁전 쪽에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미, 중궁전이 께름칙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영의정이 어떻게 반격을 할지 매우 궁금했다.

닫히는 동궁 문을 바라보며 헌이 중얼거렸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둘 중 하나는 몰락하겠구나.”

그러다가도 헌은 고개를 치켜들어 환한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굴 버려.”

그 말에 윤현의 시선도 천천히 그에게 닿았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소진이의 손은 놓지 않을 것이야.”

맹렬한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의 귓가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지금 영의정 대감께서 추국청에 납시셨다 하옵니다.”

그 말에 헌은 잠행 복을 벗고 곤룡포로 갈아입은 후 익선관을 반듯하게 썼다.

“가자. 영의정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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