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한 규수를 버리세요.
2021.08.27.
헌과 소진이 궐문에 당도하니, 헌의 무사와 중전의 무사가 거센 신경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신분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즉살해도 좋다는 세자 저하의 명이 있었다!”
선봉에 선 윤현이 자비 없이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고, 그러자 예상치 못한 변수에 중궁전 세력들이 주춤하고 말았다.
“우, 우리는……!”
“감히, 중전마마의 출산을 틈타서 반역의 움직임을 보여?!”
“반역……!”
윤현의 입에서 반역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궐 문 앞에 포진해 있던 무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진의 가슴도 괜히 두근거렸다.
“저하……. 괜찮을까요?”
그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헌의 옷자락을 슬며시 쥐었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보다 만만찮은 변수를 만났으니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나…… 여인들을 반드시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저들이니, 싸움을 해서라도 궐문을 나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야.”
“……결코요?”
단호하게 말하는 헌을, 소진이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중전의 사람들이다.”
“……아.”
“중전이 왕자를 출산한 경사스러운 날, 피를 보려 하겠느냐?”
“예에……. 몸을 사리겠군요.”
“계획에 차질이 생겨 지금 무척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헌의 말에 소진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를 바라봤다.
“한데 왜 저하의 무사들은 복면을 쓰지 않고 있습니까?”
“…….”
“얼굴도 다 드러내고, 또 저하의 명까지 받았다고 하면 중궁전 쪽에서 저하의 세력이 자신의 일을 방해했다는 걸 알게 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위험해지는 건 오히려 저쪽이다.”
“……아?”
“우리가 뭐 꿀릴 것이 있다고 얼굴을 가리겠느냐? 우리는 그저, 중궁전의 무사 출산을 위해 경비를 더욱 강화했다고 하면 될 일.”
“……!”
“이제 문제는 저들이지. 누가 어디서 보낸 이들인지, 왜 시커멓게 무장을 하고서 궐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는지. 입을 열지 않으면 반역으로 치부해 모두 생포당할 것이야.”
그제야 소진은 이것 역시 헌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때쯤이었다.
헌과 헌의 무사들만 아는 이곳으로 무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놀란 소진이 흠칫하며 헌의 뒤로 주춤, 물러났는데.
“저하. 여인들이 다시 중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뭐? 확실한 것이냐?”
“예.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였는지, 다시 돌아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말에 소진이 화들짝 늘라며 입술을 달싹였다.
“궐문 쪽으로 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러자 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궐 밖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겠지요.”
“아.”
“저 대치 상황이 끝나도 내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계속 중궁전을 감시하여야 한다. 언제 어느 때, 빼돌릴지 모르니.”
“예, 저하.”
무사는 헌의 명령에 속히 걸음을 옮겨 궐 안으로 돌아갔다.
“성공……!”
“……?”
“성공입니다, 저하!”
소진은 반색하며 헌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직, 반만 성공인 것이지.”
“예……?”
“여인들을 다시 무사히 밀실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젠 무사히 밖으로 빼내는 일만 남았구나.”
“그것 역시 잘될 것입니다, 저하.”
“그래. 어머니께서 깨시겠다. 얼른 가자꾸나.”
헌은 소진의 손을 꼭 붙든 채, 잠행하러 다닐 때 자신이 사용하던 비밀 통로로 소진을 이끌었다.
소진 역시, 그와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힘을 주며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신분을 밝히지 못하겠느냐!”
궐문 앞에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고, 소진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곳을 바라보다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때. 웬 사내 둘이 궐문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소진의 중얼거림에 헌도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
김 도령이, 미친 듯이 뛰어가다가 궐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헌의 명민한 시선에 돌아보는 김 도령의 얼굴이 박혔다.
“저자는!”
김 도령이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헌의 머리를 누군가가 세차게 때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앞에 번쩍 불이 켜졌다……!
-얼른! 부인, 얼른 달아나야 하오!
일 년 전, 풍등제 날 밤.
김 도령이 자신의 부인을 잡아끌면서 외쳤던 소리가, 헌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이었구나.”
그리고 두 사람이 미친 듯이 애월루 쪽으로 뛰어가는 뒷모습이.
그러다 머리를 강타당하기 직전의 헌을 향해 돌아보는 두 사람의 모습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이후, 머리에 아릿하게 퍼지는 통증과 함께 자신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던 것이 기억났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 머리가 아프십니까?”
되살아난 기억에, 그날의 아픔까지 생생하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헌을 부축하며 소진이 걱정했다.
“저하…….”
“내가…… 정말 김 도령을 쫓고 있었어.”
지금까지는 그 전 과정까지만 기억이 났었는데, 오늘은 김 도령의 얼굴을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뻤다.
정말, 그 캄캄한 기억 속에서 김 도령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니 기뻐서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김 도령의 얼굴이 기억났습니까?!”
이상하게 여전히 그 기억 속에서도 김 도령의 얼굴은 낯설었다.
-저 사내는 누구지……?
그날, 헌은 멀어지는 김 도령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그렇게 중얼거렸었으니까.
분명 일 년 전에도 김 도령은, 헌에게 낯선 얼굴인 듯했다.
하지만 끝끝내 보이지 않는 강 씨 부인의 얼굴에 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한데 그 옆의 강 씨 부인의 얼굴은 아직 흐릿하구나.”
“정말 이제 한둘씩 기억이 나려나 봅니다! 김 도령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소진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헌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한데 참, 이상해.”
“예?”
“난 일 년 전에도 김 도령의 존재는 몰랐던 것이야.”
“그것이 어떻게…….”
“분명 내가 그날. 김 도령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저 사내는 누구지, 라고 중얼거렸다. 방금 그렇게 말하며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쓰러지는 내 모습까지 기억이 났거든.”
“아……?”
“일면식도 없는 강 씨 부인과 김 도령을 내가 왜 쫓았지?”
더, 떠오르지 않는 그날의 기억에 짜증스러운 듯 헌이 미간을 구기며 주먹을 바짝 쥐었다.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소진의 가슴도 더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소진은 바짝 쥔 그의 커다란 주먹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으니…… 따라간 것이 아닐까요?”
“……흠.”
“중궁전에 저리 큰 비밀을 숨겨두고 있었으니, 그날 저하의 눈에 비친 그 두 사람의 동태가 얼마나 수상했겠습니까?”
“…….”
“그러니 저하께서 위험을 감수하시고도 그 뒤를 따랐겠지요.”
위로하는 소진의 말에 헌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소진을 품에 안았다.
헌의 몸은 열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무척 뜨거웠다.
“저하…….”
소진이 걱정스럽게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 뒤를 따르다가…… 습격을 당했겠지?”
“예.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어쩌면 그 기억이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찜찜한 것인지…….”
“당연히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찝찝한 것이겠지요.”
그녀는 연신 그를 위로하며 따뜻하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의 두통이 걱정된다는 듯,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제 소맷자락으로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아픈 것은, 괜찮으시어요?”
그녀의 고운 눈동자에 걱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헌은 그녀의 하얀 손목을 뜨겁게 움켜쥐었다.
“당연히 괜찮지.”
“……?”
“네가 나의 약이지 않느냐.”
“저하.”
“너만 있으면 하나도 아프지 않다.”
헌은 소진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그녀의 동그란 이마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고맙다. 늘 이렇게 내 앞에 네가 있어 줘서.”
그 말에 소진이 그의 품에 쏙 안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소인이야말로 고맙습니다. 늘 소인의 곁을 지켜주셔서요.”
* * *
소진을 무사히 집으로 보낸 뒤, 헌은 곧바로 궐로 향했다.
그러자 윤현이 동궁에서 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저, 저하……!”
“그래. 어찌 되었느냐?”
궐문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모두 정리가 된 것 같았는데, 그 이후가 궁금했다.
헌이 옷을 벗으며 윤현을 세차게 돌아보았는데 어쩐지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냐?”
“……여인들은 무사히 밀실로 다시 돌아갔고요.”
“그래.”
“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중궁전 쪽 무사들을 모두 생포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런데?”
윤현이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속히 고하거라.”
그의 심상찮은 반응에 헌이 옷을 벗던 손을 멈추며 매섭게 눈을 번뜩였다.
“잡힌 무사들이…… 배후를 물으니.”
“……?”
“중궁전 쪽이 아닌…….”
윤현이 뜸을 들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동궁 밖이 소란스러웠다.
“아니! 중전마마……! 어, 어찌!”
“주, 중전마마……!”
동궁 궁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중전을 부르고 있었다.
“중전……?”
갑작스러운 중전이란 소리에 헌이 미간을 홱 구긴 채, 동궁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 저하……! 중전마마께서 납시셨나이다!”
막, 출산을 해 성치 않은 몸으로 대체 여기는 왜.
잠시 궐을 비운 사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헌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모시어라.”
헌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동궁 문이 우악스럽게 열리더니 중전이 상궁들의 부축을 받으며 휘청휘청 들어서고 있었다.
그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가도 빨개져 있었다.
“세, 세자……!”
“성치 않은 몸으로 대체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납시셨습니까.”
헌은 딱딱하게 대꾸하며 중전을 외면했다.
그러자 중전이 상궁들의 손을 뿌리치며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헌의 소맷자락을 꼭 붙들며 세차게 이를 악물었다.
“들었습니까? 방금 궐문 앞에서 생포했다는 반역의 무리들……!”
그 말에 헌이 중전이 아닌 윤현을 거세게 바라보았다.
‘그건…… 너희가 보낸 무리지 않으냐? 한데 그걸 어찌 내게.’
그가 그렇게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쯤, 중전이 갑자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노린 것입니다! 내 아들을……!”
“……그게 무슨.”
“세자께서 경비를 강화하라 은밀히 명을 내리지 않았으면 정말 내 아들과 내 목숨이 큰일 날 뻔하였어요……! 흑흑…… 흑흑.”
가증스러운 눈물을 흘리는 중전을 짜증스럽게 밀어내며 헌이 윤현을 향해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소상히 고하라.”
“궐문 앞에서 생포한 무사들의 배후가…… 영의정 대감 쪽…… 무리라고 하옵니다.”
“뭐?! 영의정?!”
그러자 중전이 헌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중궁전 상궁들도 흠칫하며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넘어진 중전을 부축했다.
“영의정이…… 영의정 대감이…… 내 아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줄이야!”
그러다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중전을 거세게 지나치며 헌이 윤현의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영의정이라니? 그게 왜, 영의정……!”
그러자 윤현이 고개를 숙이며 오직, 헌만 들리게 나직이 속삭였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우선 위기를 피하고자 영의정의 이름을 둘러댄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영의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도 중전마마께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저희 쪽 무사들이…… 영의정 대감을 데리러 갔습니다.”
소진이 막 집에 도착했을 텐데, 그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헌은 소진의 걱정에 숨통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중전이 다시 비틀거리며 헌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세자, 나와 우리 아기의 목숨을 지켜주세요.”
“…….”
“영의정 대감을 지금 당창 추포해…… 일의 진상을 꼭 밝혀주셔요. 아니지요, 이참에 말입니다.”
“……?”
“세자의 눈에도 영의정은 늘 눈엣가시였지 않습니까?”
그러다 음성을 은밀히 낮추며 헌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이참에…… 화론 파를…… 모두 파멸시켜버리세요, 세자.”
자신도 화론 파였으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헌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전을 홱, 노려보았다.
“화론 파는. 작금의 중전마마를 만든, 마마께는 구세주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
“한데 어찌 내게 화론 파를 파멸시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딱딱한 헌의 어투에 중전이 눈가의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구세주 같은 존재.”
“……?”
“였었지요.”
“……뭐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내 아들을 잡아먹다 못해, 나까지 궐에서 내쫓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영의정 대감입니다. 그리고 이미 화론 파에선 나와 우리 친정 쪽은 찬밥 신세가 된 지 오래지요.”
“…….”
“그렇다고 그들이 세자를 위하는 자들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보은군을 다음 보위에 앉힐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 세자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중전의 속삭임은 꼭, 악귀(惡鬼)의 꿀 발린 목소리 같았다.
헌은 그런 중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술을 세차게 악물었다.
“나를 이용해도 좋습니다. 영의정을 버리고 보은군까지 물리칩시다, 세자. 어차피 적수는 많이 둘수록 우리에게만 손해지요. 훗날에 세자가 나와 내 아들을 내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
“잠시나마 동맹을 맺자는 겁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자와 내가 힘을 합치면 영의정쯤은 단숨에 몰락시켜버릴 수 있어요.”
중전이 헌의 옷자락을 더욱 거세게 쥐었다.
“영의정을…… 버리세요, 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