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가 왕세자를 낳았거든.
2021.08.23.
갑작스러운 소진의 거센 반응에 상궁은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소진은 홱, 상궁을 돌아보며 미간을 세차게 일그러뜨렸다.
“방금 치성을 드리고 온 성수청 궁녀의 몸에 불결한 손을 대다니!”
“……?”
“부정이라도 타, 중전마마와 왕자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대가 책임질 것입니까?!”
정말 혼이 실린 성수청 궁녀처럼, 소진은 상궁보다 더 표독스럽게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거친 기세에 상궁은 주춤했다.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치성은 오늘 밤, 어둠이 걷고 새 태양이 뜰 때까지 지속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기도가 끝났다니.”
“……!”
“중궁전에서의 기도가 끝난 것이지, 아직 몸을 다 풀지 못하신 중전마마와 갓 태어나신 왕자 아기씨의 안위를 위한 치성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소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부적과 물이 담긴 호리병을 꺼내 상궁의 앞에 보였다.
그러곤 괜히 한숨을 푹, 푹 내쉬며 성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 부적.”
“……?!”
“국무당 마마님께서 제게 지니고 있으라고 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무, 무엇이오. 그것이.”
조금은 겁에 질린 듯, 상궁이 눈빛을 떨며 소진이 들고 있는 부적을 힐끔거렸다.
“왕자 아기씨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입니다.”
“……아.”
“중전마마께서 혹, 왕자 아기씨를 낳게 되시면 곧장 제 몸에 지녀 치성을 드릴 수 있게 하도록 제가 몇 날 며칠을 몸을 깨끗이 다스리고 음식까지 가려가며 이 몸을 깨끗하게 만들었는데…….”
“……!”
“방금 상궁 마마님의 손이 닿았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상궁은 아연실색해, 소진에게서 더 멀리 물러났다.
“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중궁전 최고 상궁 마마님이시지요? 당장 가, 국무당 마마님께 이 사실을 고해야겠습니다.”
“아니! 그것은 아니 되오!”
안된다며 손사래 치는 상궁을 바라보며 소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우리 둘만 아는 일에 부치도록 하지요.”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소! 한데…… 내 손이 그대의 몸에 닿았으니…… 부정이라도 탄 것이면…….”
소진의 말에 완벽히 속아 넘어간 상궁은 오히려 부적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말에 소진이 손에 들고 있던 호리병 뚜껑을 열어, 상궁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 물을 뿌렸다.
“아.”
“혹시 몰라 챙겨왔는데, 다행입니다. 성스러운 물이니, 더러운 기운을 깨끗하게 씻어내 줄 것입니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것으로 합시다. 부탁하오.”
신신당부하며 상궁이 황급히 어딘가로 사라졌고 소진은 부적과 호리병을 다시 품에 넣으며 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하……!”
“거기서 갑자기 상궁이 나타날 줄 몰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헌은 무사히 상궁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온, 소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소진은 생긋 웃으며 그의 품 안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어요. 소인이 이럴 때를 대비해, 부적을 준비해둬서. 휴우…….”
“네가 나보다 곱절은 더 낫구나. 나는 그대로 달려가, 상궁을 기절시키고 널 데리러 와야 할까. 그런 생각만 했었는데…….”
그 말에 소진이 그의 품에서 살며시 떨어지며 상궁에게서 들었던 것을 얼른 헌에게 고했다.
“지금 저 안에 있는 여인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복면을 씌우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해서 궁녀 3명이 저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고요.”
“그리고.”
“상궁은 곧바로 궐문으로 가, 무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고 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여인들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손을 미리 써뒀어.”
헌은 곁에 있는 윤현에게 얼른 궐문으로 가보라는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윤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궐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
어둠을 헤집고 달려가는 윤현은 정말 빛보다 빠른 듯했다.
어떻게든 중궁전 상궁보다 먼저 당도해 채비를 해야 하니, 그는 숨도 안 쉬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진의 손을 헌이 살며시 끌었다.
“소진아.”
“예, 저하.”
“오늘 너에게 큰 짐을 안겨주었던 것 같아서, 널 볼 면목이 없구나.”
“그런 말씀 마셔요. 제가 이 일에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어, 너무 기쁩니다. 또, 제가 직접 저 안으로 들어가 봉희까지 만났으니 이제 여한이 없어요.”
그러는 순간, 중궁전 문을 우르르 나서는 밀실의 여인들이 보였다.
모두 눈을 가린 채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디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중궁전 궁녀들이 작정한 사람들처럼 달려들어 여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무사하겠지요, 모두?”
그 틈에 낀, 봉희를 발견한 소진이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며 자신의 옆으로 바짝 당겼다.
“무사할 것이다.”
“저하…….”
“모두…… 무사해야만 한다.”
이내 그들은 따로 마련해 놓은 비밀 통로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헌이 그녀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가자. 널 집에 데려다줄 것이야.”
“혼자 가겠습니다. 숙자도 지금 궐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어차피 동궁으로 가, 갈아입어야 하지 않느냐. 네가 무사히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아야 내가 안심될 것 같아서 그런다.”
더는 그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긴박하고 촉박한 상황이라 그런지 사실 헌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소진은 한참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왔던 길 그대로 돌아, 동궁으로 향했다.
* * *
“아, 아들이라니…….”
그 소식은 이내 대비전에도 닿았다.
왕과 함께 있던 대비는 산실청에서 들려온 소식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왕 역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쌌다.
“송, 송구하옵니다. 마마……!”
대비전 상궁이 대비와 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주상?”
대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는데, 왕이 얼굴을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주, 주상……?”
“…….”
“주상……!”
놀란 대비가 서둘러 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상! 괜찮으신 겝니까?!”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왕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대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동공이 풀린 눈으로 대비의 허리를 꽉, 끌어안는 왕.
그는 곧 다시 노망이 도진 듯, 어린아이처럼 대비를 안은 채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소자 춥습니다, 안아 주세요.”
“하…… 주상. 대체…….”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대비는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파르르 떨었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표정과 말투.
정말…… 왕에게서 더는 예전의 용맹하고 근엄하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비는 속상한 마음에 울컥, 눈물을 터뜨리며 왕을 품에 안았다.
“대체 누가 주상을 이리 만든 것입니까…… 대체 누가……!”
그러자 왕이 해맑게 웃으며 대비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조 숙원에게 데려다주세요. 예?”
“……조 숙원은.”
“조 숙원이 보고 싶습니다. 그 뱃속에 든 우리 세자도 보고 싶고요……!”
대비가 그토록 반대하고 왕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애를 썼던, 여인 무수리 조 씨.
결국, 왕의 기억은 그때에 멈춰 있는 것이었다.
작금의 세자의 생모였지만, 천출(賤出)에 무수리란 이유로 대비는 끝끝내 그녀의 첩지를 올려주지 않았다.
말단 후궁인 숙원도 감지덕지하라며 어린 헌과도 만나지 못하게 하였었다.
장자의 생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걸, 대비 역시 끝끝내 숨기고 싶었으니까.
왕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무시하고 싫어했던 지난날, 자신의 모습이 후회됐다.
게다가 꽃다운 나이에 의문사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죽음도, 흐지부지하게 넘겼으니 꼭 그때의 죗값을 지금 받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때의 죄를 받는 모양입니다.”
“어머니, 아니면 조 숙원을 여기로 좀 불러주세요. 조 숙원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칭얼대는 왕의 눈시울이 뜨겁게 젖어 있었다.
대비도 그를 따라,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이 어미가 죄인입니다…… 이 어미가…….”
“조 숙원을 당장 여기로 불러 들이거라! 당장!”
“조 숙원은 죽었습니다, 주상!”
“아니요! 죽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허탈함에 대비가 품에 안았던 그를 놓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조 숙원을 데리고 오라 울부짖는 그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주상과…… 주상의 여인을…… 내가 지켜주지 못했지만, 우리 세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세자만큼은 내 손으로 꼭 지켜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한소진, 그 아이를…… 반드시 세자의 곁에 두겠습니다.”
대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궁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중전이 왕자를 낳았으니.”
“…….”
“이제 간택을 더 미룰 필요가 없지.”
“예, 대비마마.”
“새 가례청(嘉禮廳)을 설치하여 간택을 재개하도록 하여라. 보름 뒤, 그때 그 규수 그대로 재간택이 다시 이루어진다.”
“마마의 명을 받잡겠나이다.”
* * *
“중전마마, 지금 밀실 안의 여인들이 궐문을 향해 빠져나가고 있사옵니다……!”
궐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전 쪽 무사들에게 명을 전달하고 온 중궁전 상궁이, 산실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왕자를 품에 안은 채,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얼굴을 하고 있던 중전이 반색했다.
“참이야?! 모두 무사히 밀실을 빠져나간 것이야?!”
“예, 마마. 기뻐하소서……! 오늘은 중전마마의 날입니다!”
중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세자가, 복덩이구나? 네가 이 어미를 살렸어. 응?”
중전은 이미 제 아들을 세자라 부르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행복이야.”
“마마…….”
“또한, 처음 느끼는 벅찬 감정이고.”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중전이 비릿한 조소를 터뜨리며 얼굴을 치켜들었다.
“아, 처음이 아닌가?”
중궁전 상궁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중전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중전의 말에 상궁이 눈을 반짝였다.
“예……?”
“조 숙원.”
“……!”
“그년이 죽었을 때도…… 딱, 이런 느낌이긴 했지.”
중전은 매섭게 돌변한 눈빛으로 다시금, 제 아들을 내려다 봤다.
-내 아들…… 우리 아들 세자만큼은…… 살, 살려주세요. 중, 중전마마……!
잊고 지냈던 그 날의 그 목소리가 중전의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네 아들 세자라…….”
“…….”
“한데 어쩌지? 네 아들은 이제 세자가 아닌데?”
그러면서 중전은 제 아들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조선의 왕세자를 낳았거든.”
* * *
“다, 갈아입었습니다, 저하.”
소진이 다시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후, 병풍 뒤를 나섰다.
그러자 헌이 잠자코 뒷짐을 진 채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아쉽구나. 동궁 구경이라도 좀 시켜주고 널 보내야 하는 건데. 지금 아마 궐문이 대치 상황일 것이라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속히 널 이곳에서 내보내야 할 것 같구나.”
“그러게요. 저하께서 지내시는 곳이 늘 궁금했는데.”
그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엔 꼭, 구경시켜주마.”
“예, 저하.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사뿐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높은 동궁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고운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헌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런데 소진아.”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소진이 볼을 붉혔다.
“내가 꼭 구경시켜주지 않아도, 곧 네가 직접 구경하러 올 것 같은데.”
그 말에 소진이 고개를 사뿐히 돌려 그를 바라봤다.
“소인이 직접이요?”
“응. 그것도 매일.”
“매일? 어째서요……?”
그녀의 물음에 헌은 대답 대신 소진의 뺨을 가볍게 그러쥐어, 입술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