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 거기, 너. 멈춰 서보거라. (93/125)

93. 거기, 너. 멈춰 서보거라.

2021.08.20.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소진은 황급히 어둠 속의 여인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곤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을 기세로 단단히 손을 움켜쥔 채, 눈빛을 반짝였다.

“소진아…….”

봉희는 소진을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녀의 옷깃을 쥐었다.

“괜찮아.”

그런 봉희를 슬며시 뒤로 밀어내며 소진은 애써 미소를 그렸다.

입구에서 내려오는 누군가가 횃불을 들었는지, 점점 더 지하실 안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잔뜩 몸을 낮추어 발소리에 집중하니, 다행히도 한 명인 것 같았다.

소진은 이를 꽉 악물고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궁녀든 무사든…… 한 명이면 해볼 만해.’

그리고 막, 그 누군가가 계단을 모두 내려와 지하실 바닥에 발을 디디려 하는 순간!

“……!”

소진이 야무지게 움켜쥔 주먹을 잽싸게 휙, 날려 단숨에 제압하려는데.

그 누군가가 소진이 뻗은 팔을 부드럽게 움켜쥐어서는 그녀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납니다, 낭자.”

이내, 잔뜩 긴장한 그녀의 귀 위로 나지막한 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저하……?”

“낭자가 너무 나오지 않아, 걱정되어서요. 서둘러야 합니다.”

“저하, 밖에 궁녀가 감시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중궁전의 출산 소식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자 저하라는 말에, 궐 안 여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 헌을 향해 납작 엎드리며 살려 달라, 부들부들 떨었다.

“사, 살려 주시옵소서, 세자 저하!”

“저하…… 저희를 부디 집으로 보내주세요!”

그러자 헌 역시, 처음 지하실 안의 여인들을 발견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던 소진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정말 이곳에……!”

채 말을 잇지 못하는 헌을 향해 소진이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았다.

“저하, 정말 저하의 말대로 이곳에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저의 벗인 봉희도 있었고요!”

“벗을 찾았습니까?!”

“예! 드디어 찾았습니다.”

다시 소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헌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여전히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는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방금 중전이 출산을 마쳤소.”

“……!”

그 말에 소진이 눈을 크게 떴다.

또한, 지하실 안의 여인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예상컨대 아마 오늘 밤, 중궁전 사람들이 오늘 밤 그대들을 밖으로 내보낼 것이오.”

“아닙니다! 저희를 무사히 집으로 보낼 인간들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하……! 지금까지 저희를 이곳에서 짐승 취급하며 사육을 한 몹쓸 인간들입니다. 제발 저희를 저하께서 데리고 나가주세요!”

여인들이 울부짖으며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소진은 행여 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여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들 하세요……! 이러다 여기서 들키면 모두 끝장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서둘러 지하실 밖의 동태를 살폈다.

“중전마마께서 출산하셨다고 하면 필시,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올 것이어요! 그러니 다들,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저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어수선한 지하실 안 분위기를 단숨에 정리시키는 소진.

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여인들을 돌아보는 헌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지금 당장은 그대들을 이 밀실 밖으로 내보내기는 무리오.”

“…….”

“하지만 난 그대들을 오늘 밤, 이 밀실에서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오.”

근엄한 헌의 음성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여인들이 하나둘, 머리를 추어올렸다.

소진도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걱정 가득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대들이 짐작하고 있는 대로 오늘 밤 그대들이 이 밀실 밖으로 나선다면…….”

“……?”

“무사히 식솔들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소.”

“저, 저하……!”

“하니, 나는 우리 무사들과 함께 그대들을 빼돌리려 하는 무리와 대치해,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킬 것이오.”

“……!”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나를 믿고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주시오.”

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진이 두 손을 모아 호소하듯,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동요하는 여인들을 설득시키려는 듯, 말을 보탰다.

“지금 당장 당신들을 저들의 손아귀에서 빼앗다간…… 그대들 중 누군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빼내기 위해 저쪽에서 많은 군사를 준비했다면.”

“…….”

“우리가 그대들을 한 명도 손에 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증거 인멸을 위해 그대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

“또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오늘 이곳 여인 중, 일부만 밖으로 내보낸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되면 이곳에 남은 여인들의 목숨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구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하와 함께 철저하게 준비해, 다시 그대들을 구하러 올 것이니, 저하의 말을 믿고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그러자 여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씨!”

“세자 저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꼭, 부디 꼭…… 구하러 와주셔야 하옵니다.”

가엾은 이들을 두고 다시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진은 봉희의 손을 뜨겁게 그러쥐며 말없이 부둥켜안았다.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봉희야…….”

“모두 다…… 우릴 잊은 줄 알았어.”

“……!”

“우린 힘없고 가난한 천것들이니…… 당연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힌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넌 내 소중한 벗이고…… 이곳에 있는 여인들 모두도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자식이고 벗이고…… 아내인데.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어.”

“소진아.”

“모두 포도청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진을 치고 앉아, 목놓아 울고 있어.”

“정말……이야?”

“다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모두…… 조금만 더 힘내줘. 알았지?”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떨어졌다.

헌과 소진이 서둘러 지하실을 나섰고 여인들은 모두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다독였다.

“조금만 힘냅시다, 우리!”

“예. 저하와 저 규수께서 우리를 반드시 구하러 와주실 거예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헌과 소진은 무사히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중궁전의 전각 밑의 틈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저하…….”

“정말…… 정말, 저 안에 여인들이 있었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아.”

“저도 그랬어요. 대체 여인들을 저곳에 가두고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두 주먹을 움켜쥔 소진은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헌은 그런 소진의 어깨를 따스하게 그러쥐며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수평으로 맞추었다.

“내 말…… 똑똑히 듣거라, 소진아.”

“예, 저하.”

“중전이…….”

“……?”

“아들을 낳았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이 된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진은, 헌이 걱정이 되었다.

“괜찮사옵니까, 저하?”

“당연하지. 중전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걱정하는 투의 소진을 달래주듯 헌은 편안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해서 아마 반드시 오늘, 저 밀실 안의 여인들을 밖으로 빼내려고 할 것이야.”

“……예.”

“왕자를 낳았으니 여유도 생겼을 테고, 기세도 등등해졌을 테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겠지.”

“……소인이 어찌 하올까요?”

“여기서 상궁들이 저 여인들을 어찌한다든지, 어디로 데려간다든지 혹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내게 고하여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중궁전 밖에서 윤현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네가 고해준 대로 무사들을 움직일 것이야.”

막중한 책임에 소진의 몸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녀는 입술을 꾹 앙다문 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속히 나가보세요. 곧, 이곳으로 궁인들이 몰려올까 봐 겁이 납니다, 저하.”

소진이 그의 등을 떠밀며 얼른 나가보라 손짓을 했다.

그러자 돌아서던 헌은 이곳에 그녀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연신 뒤를 돌아 소진을 바라봤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얼른 가셔요.”

소진이 입술을 뻥긋거리며 그렇게 속삭였다.

헌은 그녀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이며 희미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곧, 그가 떠나고 전각 밑에는 다시, 소진 혼자 남겨졌다.

“아들을…… 낳았다니.”

그러다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아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었다.

중전이 왕자를 출산했으니, 아무리 헌이 괜찮다고 해도 그의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였다.

한참, 헌을 걱정하며 중궁전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그때.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야! 하늘은 역시, 중전마마의 편이었어!”

감격에 겨워 그렇게 소리치며 중궁전 상궁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진은 한껏 자세를 낮추어 그녀의 발을 유심히 살폈다.

뒤이어 따라오던 한 궁녀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이제 저희도 궐에서 큰소리치면서 지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중전마마께서 무려 왕자님을 생산하셨는데!”

“뒷방 늙은이인 대비도 그리고 민 소용도 모두 우리 중전마마를 무시하지 못하겠죠?”

“당연한 소리! 이제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중전마마의 발만 쳐다볼 것이야. 그뿐이겠느냐? 사사건건 성가시게 굴던 세자 또한, 우리 중전마마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할 것인데?”

그들의 대화에 소진이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어디 너희들 뜻대로 되는지, 두고 보자꾸나.’

그때, 한참 목젖이 보이도록 웃음을 터뜨리던 상궁이 궁녀의 팔을 휙, 잡아당겨 은밀히 말했다.

“채비는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오늘 밤 보낼 여인들의 철창 문을 모두 열어놓고 명령만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왕자 출산 소식이 막 궐에 퍼진 지금.”

“……!”

“저 안에 있는 여인들을 모두 출궁시키라는 명을 내리셨다.”

유달리 흥분에 들떠 있는 듯한 상궁의 목소리가 소진의 귓가에 세차게 박혔다.

소진은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가슴으로 끌어와 온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러곤 조금 더, 그들 쪽으로 다가가 두 사람의 대화에 온 감각을 기울였다.

“지금 당장 너와 강 나인이, 그리고 조 나인이 동시에 저 안으로 들어가 오늘 밤 내보낼 이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복면을 씌우거라.”

“예.”

“나는 이대로 궐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에게 가, 여인들이 오고 있음을 알릴 것이니. 속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마마님……!”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상궁이 다시, 중궁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고.

막, 이쪽으로 다가온 두 궁녀와 함께 총 세 사람이 지하실 안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지금이야……!’

소진도 서둘러야 했다.

자신이 지체한다면 헌의 무사들도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 저들을 놓칠 것이 분명했다.

낮은 자세로 처마 밑을 기어가는 소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꾸만 치맛자락이 발에 걸려 흙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서둘러야 해. 한소진, 정신 차려……!’

그때, 막 상궁이 중궁전 문지방을 넘는 것을 확인한 소진은 황급히 처마 밑을 기어 나왔다.

그러곤 헌이 기다리고 있을 중궁전 앞으로 막 걸음을 떼는 순간.

“거기, 너.”

“……!”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 하나가 소진의 발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소진은 그대로 치맛자락을 꾹 움켜쥔 채로 멈춰 서고 말았다.

“멈춰 서 보거라.”

“…….”

“넌 누구지……?”

앞서 나간 줄 알았던 중궁전 상궁이 다시 되돌아온 것이었다.

당황한 소진의 등 뒤로 상궁이 의뭉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향해 점점 더 다가왔다.

좁혀지는 거리에 소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헌이 자신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두 사람의 불안함에 떨리던 시선이 부딪혔고.

동시에 상궁이 소진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복색을 보아하니 성수청 궁녀 같은데.”

“…….”

“네가 왜 아직 중궁전에 남아 있는 것이지? 성수청 궁녀들은 아까 모두 기도를 마치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찢어지는 듯한 상궁의 고함과 함께 그녀가 소진의 얼굴을 확인하기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

소진이 그 손을 거세게 쳐냈다.

“어허! 감히 뉘에게 손을 대는 것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