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산실청에서 들려온 울음소리.
2021.08.16.
궁녀가 밀실 안으로 들어간 틈을 놓치지 않고 소진이 문 쪽에 달라붙어 궁녀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소진이 뒤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른 채, 궁녀는 발걸음을 서두르기에만 급급했다.
지하로 이어진 돌계단이 꽤 많았다.
궁녀가 계단을 다 내려가 안쪽으로 돌아서자 소진도 서둘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들켜선 안 돼……!’
숨죽인 채, 어둠 속으로 몸을 집어넣는 소진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벽에 딱 달라붙어 어둠을 방패 삼아, 소진은 궁녀가 내려간 길을 뒤따랐다.
삐거덕, 철창문 열리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고 그녀는 예민하게 귀 끝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너희들이 밖으로 나가는구나?”
궁녀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진은 여전히 계단 벽에 등을 꼭 붙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신호가 있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여선 아니 된다. 내 말을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할 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야.”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궁녀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철창문을 여는 듯, 자물쇠 열리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에 소진의 눈살이 찌푸려졌고, 그녀는 이윽고 계단을 모두 내려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궁녀는 더, 더 안쪽으로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떡하지? 어디에 몸을 숨기지?’
소진이 우왕좌왕하며 고개를 휘휘 돌렸는데, 어둠 속에서 까맣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것들이, 다…… 뭐지?’
소진은 숨죽인 채, 가만히 빛나는 것들을 응시했는데.
“……!”
그녀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눈동자였다……!
* * *
“저하, 왜 이렇게 감감무소식일까요?”
윤현이 초조한 눈으로 중궁전을 바라봤다.
성수청 궁녀들의 치성을 위한 제사가 시작되었는지, 북 치는 소리가 쿵쿵쿵 들려왔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헌이 뒷짐을 지고서 중궁전을 향해 눈빛을 번뜩였다.
“그렇게 아들이 낳고 싶은 것일까.”
왕자 생산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전이 왕자를 낳지 못하면 사실상, 권력 싸움에서 크게 뒤지는 것이니 저렇게 아들을 낳으려 이를 악무는 것일 테였다.
그때, 중궁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저하…….”
윤현도 예민하게 동공을 떨며 헌을 바라봤다.
중궁전 안으로 궁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급하게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모두 산실청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산실청에서 무슨 소식이 들려온 것인지, 그곳으로 급히 향하는 궁인들을 바라보며 헌이 굳게 입술을 감쳐 물었다.
헌의 예상은 중전의 출산과 동시에 저 밀실 안의 여인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정말 헌의 말대로 오늘 밤에 산실청 쪽에 시선이 옮겨간 틈을 타, 그 여인들을 출궁시킨다면 헌은 무조건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저하, 차라리 한 규수가 저 안에 여인들이 있다는 것만 확인한다면 바로 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윤현이 당장이라도 저 안으로 달려갈 기세로 헌에게 물었다.
하지만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안에 여인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어째서.”
왜 평소 그답지 않게 신중을 가하는 것인지, 윤현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다.
헌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소진이 들어간 중궁전만 응시했다.
“오늘 호위대를 배치한 것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다.”
“…….”
“소진이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거나, 저들이 무력을 행사할 것을 대비해서지 우리가 저들을 공격하기 위해 배치한 것이 아니다.”
느릿느릿, 그러나 정확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던 헌이 윤현을 돌아보았다.
“중전이 저 안에서 백성들을 가두고 대량 학살한다고 해도 오늘은 그저 좌시해야만 하는 날이다.”
“오늘은요……?”
“중전의 출산 날이 아니더냐. 한 나라의 국모가 왕의 자식을 생산하는 성스러운 날이다. 역공을 당한다면 꼼짝없이 덫에 빠지게 될 수도 있는, 우리에게는 위험한 날이지.”
“아.”
“더군다나, 주인도 없는 처소를 들이닥친다? 이미, 저들은 우리가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
“그렇다면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다 마련해두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겠지. 우리의 섣부른 행동이 어쩌면 그들을 도와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어.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예, 저하……. 명대로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헌의 말에 윤현이 그의 깊을 뜻을 헤아리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소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에 여인이 있는 것을 확인하면 확인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서둘러 나와 상황을 보고하기로 하였는데, 들어간 지 꽤 되었음에도 소진은 흔적조차 없었다.
‘분명…… 자물쇠 열쇠를 지닌 상궁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별다른 지시가 없었던 모양일까. 해서, 문이 열리길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성수청 궁녀들의 의식이 모두 끝나기 전에, 소진도 중궁전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소진아…….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그때, 중궁전 안으로 궁인 여럿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며 소리쳤다.
“산실청에서 소식이 들려왔소……!”
그 말에 헌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중전마마께서 지금 막 출산을 하셨다고 하옵니다!”
* * *
‘어떻게 이, 이런 일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본 순간, 소진의 온몸에는 소름이 쭈뼛 돋아나는 것 같았다.
헌의 말대로 정말 이 지하실에, 많은 사람이 갇혀 있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그녀는 두 다리가 떨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발 오늘 밤에는 너희들이 출궁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너희 때문에 내가 할 일이 너무 많거든. 아주 성가셔 죽겠어.”
저 안 깊숙이까지 들어갔던 궁녀가 다시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소진은 서둘러 몸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이 안에 갇힌 많은 사람의 눈동자를 직시한 순간, 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홱, 잡아당겼다.
“……!”
그 덕에 소진은 궁녀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소진이 들어간 곳은, 그녀가 서 있던 바로 옆 철장 안이었다.
그리고 놀란 소진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 말라는 듯, 소진을 잡아당긴 그 여인은 조용히 하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곧, 지하실 안 철창문 몇 개를 연 궁녀가 상궁의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갔다.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소진은 부르르 몸을 떨며 궁녀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철창문이 다시 삐거덕 닫히는 소리가 나고 정적이 흘렀다.
소진은 서둘러 자신을 잡아당긴 여인을 돌아보았다.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지하라,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대체 이곳이…….”
자신의 주위에 분명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몇 명이 있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소진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입니까?”
“저희를 좀 구해주세요……!”
여인들이 하나둘, 소진의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캄캄한 시야였지만 살려달라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다들 여인입니까? 누가 이렇게 가둬둔 것입니까?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했던 것이고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소진은 숨이 차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핑, 돌아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지만 소진은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모두 여인들입니다……. 저희를 구하러 오신 분인가요?”
그때, 소진의 팔을 잡아당겼던 그 여인이 소진에게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그 목소리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 모양인 듯, 먹먹한 그녀의 목소리에 소진의 마음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그러곤 자신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그 여인을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예. 그대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구해 줄 테니,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그렇게 소진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던 그때, 소진의 팔을 쥐고 있던 그 여인이 소진을 자신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너……?”
그리고 소진의 양어깨를 꽉 쥐며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예?”
“너 혹시…… 한소진.”
“……!”
“소진이니?”
소진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귀에 너무도 익어, 소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말았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목소리.
그렇게 듣고 싶어,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던 음성.
소진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 여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긴가민가하는 소진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소진을 향해 그 여인이 소리쳤다.
“맞지? 너 소진이…… 맞지, 그치?!”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안았다.
짙은 어둠에 가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직 목소리만으로도 둘은 알 수 있었다.
“봉희야!”
“소진아!”
‘널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드디어 찾은, 자신의 하나뿐인 벗 봉희.
소진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다시는 너랑 안 헤어질 거야, 윤봉희……!”
* * *
“하아…… 하아…….”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중전이 부들부들 떨었다.
곧, 아기 울음소리가 산실청을 꽉 메웠고 곁을 지키고 있던 산파와 궁인들이 환하게 웃으며 모두 납작 엎드렸다.
“중전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중전마마!”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중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아이를 확인하려는 듯 손을 뻗으며 파르르 떨었다.
“공주냐……?”
“마마…….”
“공주인 것이냐고 물었다. 속히 대답하지 못할까!”
곧 들려올 대답이 두려운 듯, 중전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갔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야만 하는 대답.
중전의 핏발 선 눈동자에 뿌연 눈물이 꽉 차올랐다.
‘뭐가 급해…… 벌써 나온 것이니, 아가.’
하얀 천에 쌓인 아이는 산실 청 천장이 부서져라, 와앙 울어대고 있었다.
삼일만, 딱 삼 일만 기다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데.
중전은 예정된 날보다 일찍 나온 아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아이를 안고 있던 산파가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이를 한 번 내려다보곤 고개를 조아리며 입술을 벌렸다.
“감축드리옵니다, 중전마마!”
“……?”
“건강하신 왕자님이옵니다!”
그 말에 상궁들과 궁인들 모두, 산파를 따라 엎드리며 만세 하듯이 외쳤다.
“참으로 감축드리옵니다!”
왕자라는 말에, 중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포효하듯 울부짖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하늘이……! 하늘이 역시, 나의 손을 놓지 않은 것이야!”
감격에 젖은 중전은 그대로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곤 와아앙, 소리 내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질끈 입술을 악물었다.
“왕자, 이 어미에게 와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
“이 어미가 왕자에게 세상 제일 높은 자리를…… 꼭 선물해줄 것입니다!”
* * *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곧 중궁전 나인들이 들이닥칠 것인데 어쩌려고!”
봉희의 말에 소진은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밤, 이곳 밀실에 있는 여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낼 거래.”
“들었어. 하지만…… 집으로 보내주진 않을 거야.”
그렇게 대꾸하는 봉희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맞아. 대체 너와 이 여인들을 어디로 보내려는 건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무사히 집으로 돌려 보내주진 않을 사람들이지.”
“쓸모가 없어졌으니…… 죽이겠지? 죽일 것이야. 중전마마께서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우릴 죽일 것이라고 했어.”
봉희가 파르르 떨며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의 울음을 시작으로 밀실 안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갇혀 있던 모든 여인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진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을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살아서 나갈 수 있어요.”
“……!”
“그리고 식솔들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약속할게요.”
그 말에 봉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진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나가. 우리는 이미 글렀어. 너 여기에 있다간 우리와 함께 죽을 것이야!”
하지만 소진은 힘차게 도리질했다.
“아니. 죽지 않아.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니까.”
그러곤 내려왔던 돌계단을 슬쩍 올려다보며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아직 밖이 잠잠한 것을 보니, 서둘러 나가 세자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줘야 했다.
이곳에 더 지체했다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밖에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어요.”
“저, 저하께서……?!”
궐 안,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방관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식솔들마저 모두 저들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자가 기다리고 있다니.
꺼져가던 촛불에 다시 불을 밝히듯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밝아지기 시작했다.
“참입니까? 우릴…… 구해주려는 궐 안의 세력이 있습니까?”
“예.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지금 제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저하께 이 모든 사실을 알려……!”
그때였다.
계단 위, 밀실 입구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