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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중전의 시대는 끝입니다. (91/125)

91. 중전의 시대는 끝입니다.

2021.08.13.

‘어떡하지.’

헌은 당황해하며 병풍 뒤쪽을 급히 바라봤다.

“세자, 이 할미입니다.”

“예, 예. 들어오십시오.”

병풍 뒤의 소진이 얼마나 놀랐을지, 헌은 걱정이 돼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동궁전의 문이 열리고 대비가 조금 지친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납시셨사옵니까, 할마마마.”

그러다 헌의 차림새를 보고는 대비가 의아하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 밤에…… 어디 가십니까?”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아, 호위대장과 활이라도 쏠까 하여서.”

“이 밤에요……? 활이라니. 하하하, 우리 세자는 아직 힘이 넘치나 봅니다.”

대비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으려 하자, 헌이 난감하다는 듯이 서성거렸다.

이내 자리에 앉으려던 대비가 치맛자락을 쥐며 다시 일어났다.

“지금 활을 쏘러 가시려고요?”

“예……. 송구하옵니다, 할마마마. 호위대장과 다른 호위무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헌의 말에 알겠다는 듯이 대비가 웃으며 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병풍 뒤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풍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비와 헌이 놀란 얼굴로 병풍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소진이 움직이다 병풍을 친 모양이었다.

긴장감 넘치는 정적이 흐르고 헌이 무어라, 수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창문을 이리 활짝 열어두시면 고뿔에 걸립니다.”

대비가 인자한 웃음을 띤 채, 손수 활짝 열린 창을 닫아주었다.

“요즘 밤에는 바람이 꽤 차거든요.”

아무래도 대비는 병풍이 바람 때문에 흔들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면 이 할미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중전의 출산으로 궐이 밤새 시끄러울 텐데, 좋은 꿈 꾸시고요.”

그러곤 대비가 등을 돌렸고 헌이 그녀를 향해 반듯하게 허릴 숙여 보였다.

“할마마마께서도 평안한 밤 되시옵소서.”

동궁전 문이 다시 굳게 닫히고, 헌은 서둘러 병풍을 돌아보았다.

“낭자! 괜찮습니까?”

그러곤 병풍 쪽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는데.

“가시었습니까?”

성수청 궁녀복으로 환복한 소진이 병풍을 걷으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예. 가시었습니다.”

“휴우…….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러면서 소진이 크게 숨을 내쉬며 병풍 뒤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런 소진을 차림새를 살피던 헌의 동공이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 나, 낭자…….”

“예?”

“옷이…….”

“어떻습니까? 성수청 궁녀 같아요?”

당황해하는 헌과 달리 소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내, 헌이 피식 미소를 터뜨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소진의 옷고름을 움켜쥐었다.

“저, 저하……!”

놀란 소진이 뒤로 물러나며 헌의 손을 내려다보는데, 헌이 그런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옷고름은 나보고 매달라고?”

“……앗!”

갑작스러운 대비의 방문에 미처 옷고름을 맨다는 걸 까먹었는지, 소진의 앞섶이 훤하게 풀어 헤쳐져 있었다.

헌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당황했지만, 자신이 직접 그 옷고름을 매어주었다.

“되었다.”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소진의 붉게 달아오른 뺨 위에 소담히 내려앉았다.

“감, 감사하옵니다. 저, 저하.”

민망함에 소진의 양 뺨은 점점 더, 빨갛게 달떴다.

슬쩍, 헌이 매어준 옷고름을 내려다보니 저번에 앞치마 매듭을 지어주었던 것처럼 반듯하고 고왔다.

괜스레 헌과 시선을 맞추기가 부끄러워진 그녀는 사선으로 시선을 내리며 엷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헌이 그녀가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는 복면을 들었다.

“성수청 궁녀 옷이 이토록 빛이 나고 어여쁜 것인지 몰랐는데.”

“……아.”

“너무 예뻐 눈에 띌 것 같으니, 복면을 꼭 써야겠구나.”

촉촉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헌은 그녀의 양 귀에 복면 끈을 걸어주었다.

직접 복면을 씌워주는 헌을, 소진이 지그시 바라보았는데 헌과 시선이 닿았다.

“가려도 예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지막이 읊조리며 헌이 자신도 복면을 쓰려, 허리를 굽혔는데.

“제가 해드릴게요.”

소진이 생긋 웃으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의 복면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그에게 복면을 씌워주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

헌이 그런 소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의 귀 끝에 뜨겁게 스치는 소진의 손길을 느꼈다.

“됐다……!”

그의 양 귀에 복면 끈을 조심스럽게 걸곤 다시 손을 내렸는데, 헌이 복면을 쓴 상태로 허릴 굽혀 소진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

복면 사이로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얽혔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소진의 달아오른 양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입술에 닿는 온기가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해, 소진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직접 맞닿은 것도 아니었는데 숨결이 진득히 얽히는 것처럼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곧, 헌의 입술이 떨어지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소진의 고운 얼굴을 내려다봤다.

“더 하고 싶은데.”

그 말이 꼭 소진의 옷고름을 움켜쥐는 것 같아,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작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러자 헌이 근사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의 단단한 가슴팍을 짚고 있던 소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정말 네 말대로 중전이 출산이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 말에 소진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이 그녀를 향해 커다란 손을 척, 내밀어 보였고 소진이 그 손을 차분하게 바라봤다.

“자…… 이제 가볼까?”

“예, 저하.”

이내 소진은 그 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은 틈 없이 밀착되었다.

“겁먹지 말거라.”

“저하.”

“내가…… 널, 꼭 지켜주마.”

* * *

“중전마마께서 왕자를 출산하시면…… 우리에게 득이 될까요, 해가 될까요.”

“요즘 부원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요. 우릴 깔보는 경향이 있다고요. 그런데 중전이 아들이라도 덜컥 낳아보세요. 아주 우리 화론 파를 손에 넣고 우두머리 행세를 할 것입니다.”

민추환의 사가에 모인 대신들.

그 사이에는 영의정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앉아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들의 목소리는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의정이 입을 열었다.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

“어차피 중전의 시대는 끝입니다.”

그 말에 화론파 대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물론, 중전의 아들이 아니라도 헌을 대신해 세자에 앉힐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민추환의 손자이자 왕의 차자(次子)인 보은군.

중전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대신들은 슬그머니 민추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화론 파 사이에서도 은연중에 두 세력으로 나뉘고 있었으니까.

중전이 아들을 낳길 고대하는 세력, 그리고 보은군을 세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세력.

두 세력은 은근히 기 싸움을 펼치며 중전의 출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전은 우리 화론 파에게 독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이 자리에 중전의 아비인 부원군은 참석하지 않았다.

부원군과 친한 대신들이 그를 대신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영의정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신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우리 화론 파가 세력을 키워갈수록 뜻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있다는 것, 잘 압니다.”

그 말에 대신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그건 영의정의 말이 맞았다.

“수론 파가 아직 건재해 세자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이상, 우리가 지금은 몸집이 그들보다 크다고 할지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지요.”

“수론 파의 제거, 그리고 세자 교체.”

“……!”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로 통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영의정은 차분히 대신들을 돌아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중전의 왕자 생산 여부와 관계없이.”

“……!”

“세자를 대신할 제 일의 인물은 보은군 마마로 결정하고 계획을 준비할 것입니다.”

“하면 중전마마와 부원군이 반발할 텐데요. 이번 일로 화론 파가 완전 두 동강이 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영의정의 머릿속에 김 도령과 강 씨 부인의 용모화가 그려졌다.

곧, 영의정의 굳게 맞물렸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그것을 잠재울만한 것을 내가 쥐고 있다면요?”

그리고 그런 영의정을 올려다보는, 우참찬(右參贊) 조 씨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 * *

뒤에서 헌이 지켜보고 있었다.

소진은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중궁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성수청 궁녀복을 입은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중궁전의 문지방을 넘었다.

바들바들 떨어대는 소진과 달리, 호위대와 중궁전 궁녀 모두 소진을 아무 의심 없이 지나쳤다.

저 멀리, 성수청 궁녀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소진은 그쪽으로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

하지만 차마, 한 발도 내디디지 못했던 소진에게만큼은 금지된 공간이었던 곳.

소진은 평소보다 휑한 중궁전 안을 휘휘, 둘러보다 앞마당에 우르르 모여 있는 성수청 궁녀들 사이로 들어섰다.

“곧 치성을 드릴 제사를 지낼 것이니, 각자 자리를 지키고 서 있거라.”

국무당의 지시에 성수청 궁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헌이 가르쳐준 중궁전 전각 밑 공간으로 소진이 빠르게 들어섰다.

“하아…… 하아…….”

행여 들킬까, 소진의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전각 밑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소진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러곤 어둠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중궁전 주위를 빠르게 지나치는 성수청 궁녀와 궁인들의 발을 바라봤다.

‘중궁전 입구에서 일직선으로 쭉, 들어가다 보면 돌담이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철문이 있습니다. 그곳이 밀실이고 그 안에 여인들이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헌의 말대로 소진이 낮게 몸을 엎드린 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가 말한 공간이 눈에 보였다.

“저기다……!”

돌담 사이로 철문 하나가 보였다.

어두워 중궁전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에 비쳐 번쩍거리는 철문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든…… 저 안에 들어가 여인들이 있는지 확인해야만 해.’

소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바라봤다.

돌멩이를 찾아 부술까, 했지만 꼭 그 철문을 감시하는 듯 왔다 갔다 하는 궁녀들 때문에 그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때, 자물쇠를 세차게 노려보는 소진의 귓등에 상궁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중전마마 곧, 출산 임박하시었다. 먼저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여라.”

그 말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먼저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라고……?’

이것은 기회였다.

소진이 눈빛을 반짝이며 자물쇠 열쇠를 한 궁녀에게 건네는 상궁의 손을 보았다.

“내 지시가 떨어지거든 속히 안에 있는 문을 모두 열어야 한다.”

“예, 마마님.”

그러면서 밀실 안의 문을 열 열쇠 꾸러미를 궁녀가 받아들었다.

곧 돌아서는 상궁의 발이 보이고 소진이 바짝 그 궁녀 근처로 몸을 숙인 채, 다가갔다.

궁녀는 소진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달칵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삐거덕, 철문을 열고 그 궁녀는 주위를 삼엄히 살핀 채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진이 황급히 철문 앞으로 다가가,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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