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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저를 성수청 궁녀로 만들어주세요. (89/125)

89. 저를 성수청 궁녀로 만들어주세요.

2021.08.06.

산 아래를 터벅터벅, 내려오는 내내 두 사람은 달콤한 시선으로 서로를 힐끔 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짝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려보였다.

소진의 뒤를 따르고 있는 호위무사만 아니었다면, 벌써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을 테였다.

그러지 못해 아쉬워 헌은 괜스레 소진과 시선이라도 한 번 더, 맞추려 연신 소진을 바라봤다.

호위무사는 단지, 헌을 소진과 안면이 있는 양반가의 자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 자꾸 쳐다보시어요. 부끄럽게.”

그러자 소진이 자신의 뺨을 슬쩍 쓸어내리며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보고 싶으니까 보는 것이지.”

헌이 나지막이 말하며 소진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듣겠어요, 호위무사가.”

“한데 이젠 말해보시지요?”

“무엇을요?”

“무엇이 갖고 싶기에 저기까지 온 것인지.”

“아.”

“뭐…… 저잣거리에서는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 같은 것인가?”

헌의 말에 소진이 소맷자락에 넣어 두었던 노리개를 꺼내 그에게 보였다.

“이것이요.”

“이것은…… 여인네들의 노리개가 아닙니까?”

보통 여인네들이 즐겨 하는 노리개인 것 같은데, 이것을 어찌 여기까지 갖고 온 것인지.

헌은 소진이 내민 노리개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유심히 그것을 살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문양이 조금 특이한 것도 같았다.

헌의 시선이 소진이 지금 하고 있는 노리개 쪽으로 돌아갔다.

“뭔가 특이하지요?”

소진의 노리개와 손바닥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번갈아 쳐다보던 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독특한 문양이네요. 한데, 내 눈에는 낭자의 것이 더 예뻐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이건 너무…… 여인네들이 하는 노리개라고 하기에는 문양이 좀 거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용무늬 문양을 보고 하는 소리인 듯했다.

소진이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노리개를 다시 가져왔다.

“실은…… 저하께 말씀 못 드린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데요?”

“이 노리개, 김 도령 부인의 것입니다.”

그 말에 헌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그 여인의 노리개를 낭자가 들고 있는 것입니까.”

행여 그녀가 강 부인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인지.

그쪽 무리를 만나 곤욕을 치른 것은 아닐지, 그 순간 헌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의 낯빛을 보며 소진이 안심하라는 듯,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실 일 없었어요.”

“하면…….”

“우연히 그 부인이 저하의 무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여인이 흘린 것을 주웠거든요.”

“아, 그러셨습니까?”

“예. 대비마마를 뵙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이 노리개를 주워서 살펴보니 예사롭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해서 아파들을 만나, 노리개의 출처를 물은 것입니까?”

헌의 목소리가 점점 은밀해졌다.

그녀를 살피는 눈빛 또한,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한양에서 쉬이 보지 못한 물건이라. 혹시 이 노리개의 출처를 알아낸다면 그자들의 주 활동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느 지역의 것이라 합니까? 용 문양이 꽤,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값어치도 나가는 물건 같은데.”

“청국…….”

“……?”

“황실 여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 말에 헌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렸다.

청국 황실이라는 글자가 헌의 귓가에 예민하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소진 역시, 아파들에게 처음 이 노리개의 출처지를 들었을 때처럼 가슴이 다시금 출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황실 여인이 사용하는 것인데 어찌 그 부인이……?”

“안 그래도 저하께 의논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청국을 오가는 거상(巨商)일 것이다, 저하께서 그리 예측하셨었지요?”

“그랬지요.”

“한데 어쩌면 단순히 청국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돈을 모은 자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 같군요. 이 노리개를 보니…… 어쩌면 청국 황실과 연이 닿아있는 자일지도.”

그렇다면 중궁전 역시, 청국 황실과……?

하지만 그건 너무도 위험한 오해이자, 도무지 헌의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왕의 윤허 없이 청국 황실과 독단적으로 중궁전이 닿을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천한 출신의 중전이라 청국 황실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중전이 뭐가 예쁘다고 따로 연통을 은밀히 주고받을 것인가.

헌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소진에게 그 노리개를 다시 달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내가 갖고 있겠습니다, 이것은.”

“그러시겠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여인의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네에…….”

“자신의 부인이 납치되었으니, 김 도령의 눈이 돌아가도 한참 돌아갔을 것입니다. 괜히 이 노리개를 들고 있다, 그들의 눈에 띄면 낭자만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네요. 여기 있습니다, 저하.”

서둘러 그에게 노리개를 넘기며 소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속히 내려갑시다.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겠습니다.”

“네, 저하.”

“저 호위무사만 없었다면, 저잣거리에서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고 갈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저도 그것이 참, 아쉽습니다. 저하.”

서로를 향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 은은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 * *

“뭐……? 중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고?!”

느닷없이 시작된 중전의 산통에 궐 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미리 산실청에 입실해 있던 중전이 본격적으로 산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대전에 닿았다.

어질어질한 기운에 반듯하게 누워있던 왕은 기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소식을 전한 상선이 쭈뼛쭈뼛, 왕의 눈치를 살폈다.

“세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잠시 잠행을 나가셨사옵니다.”

“중전은.”

“산실청에 계시옵니다.”

“하아……. 산통이 시작되었다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응당 왕이라면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자식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을 반길 테였다.

하지만 중전의 산고에 왕은 도통, 웃음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의 주름진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그때, 대전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비마마, 납시셨나이다. 전하!”

“뫼시어라.”

아무래도 중궁전의 소식에 대비가 한달음에 달려온 것 같았다.

대전 문이 열리고, 왕만큼이나 착잡한 얼굴의 대비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마마…….”

“주상. 중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면서요?”

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그러자 대비가 들어선 대전 문 뒤에 이어서, 대전 상궁의 목소리가 따라 들어왔다.

“대비마마, 명하신 대로 국무당을 데리고 왔나이다.”

지금쯤, 한창 중궁전에서 중전의 무사 출산과 왕자 탄생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리고 있어야 할 국무당이었다.

국무당의 등장에 왕의 눈이 커졌다.

“어마마마, 어찌 국무당을.”

그러자 겁에 질린 국무당이 고개를 한껏 조아린 채, 대비의 뒤에 서서 무릎을 꿇었다.

“소…… 소신, 대비마마의 명을 받자와 대전에 들었나이다.”

대비가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거짓 없이 모두 토설하여야 할 것이야.”

“……하문하시옵소서, 마마.”

“중전의 뱃속에 든 아이가, 왕자인 것이냐. 공주인 것이냐.”

적나라한 대비의 물음에 국무당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의 앞날을 어찌 국무당 따위가 쉬이 예측할 수 있겠느냐만은, 이 순간만큼은 왕도 간절한 마음으로 국무당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왕자를 낳아서는 아니 된다.’

그러자, 대비가 크게 호통을 치며 다시금 소리쳤다.

“어허! 속히 대답을 올리지 못할까!”

“그것을 소, 소신이 어찌…….”

“오늘 세상에 나올 아이가 왕자냐, 딸이냐고 물었다.”

자비 없는 그녀의 음성에 국무당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쇤네, 알고 있는 그대로…… 모두 대비마마께 아뢰겠나이다.”

왕의 떨리는 시선도 국무당에게 닿아 있었다.

“중전마마께서는 왕자를 낳으실 운명이었습니다.”

“운명이었다?”

애매한 국무당의 말에 대비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삼일 뒤, 출산을 하시게 되면 분명 왕자님을 출산하실 수 있었습니다.”

“삼일 뒤?”

“해서 중전마마께서는 그날, 출산을 하시기 위해 기도도 드리며 산통을 꾹 참고 계시었나이다. 한데…… 중전마마께서 더는 참지 못하시고…….”

그 말에 대비의 고개가 국무당을 향해 휙, 돌아갔다.

“하면 정해진 그 날이 아니니, 오늘 출산을 하게 되면 공주를 낳게 된다는 말인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국무당의 말에 대비의 얼굴에 환한 빛이 스몄다.

하지만 국무당은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떨었다.

“하온데 그것이…….”

“뜸 들이지 말고 속히 고하지 못해?!”

“삼일 뒤가 확실히 왕자님을 출산하실 수 있는, 하늘의 기운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쇤네의 눈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보이지가 않다니?”

“공주님을 낳으실지, 왕자님을 낳으실지…… 명확하게 보이지가 않사옵니다.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 말에 왕이 머리를 감쌌다.

대비 역시, 찝찝한 국무당의 대답에 한숨이 푹 새어 나오고 말았다.

“모든 것이 결국, 하늘에 달렸단 말인가.”

대비는 산실청 쪽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지. 내가 직접 산실청 앞으로 가봐야겠다.”

* * *

한편, 영의정의 사가에 다다른 두 사람.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은 채,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중궁전에서 산통이 시작되면 우리 쪽 무사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날 모든 것을 처리하기 위해 중궁전이 움직임을 보일 수 있으니, 최대한 많은 인력을 중궁전에 붙여 감시할 것입니다.”

은밀한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헌을 바라봤다.

“혹, 그날…… 그 밀실의 문이 열릴 수도 있겠고요?”

“그렇지요. 하루라도 빨리, 궐에서 그 여인들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중궁전일 것입니다. 김 도령의 부인까지 잡혔으니 그 마음이 더욱, 조마조마하겠지.”

“예에…….”

오늘 아침, 영의정이 무사와 나누던 이야기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빈 중궁전에서 국무당과 성수청 궁녀들이 굿을 벌인다고 하였는데…….’

그녀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을 읽은 헌이 가만히 소진의 어깨를 쥐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저기, 저하.”

“예.”

“아무래도 저도 그날…… 입궐을 해서 중궁전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예……?”

뜻밖의 말에 헌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갔다.

“행여 만에 하나, 그날 정말 저하의 예상대로…… 중궁전에 갇혀 있는 봉희와 여인들이 밖으로 나가는 날이라면.”

“…….”

“어찌되었든 그 여인들을 무사히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들을 곱게 살려둘 자들이 아닙니다.”

“…….”

“중궁전의 비밀과 그들의 비리를 모두 알고 있는 그 여인들을 분명 모두, 죽여버릴 것이에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소진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정말 정면돌파로, 중궁전을 저하의 무사들이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동태를 살필 사람이 필요할 텐데…….”

“그건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헌이 불안한 눈빛으로 소진을 바라봤다.

“저하, 중전마마가 산실청에 입실하시면…… 중궁전에 성수청 궁녀들이 들어가 치성을 드린다고 하던데. 그것이 참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진이 헌의 옷깃을 슬쩍 쥐며, 간절한 얼굴로 눈빛을 반짝였다.

“하면 소인이 그날, 성수청 궁녀가 되어 중궁전에 들어가겠습니다.”

“낭자…….”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니, 봉희가 무사한 것인지만이라도 알고 싶어요.”

헌은 그런 그녀의 애원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신의 옷깃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끝을 떼어냈다.

그러곤 냉정한 어투로 입술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그것은 절대 안 된다.”

“저하…….”

“널 위험에 빠트리는 일에, 절대 허락을 해 줄 수 없다.”

“하오나 소인, 위험하지 않게 잘 할 수 있…….”

소진이 다시금 헌에게 부탁을 하던 그때, 윤현이 헐레벌떡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저하……, 중전마마께서 지금 출산 채비에 들어가셨다 하옵니다.”

“……!”

“속히 환궁하시어 작전을 개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한 윤현의 말에 소진이 다시금, 헌의 옷깃을 쥐었다.

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약속하겠습니다.”

“……소진아.”

“절대, 위험해지지 않겠습니다. 저하를 걸고 약속할게요.”

“……!”

“저를 성수청 궁녀로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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