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시작된 산통. (88/125)

88. 시작된 산통.

2021.08.02.

“계시오?”

소진과 숙자는 점포 주인이 가르쳐준 산 아래, 아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자 쉬고 있던 몇몇 아파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소진을 바라봤다.

“예약제라 먼저 선약을 잡은 순서대로 손님을 받고 있습니다만?”

아파 중 하나가 소진의 앞으로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곧 소진은 장옷을 걷으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고요?”

여전히 아파들은 소진을 경계의 눈초리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소진은 경계를 풀어도 좋다는 듯, 환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렇소. 이곳이 한양에서 제일 유명하고 재주 많은 아파들이 사는 동네라 하여 물어, 물어 왔소.”

그녀의 호의적인 말에 아파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진은 소맷자락에서 강 부인의 노리개를 꺼내, 그들의 앞에 내어놓았다.

“이 노리개와 똑같은 것으로 구입을 하고 싶은데…… 어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어서…….”

“노리개요?”

“한양 저잣거리의 점포는 죄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아파들도 잘 모르는 물건일 수도 있다고 점포 주인들이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아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들이 뭘 안다고!”

“그러게? 우리 같은 전문적인 아파와 그저 노상(路上)에 물건 파는 작자들이랑 같은 줄 알고?”

“어디 봅시다, 형님. 우리가 모르는 노리개가 어딨습니까?”

그제야 그들은 승부욕이 발동이 걸린 듯, 소진의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소진의 작전이 통한 모양이었다.

소진과 숙자도 그들 틈에 끼어, 노리개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제발 이곳에서는 이 노리개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으면…….’

* * *

“환궁하시는 대로 돌보아야 할 정사가 많으시지 않습니까.”

윤현은 근심이 가득한 헌의 얼굴을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산 아래를 내려오는 헌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많아도 철저하게 채비를 하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가는 금세 그 틈으로 빠져나갈 인물들이야.”

“한데, 저하. 강 씨 부인이 쉽사리 입을 열지는 않을 것입니다.”

“…….”

“저하의 뜻에 따르지도 않을 것이고요. 무척 악랄하고 독한 여인인 것 같사옵니다.”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헌의 말에 윤현이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헌의 낯빛은 어느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저 여인의 존재만으로도 중궁전을 몰락시킬 수 있지.”

“…….”

“행여 저곳에서 그 여인이 끝내 자결이라도 한다면 난, 그 여인의 시체를 끌고 중궁전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저하…….”

“어차피 김 도령과 저 여인의 자백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증좌는 중궁전 밀실에 갇힌 가엾은 백성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니.”

그 말을 하는 헌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고 그 순간, 그의 시선 끝에 익숙한 얼굴이 툭 걸렸다.

“아……?”

저 멀리, 웬 초가집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

허름한 차림의 여인들 사이에서 홀로 돋보이는 규수의 차림을 한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한소진……?”

보고 싶어, 헛것을 보는 것인가.

헌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비볐다.

그러자 윤현도 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하, 하하하! 역시, 대단합니다들!”

그곳에는 정말 소진이 손뼉을 짝짝짝, 치며 밝은 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소진이가 저길 왜.”

“아……? 아까 집에 계시었는데.”

대체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온 것인지.

그리고 저 여인들은 다 무엇인지.

헌은 반가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면 청국에서도 아주 귀한 여인들만 할 수 있는 노리개라 이것이죠?”

“그렇습니다, 아씨. 대체 이리 진귀한 노리개는 어디서 구하신 것입니까?”

“예?”

“흠……. 중전마마께서도 아마 갖기 어려운 물건일 텐데.”

“맞아. 이건 청국 황실 여인들 정도 되어야 갖는 것이라 들었는데.”

그 말에 소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노리개를 슬쩍 소맷자락 안으로 숨겼다.

‘대체…… 그 부인의 정체가 뭐야. 청국 황실 여인들의 노리개라니.’

“주웠소!”

“주웠다고요?”

“예. 실은 저잣거리에서 주웠는데. 너무 값비싼 물건인 것 같아 갖기에는 좀 그럴 것 같아서.”

“아…… 예.”

“주인이 애타게 찾을 것 같아서 포도청에 가져다주려는데. 아, 이것이 너무 예뻐 밤새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아니오?”

“그렇지요. 한양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이니.”

“해서 똑같은 거라도 사려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이라오.”

“그랬군요.”

대충 그녀의 변명이 아파들에게 먹힌 것 같았다.

숙자는 소진의 임기응변에 혀를 내두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한데 아파들의 말을 들으니,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어요. 한데 대체 누가 이걸 저잣거리에 흘렸대……?”

“청국 황실 여인들의 노리개가 한양 저잣거리에…….”

“아니면 가짜가 아닐까요, 형님?”

“가짜?”

“왜. 어설프게 누가 따라 만들어 팔려고 한 것이라든지.”

“그런 것 치고는 그 문양이 너무 정교하였잖아?”

아파들은 서책으로만 보았던 노리개를 실물로 보자 흥분한 듯,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소진은 이제, 알아내야 할 것을 알았으니 다 되었다는 얼굴로 숙자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곤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세 많이 졌소. 원하던 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큰 도움 받고 가오.”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소진이 돌아서자 아파들이 소리쳤다.

“그게 영, 갖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면 쇤네들에게 말하세요!”

“예?”

“똑같은 것은 못 구해도 가끔 청국으로 가는 아파들이 있으니, 부탁해서 비슷한 것이라도 사다 드리겠습니다!”

“예. 원래 여인네들이란 갖고 싶은 장신구가 있으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안 그럼 병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파들의 말에 소진도 어색하게 소리 내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꼭 그리하겠소……! 내 오늘 밤에도 이 노리개의 꿈을 꾼다면, 내일 다시 찾겠소. 하면 잘 계시어요!”

그리고 소진이 빙그르르 돌아, 장옷을 뒤집어썼는데.

눈앞에 누군가가 휙, 나타나 그녀의 앞을 턱 가로막고 섰다.

“뭐가 그리 갖고 싶어, 꿈에 나온다고 하느냐?”

“……?!”

“말만 하여라. 내가 사다 줄 테니.”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장옷을 걷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저……, 아니. 선비님!”

행여 아파들이 들을까, 헌을 선비라고 부르며 소진이 그의 팔을 그러쥐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우연처럼 만난 헌이 무척 반가웠다.

소진은 박꽃 같은 미소를 터뜨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맞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 산 중턱에, 김 도령의 부인이 잡혀 있거든.”

“예?!”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오겠습니까?”

그 말에 소진이 놀란 얼굴로 산 위를 힐끔 돌아보았다.

“여기 이리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무사들의 비밀 집결지입니까?”

“입구가 두 개거든. 우린 보통 마을이 없는 반대편 입구를 이용합니다. 해서 사람들 눈에 띌 일이 없지요. 너무 인적이 끊긴 산은 적들의 눈치를 살 수도 있어서 적당히 마을도 있고 인적도 드문 곳으로 골랐지요.”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강 씨 부인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여 한번 가볼까,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가고 싶으면 지금 같이 가고.”

“바쁘신 것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일 년 전, 그날 보았던 그 여인을 다시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벌써 쿵쾅거리는 것도 같았다.

소진은 볼을 잔뜩 부풀린 채로 산 중턱만 뚫어지라 바라봤다.

“한데 그 여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감?”

“기억이…… 여전히 안 나셔요? 그 여인과 김 도령을 쫓다, 당하신 사고인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해서 하도 답답해 대체 넌 누구냐고, 되레 그 여인에게 시답잖은 질문을 했지요.”

“괜찮습니다. 그깟 기억…… 이젠 중요치 않지요. 그 여인을 잡았으니 곧 김 도령도 잡힐 것입니다.”

소진은 애써 그를 위로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소인도 얼른 집으로 가봐야 해서요. 얼굴은 다음에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같이 내려갑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짓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 * *

“뭐……? 누, 누구?”

한편, 중궁전에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김 도령은,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살수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부인의 노리개를 갖고 있던 사람이 영의정의 여식이었습니다.”

“참이냐?”

“예. 그 노리개는 중전마마께서 부인께 선물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노리개지 않습니까. 분명, 그 노리개였습니다.”

영의정이란 말에 김 도령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모든 것이 착, 착 들어맞는구나.”

김 도령은 지난날, 산속 투전판에서 자신을 향해 세찬 눈빛으로 쏘아보며 훈계를 하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옷차림만 허름했던, 총기(聰氣)가 다분했던 여인의 눈동자.

그자가 그럼, 영의정의 여식이었단 말인가.

그날의 일을 떠올리던 김 도령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포도청에서 우리의 일에 관해 물었던 것도 영의정.”

“…….”

“부인을 납치한 것도…… 영의정?”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영의정의 여식이, 영의정에게 모든 것을 토설하고 함께 행수 어르신과 부인의 목을 옥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감히 궐을 운운하며 포도청에 시건방진 협박을 할 때부터 알아보았다.”

“…….”

“그날 이후로, 포도청에 얼씬도 안 한다는 것도 수상했지. 뒤가 구리니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야.”

“…….”

“또한, 어마어마한 권력 없이 뱃길과 도성문을 걸어 잠근다? 그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지.”

김 도령은 지금 자신들을 쫓고 있는 무리가 영의정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눈빛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찌 하올까요. 당장 영의정의 여식을 납치해, 부인을 무사히 놓아달라 거래라도 하올까요?”

살수가 한껏 굳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김 도령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그럴 것 없어.”

“…….”

“섣불리 영의정을 건드리는 것은 일을 그르치게 하는 지름길이야.”

“하면.”

“때를 기다리자. 지금 중전마마께서 출산을 앞두고 계시지 않으냐?”

“예.”

“영의정을 날려버릴 기회를 지금부터 생각해, 마마께서 순산하시고 난 뒤에 그들을 처단하여야 할 것 같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마마의 출산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명만 내려주십시오. 언제든 움직일 채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김 도령도 제 일 순위를 중전의 출산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의 뒤를 지금까지 봐준 제 세력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인 중전의 순산은 김 도령에게 역시,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 역시, 중궁전의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왕자를 낳는다면 김 도령 또한, 지금보다 더한 권세를 쥘 수 있을 것이었다.

“부디 왕자를 낳으십시오, 마마.” 

그렇게 읊조리며 김 도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제 소인이 마마의 앞길에 꽃잎을 깔아드리겠나이다.”

그러면서 김 도령은 황급히 살수를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영의정을 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이다. 하니, 영의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이 사실을 서둘러 중전마마께도 아뢰어 행여나 있을 불상사를 대비하라, 이르거라.”

“예, 행수 어르신.”

그때였다.

문밖에서 다른 살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수 어르신, 행수 어르신……!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궐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긴박한 목소리 사이로 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김 도령은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중전마마께서 산통이 시작되셨다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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