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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니까. (87/125)

87.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니까.

2021.07.30.

“잠시,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진은 윤현을 보자마자 황급히 그를 잡아 대문 밖으로 이끌었다.

“어떤…….”

그러자 숙자는 알아서 망을 보기 시작했고 소진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윤현에게 바짝 다가갔다.

“궐 문지기가 그 부인을 안다고 합니다. 일여 년 동안 중궁전을 오간 여인이라고 합니다.”

“아?”

“저희 아버지께서 입수한 정보니 정확할 것입니다. 아버지 쪽에서 궐 문지기를 포섭하기 전에, 무사님께서 저하께 아뢰어 먼저 그 문지기를 빼돌릴 수 있도록 하셔요.”

소진의 은밀한 그 말에 윤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런 중요한 것을, 더군다나 영의정이 먼저 알아낸 정보를 이렇게 말을 해주다니.

영의정이 알게 된다면 소진은 크게 혼날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인 영의정에게도 아주 요긴하게 쓰일 정보를 이렇게 세자에게 먼저 알려주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윤현은 자신의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하께…… 꼭 말씀 전하겠습니다. 한데, 영의정 대감께서 아시면 아씨께서 큰 곤욕을 치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그를 소진이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러니 무사님께서 세자 저하께 잘 전달하시어 일을 잘 갈무리 해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저, 집에서 쫓겨납니다.”

윤현의 염려와 달리 소진은 밝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그는 그녀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 저하께서 전해달라 하시었습니다. 김 도령의 부인을 어제 포박했다는 소식입니다.”

윤현이 직접 소진에게 헌의 서찰을 내밀었다.

그녀는 행여 누가 볼 새라 서찰을 황급히 소맷자락에 숨겨 넣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하면 얼른 가보세요. 문지기는 꼭 제 아버지가 포섭하기 전에 저하께서 숨겨놓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씨.”

그렇게 갓을 깊게 눌러쓰고서 서둘러 등을 돌리는 윤현.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 아버지의 정보를 윤현에게 일러주었지만 실은 그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씨……. 괜찮을까요?”

“응?”

“대감마님께서 아시면…….”

숙자의 말에 소진의 가슴이 더욱 불편해졌다.

며칠 전, 영의정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뒤라 더 마음이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용서하셔요. 이번 일만큼은 아버지보다 저하께서 먼저 해결하셔야만 하거든요. 그래야…… 봉희를 무사히 구할 수 있어요.’

두 손을 바짝 모은 채, 윤현이 무사히 궐로 가 그 소식을 전하길.

그리고 영의정보다 먼저, 그 문지기를 손에 넣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아씨께서 그렇게 전하셨습니다.”

강 씨 부인을 포박해 둔 비밀 장소로 잠행을 나가는 길.

헌은 윤현에게 소진이 알려주었던 정보를 전해 들으며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그의 낯빛이 점점 굳어지더니, 이내 헌은 걸음을 문득 멈추었다.

영의정 사가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려 그곳을 아련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것을 윤현에게 전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아비를 향한 죄책감에 얼마나 그 여린 마음이 상처를 입고 있을지.

헌은 그녀 생각에 울컥,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끝내 아버지와 척을 지려 하는 것이냐…….”

자신에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 무척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헌의 마음도 불편했다.

자신 때문에 부녀 사이가 척을 지게 되지는 않을까.

그는 소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불쑥 일었다.

그러다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그리고 태생을 원망하게 되었다.

감쳐 물은 입술은 하얗게 질려갔다.

“내가 네 아비에게까지 떳떳한 사람이었다면.”

“…….”

“내 출생이 적어도 보은군과 비슷하기라도 하였더라면, 네 아버지는 나를 세자로 받아들였을까.”

“저하…….”

슬픔이 짙게 깔린 그의 혼잣말에 윤현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소진을 더,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서주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헌은 이번 일을 제 손으로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지금 당장, 문지기를 포섭하여라. 그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게.”

“…….”

“그리고 그 문지기를 데려간 무리가 우리라는 것이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리에 포섭하여야 할 것이다.”

“예, 저하.”

소진이 영의정과 끝내 등을 지는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자신이 지금 영의정과 척을 지어야만 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영의정의 마음을 자신 쪽으로 돌려놓으리라 가슴에 되새겼다.

소진이 이런 일로 영의정을 배신하는 일을 하게 하지 않으리라고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생각했다.

헌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너울 뒤로 헌의 차갑게 굳은 얼굴이 언뜻언뜻 비쳤다.

곧 두 사람은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비밀 장소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헌의 호위대가 그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고개를 조아려, 그를 맞았다.

“오시었나이까.”

“그 여인은.”

“안에 있습니다. 김 도령과 자신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무사의 말에 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 씨 부인이 결박된 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모진 고문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밧줄에 묶여 있었다.

“고개를 들라.”

높낮이 없는 음성이 그녀의 고개 끝을 치켜세웠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강 씨 부인의 눈빛만 큼은 여전히 거셌다.

헌을 집어삼킬 기세로 그녀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우두머리인 것이냐?”

그러자 헌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우두머리라…….”

강 씨 부인은 제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감히 왕세자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였다.

헌이 그녀에게 한 걸음 바짝, 다가갔다.

그가 너울을 들어 올리며 상체를 숙이고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번, 김 도령이 버리고 간 사가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었다.

하지만 일 년여 전, 풍등제에서 이 여인의 뒤를 쫓았다는 소진의 말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참 말없이, 강 씨 부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살피던 그가 입술을 뗐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 여인이었기에, 그녀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헌의 질문에 강 씨 부인은 분주히 헌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가 헌의 눈과 코와 입을 유심히 훑어 내렸다.

“그쪽이 누군데.”

“…….”

“대체 누구기에 감히 무고한 자를 이리 납치해, 못살게 군단 말인가!”

움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강 씨 부인의 고함에 헌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정말, 자신을 모른다는 어투였다.

“그러게……. 대체 누구일까.”

낮게 읊조리던 헌이 휙, 윤현을 돌아보았다.

“그자의 용모화를 가져오라.”

아무래도 김 도령의 얼굴을 강 씨 부인에게 직접 보일 요량이었다.

곧, 윤현이 김 도령의 용모화를 헌에게 내밀었고 헌은 무감한 얼굴로 그녀 앞에 용모화를 펼쳐 보였다.

그러자 이 용모화는 수도 없이 보았고,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녀의 조소에 헌도 비릿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백번을 물어도.”

“…….”

“너는 모른다고 대답을 할 테지.”

이 자와 무슨 사이냐고 윽박을 지르던 다른 무사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질문을 해오고 있는 헌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목덜미를 싸늘하게 움켜쥐는 듯한 냉기에 강 부인은 처음으로 주춤, 눈빛을 떨고 있었다.

“근데 그것 아느냐?”

“……무엇을 말이오.”

“나는 너에게 김 도령의 행방을 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

“또한, 너를 통해 그자의 은신처를 알아낼 생각도 없지.”

“하면…….”

금방이라도 검을 빼어들어 목을 쳐낼 것만 같은 그의 기세에 강 부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헌은 다시금 허리를 굽혀, 그녀의 턱끝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덫을 놓은 것이야.”

덫이라는 글자에 강 부인의 잇새가 황당한 듯 슬쩍 벌어졌다.

“너를 찾기 위해 김 도령이 한양 곳곳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겠지?”

“……!”

“어쩌면 너희가 뒷배로 두고 있는 중궁전으로 달려갔을 수도 있고.”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헌의 말에 그녀의 뺨은 당혹스러움으로 붉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중궁전이라는 단어가 나오리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그녀는 벌벌 떨었다.

“너희는 어차피, 한양 밖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해. 더욱이 너는 이곳을 살아서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왜 그런 줄 아느냐?”

“…….”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니까.”

그 말에 강 부인의 핏발 선 눈이 커지고 말았다.

“하니 잘 선택하여라.”

“……무, 무엇을 말, 말입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면책받고 싶다면 입을 열어야 할 것이야.”

“……!”

“김 도령의 은신처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다. 다만, 중궁전 밀실에 있는 여인들. 그 여인들을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그동안 너희가 얼마나 많은 여인을 그런 식으로 빼돌린 것인지. 그것만 네가 증언해주면 된다.”

헌은 그 말을 마친 뒤, 쥐고 있던 강 부인의 턱끝을 거칠게 놓으며 돌아섰다.

“이 여인이 마음을 굳힐 때까지, 물 한 방울도 먹이지 말거라. 또한.”

“…….”

“중궁전과 궐문, 그리고 애월루를 포함해 김 도령이 나타날 만한 장소 모두에 무사들을 배치해 놓도록 하라.”

“예, 저하.”

* * *

“아씨, 저 혼자 할 수 있다니까요?”

“미세하게 비슷한 건 여럿 있을 수 있어. 내가 직접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서둘러 가자꾸나.”

소진은 호위무사를 뒤에 대동한 채, 숙자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섰다.

장옷으로 얼굴을 단단히 여민 소진은 김 도령 부인의 노리개와 비슷한 것을 찾기 위해 점포를 샅샅이 살폈다.

호위무사는 그저, 소진이 숙자와 함께 장신구를 사러 온 모양이라 생각하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씨, 저기요……! 저쪽이 물 건너온 노리개들을 파는 곳입니다.”

“그래. 가보자.”

숙자가 가리킨 곳으로 가보니, 정말 흔히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문양의 장신구들이 놓아져 있었다.

“노리개 보시게요?”

점포 주인이 환한 얼굴로 소진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는 소맷자락에서 강 부인의 노리개를 꺼내 주인에게 내보였다.

“혹…… 이런 노리개는 어디서 만드는 건지 알 수 있소?”

점포 주인은 소진이 내민 노리개를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글쎄요. 반가의 규수들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기녀들이 찾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

“쇤네도 처음 보는 노리개입니다만?”

그 말에 소진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금 노리개를 소맷자락에 집어넣었다.

“예…….”

그러면서 눈앞에 쫙, 놓인 노리개들과 비녀를 꼼꼼히 살폈다.

“아마 저잣거리에서는 같은 것을 찾기 힘들 것인데, 아씨.”

“그렇겠지요?”

“어차피 여기 저잣거리에 내어놓고 파는 것들은 거의 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이라……. 아, 아니면 저 산 아래, 아파들 사는 마을에 직접 가보시는 것은요?”

그의 말에 소진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아파들이 사는 마을……?”

“예. 아파들은 그런 장신구들은 빠삭하게 알고 있을 것이니, 차라리 아파들을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숙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의 팔을 슬며시 쥐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아씨.”

“그러자. 고맙소. 많이 파시오.”

소진은 환하게 웃으며 다시금 장옷을 입었다.

그러곤 점포 주인이 가르쳐준 아파들이 사는 마을로 가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누군가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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