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김 도령의 부인.
2021.07.26.
“뭐라? 김 도령의 부인을 잡았다고?”
묵묵히 서책을 읽으며 침소에 들 채비를 하던 헌은 윤현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잡았다고?!”
“예. 지금 산속 밀실에 가둬두었습니다.”
“서찰 같은 것은? 김 도령에게 받은 답신이라든지 김 도령에게 전할 중요한 소식이 적힌 밀서라든지.”
평소 헌 답지 않게,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윤현이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김 도령의 거처는……!”
“아직 추궁 중이옵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갈 수는 없겠지. 내가 직접 심문을 하여야 하는데.”
강 부인을 직접 만나 묻고 싶은 것인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헌은 동궁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하, 지금은 밤이 깊어 잠행이 위험합니다.”
“그래. 손아귀에 넣었으니 애써 무리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헌이 우뚝, 멈춰서 윤현을 바라봤다.
밤이 깊어 사위가 어둑해졌지만 헌의 눈빛은 유난히 빛이 나고 있었다.
“강 부인이 잡혔으니 김 도령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제일 먼저 발칵 뒤집힐 곳은 중궁전 일지도.”
“이미 저잣거리 쪽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을지, 무사들을 풀어 감시해 놓으란 상태입니다. 당연히 애월루 쪽과 중궁전에도 사람을 붙여 놓았으니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잘하였다.”
“그리고 저번에 명하신 대로 관아에 무사들을 김 도령을 추포하라 명했던 자들로 위장시켜 보내, 동태를 살피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포도대장은 그 무사들을 추포했습니다. 김 도령은 애초에 관아에 잡히지도 않았고요.”
“역시……. 그랬단 말이지.”
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김 도령 패거리의 핵심 인물인 강 부인을 손에 넣었으니 이내, 김 도령과 중궁전의 비밀도 풀릴 것 같았다.
소진에게 이 사실을 얼른 알려주기 위해 헌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내일 이것을 한 규수에게 전해주거라.”
강 부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뻐할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 * *
-예, 쇤네가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알아보겠습니다.
침소복으로 갈아입은 소진은 낮에 애월루 앞에서 주웠던 강 부인의 노리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가진, 저잣거리에서 샀던 노리개들을 모조리 꺼내 비교해 보았다.
“여기, 이 문양이 너무 독특하단 말이지? 보통 한양 저잣거리에서 파는 것들이 아니야. 그렇다고 아파(牙婆)들이 들고 다니는 장신구도 아니란 말이지.”
사뭇 노리개를 내려다보는 소진의 표정이 진지했다.
노리개 수술 위에 새겨진 문양이 참으로 독특했다.
여기 노리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용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길을 끌었다.
“잘하면…… 이 노리개로 김 도령과 이 여인의 주 무대가 어디인지, 알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그 노리개를 잘 감싸 서랍 속에 넣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숙자에게 부탁해, 이 노리개와 비슷한 노리개를 파는 곳을 알아볼 참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소진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
“중궁전…… 김 도령…… 밀실, 그리고 봉희.”
그날 이후로 투전판을 벌이던 패거리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마 김 도령이 헌에게 쫓기는 신세니 패거리들 역시, 아마 한양 깊숙이에 숨어 몸을 사리고 있을 테였다.
뱃길과 산길마저 모두 헌의 호위대에 막혀 있으니 한양을 벗어나기는 힘들 테고.
대체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일까.
붉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애월루 쪽으로 걸어가던 강 부인의 모습을 몇 번이고 눈앞에 그려보는 소진.
그러다 일 년 전, 김 도령과 함께 서둘러 도망치던 그 여인의 얼굴도 그려보았다.
“대체 무엇을 하는 작자들이기에 그리 젊은 나이에 악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일까.”
혹시 자신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을는지.
내일, 헌을 마주하면 그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랄지, 아니면 태연한 척 굴 것인지.
그녀의 반응도 궁금했다.
또한, 헌이 뒤쫓았으니 김 도령과 강 부인은 헌의 얼굴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가 세자라는 것도 알고 있을까.
소진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부풀어가는 질문 덩어리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날 밤의 모든 기억을 갖고 있는 자신도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헌은 오죽할까, 문득 그가 걱정됐다.
“저하……. 힘드시겠지만, 그자들을 꼭 기억해 내주세요. 그날 밤 왜 저하께서 그자들의 뒤를 쫓았고, 그자들은 왜 저하를 그렇게 공격했는지.”
곧, 달포 뒤면 처음 헌과 마주했던 풍등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에 헌이 모든 기억을 되찾길 바라며 소진은 두 손을 모았다.
곧 노리개를 넣은 서랍을 힐끗, 바라보던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소진은 숙자에게 노리개를 건네주며 저잣거리를 나가 살피도록 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버지에게 들킬 위험이 있으니, 숙자 홀로 움직이게 했다.
그때, 영의정이 든 안채 안으로 그가 수족처럼 부리는 무사 대장이 휘적휘적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는 무슨 서찰 같은 것을 여러 장 쥐고 있는 채였다.
‘무슨 일이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안채를 향해 가는 무사를 바라보던 소진은 본능적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곤 안채에 들어서는 그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그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대감마님, 소인이옵니다.”
한편, 방 안에서는 영의정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왔느냐.”
“여기, 이것…….”
무사가 손에 쥔 서찰을 영의정에게 건넸다.
그것은 김 도령과 강 부인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화였다.
“둘은 부부 관계인 듯하옵고, 현재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옵니다.”
영의정은 강 부인의 용모화를 뚫어지라 내려다봤다.
“궐 문지기를 포섭해 물으니 거의 일 년 가까이 중궁전의 사람으로 궐을 오가던 여인이라 합니다.”
“……일 년이나?”
“예, 대감마님. 김 도령이라는 이 사내는 본 적이 없다고 하고요.”
“아무래도 궐이니 사내보다는 여인이 드나들기 수월하였겠지. 아주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다녔구나. 부부가 아주, 환상의 호흡을 펼친 것이지.”
“한데 말입니다. 포도청에 김 도령이 추포되었다는 소식에 웬 사내 둘이 나타나기는 했습니다만.”
그 말에 강 부인의 용모화만 한참 내려다보던 영의정의 고개가 세워졌다.
“딱히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그저 마을의 사라진 여인들의 식솔 중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포도청의 반응은?”
“당연히 그자들을 추포하였지요. 감히 협박죄로 관아를 농락했다는 이유로요.”
“그렇겠지. 그자들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부러 덫을 놓은 것이니. 그 포도청을 찾았다는 그자들을 더 조사하여라.”
“예, 대감마님.”
“그리고 혹시 모르니 궐 문지기들도 따로 빼돌려놓고. 우리가 그자들보다 한 발 더 앞서, 증좌를 잡아야 한다.”
“당장은 문지기를 빼돌리기는 어렵고, 때를 보아 문지기의 쉬는 날에 맞춰 따로 몸을 숨기고 있으라 하겠습니다.”
영의정은 강 부인의 용모화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러곤 느리게 고개를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무사를 바라보았다.
“중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지?”
“예. 산실청으로 입실할 채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날 국무당은.”
“중궁전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을 것이라 합니다.”
굿 행위를 일절 금지하는 궐 안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국무당과 성수청 궁녀들이 중궁전을 오가며 중전의 순산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기도한다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을까?”
“이미 치성을 드린 지 꽤 된 것 같았습니다. 야밤에 중궁전 쪽에서 굿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영의정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절레절레 도리질했다.
“왕자를 생산하면, 제 세상에 열릴 줄 알고 있겠지.”
“…….”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성싶으냐?”
그 말을 밖에서 모조리 듣고 있던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궐 문지기가…… 그 부인의 얼굴을 알고 있다?’
아버지인 영의정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헌에게 얼른 이 사실을 알려 영의정이 문지기를 손에 넣기 전에 헌이 먼저 가로채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안채에서 떨어지며 소진은 별채로 몸을 숨겼다.
-그날 국무당은.
-중궁전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을 것이라 합니다.
그때, 소진의 귓가에 영의정과 무사가 나누던 대화가 윙윙 울렸다.
“빈 중궁전에…… 국무당이 그곳에서 굿을 벌인다?”
무언가 묘안이 떠오른 듯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때, 대문이 삐걱 열리고 숙자와 함께 서찰을 든 윤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씨…….”
소진은 속히 윤현에게 다가갔다.
* * *
“성수청에서는 차질 없이 채비하고 있겠지?”
금방이라도 산통이 고조되며 출산을 할 것만 같아, 중전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삼일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국무당의 말에 중전은 반듯하게 자리에 누워 통증을 삼켜내고 있었다.
“예. 매일 밤, 성수청 궁녀들과 치성을 드리고 있다 하옵니다. 마마, 조금만 더 참으시옵소서.”“참아야지. 왕자만 생산할 수 있다면 반드시 참아내야지…….”
삼일 뒤, 축시.
그날, 하늘의 문이 열려 중전이 왕자를 생산할 수 있는 기운을 전해준다는 국무당의 말에 중전은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벌써 산실청에는 결계(結界)를 쳐, 악한 기운을 막아내고 있다 하옵니다, 마마.”
그때, 중궁전의 문이 열리고 궁녀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중전마마. 소인이옵니다……!”
다급한 궁녀의 목소리에 중전이 길게 호흡을 뱉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중전의 손과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상궁이 급히 들어서는 궁녀를 쏘아 보았다.
“강씨 부인께서……!”
강 부인의 소식에 중전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라지셨다고…….”
“뭐?!”
“혹, 중궁전에 연통이 닿은 것은 없느냐고 김 도령께서 직접 소인께 여쭈었나이다.”
김 도령이 직접 중궁전에 연통을 넣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긴박한 일이 아니면, 뭐든지 강씨 부인을 통해서만 연락을 취하곤 했는데.
중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등을 기대, 앉았다.
“소상히 말하거라. 강 부인이 왜 사라져!”
“어제까지만 해도 애월루에 와, 김 도령의 행방을 묻고는 했다는데…….”
“근데.”
“오늘 김 도령께서 강 부인이 전해주라던 서찰을 읽고 급히 청국행 배를 타기 위해, 강 부인의 은신처로 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옵니다.”
“뭐라……? 짐은!”
“옷가지의 짐 꾸러미는 그대로인데 몸만 없어졌다고 하시어서……. 혹, 중궁전에서 비호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하여 김 도령께서 직접 연통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중전은 산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신경을 쓰니, 잘 참고 있던 통증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아, 아윽……!”
“마마! 참으셔야 하옵니다!”
상궁이 급히 중전을 부축했다.
중전은 고통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내 부정을 탈까…… 내 피붙이들도 입궐치 말아 달라 당부한 마당에…….”
“…….”
“어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강씨 부인을 이곳으로 들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김 도령께 어찌 전할까요?”
“이곳에는 없으니 당장 강씨를 찾으라, 일러라. 아무래도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흐느끼듯 그 말을 뱉어낸 중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궁녀는 속히 김 도령에게 그녀의 말을 전하기 위해 중궁전을 뛰쳐나갔고 중전은 상궁에게 기대, 아픔을 삼켜냈다.
“누군가가 납치를 한 것이라면……?”
“마마, 우선 지금은 모든 것을 김 도령께 맡기고 마마께서는 출산에 만전을 가하셔야 하옵니다.”
“행여……. 만에 하나, 강씨가 입놀림을 잘못한다면?”
걱정은 더 큰 걱정을 낳고 있었다.
“자네는 곧장 궐 밖으로 나가 김 도령을 만나보아라.”
“예, 마마.”
“삼일이다. 삼일 뒤, 내 출산하는 날 모든 것을 갈무리 지을 수 있으니. 그때까지 반드시 강씨 부인을 찾아와야 할 것이다.”
“…….”
“행여 강 씨를 찾지 못한다면.”
중전의 짓씹은 입술은 점점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강 씨를 데려간 이의 멱살이라도 끌고 와야 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