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애월루, 그리고 강 씨 부인.
2021.07.23.
내내 평정심을 잃지 않던 소진이 처음으로 멈칫한 순간이었다.
“대비…… 마마.”
소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대비는 조금 전보다 더 확고한 음성으로 입술을 벌렸다.
“나는 한 규수가 세자의 배필로 딱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하오나 그것은…….”
“네 대답이 세자빈 간택전의 결과를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니, 편히 대답하거라.”
“…….”
“나는 그저 너의 생각이 궁금하여 묻는 것이니.”
덧붙인 대비의 말에 쿵쾅거리던 소진의 가슴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세자빈…….’
오늘 아침에도 그 때문에 아버지인 영의정과 실랑이가 있었다.
대비를 향했던 시선을 가만히 접으며 소진이 눈빛을 차분하게 했다.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그녀가 잠깐 대답을 고민했다.
그 순간에도 대비는 소진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소진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대비를 바라봤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검은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이 났다.
* * *
“경계를 더욱 강화하거라. 중전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예, 저하. 그리고 애월루도 삼엄하게 감시 중이오니 곧 원하시는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래. 참, 그리고 중궁전 밀실을 따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알아보았느냐.”
“예, 하오나 따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찾을 수는 없었사옵니다.”
윤현의 대답에 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들려온 그의 부정적인 대답에도 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통할 비밀 통로를 만드는 것은.”
“중궁전 담벼락 바로 아래에 있는 지하라 아무래도 은밀히 통로를 내는 것은 불가할 듯싶습니다.”
그 말에 헌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궁전의 궁녀를 첩자로 삼자니, 변수가 발생할 것 같아 불안하고.”
“…….”
“중전이 산실청에 입실해 출산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중궁전을 감시할 궁녀가 필요한데. 적당한 인물이 없을까.”
“궐 내의 궁녀를 매수해 볼까요?”
윤현의 물음에 헌이 도리질했다.
“그것 역시 불안하다. 언제 어느 때, 마음을 바꾸어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
“궁인만큼 믿을 수 없는 사람도 없어.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밴 이들이라.”
한참 고민하던 헌이 눈을 떠, 정면을 바라봤다.
지난날, 궁녀 복장을 한 채 마주했던 소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 규수가…… 궁녀로 변장하여 잠복하여 준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무속에 집착하는 중궁전이라 반드시 출산 날, 왕자 생산을 위해 국무당의 힘을 빌릴 것이었다.
신성한 기운을 위한다며 항상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그들이니 그날, 성수청 궁녀로 위장해 중궁전을 들락날락해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로 결심한 그였다.
이내 그 생각을 곧바로 접은 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차차, 알아보도록 하고. 윤현.”
“예, 저하.”
“내 자네를 근위대의 새 대장으로 임명할까 한다.”
“예……?”
“아바마마께서 관리하고 계시던 군사 인력을 재정비에 들어가도록 하라.”
“황송하옵니다, 세자 저하……!”
이제 헌은 왕세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왕을 대신하는 인물로 궐의 주춧돌이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지만 그만큼 그에게 권력이 생긴 것이었다.
헌은 윤현에게 궐 내의 왕이 관리하고 있던 근위대의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 세력까지 모두 자신이 흡수할 요량이었다.
중궁전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중전의 산통이 조금씩 시작된다고 했다.
중전이 산실청에 입성하게 된다면 밀실의 문이 열리게 될지 모르니 지금부터 그날을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중전이 왕자를 낳게 된다면 간신히 승기를 잡은 수론 파는 또다시 위기에 처할 것이니, 그것 역시 경계하고 있어야 했다.
“봄날이 머지않았구나.”
헌은 자신의 이마를 느른하게 쓸어 보이며 궐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궐 안의 여러 전각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 차가운 겨울이 조선에 불어닥칠 테였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에 애처롭게 붙은 낙엽을 바라보던 헌은 느리게 입술을 뗐다.
“원래 겨울이 시릴수록 이듬해 봄볕이 따뜻한 법이라 하였다.”
그렇게 말하던 헌의 시선이 멈춘 곳은 중궁전.
그는 뒷짐을 지고서는 느긋한 시선으로 중전이 머무는 전각을 내려다봤다.
“저 안에, 감히 아바마마의 눈을 속이고 그 구미호 같은 여인이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곧, 네가 감추고 있는 추악한 비밀을 세상에 낱낱이 공개하도록 하마.”
* * *
“하, 하하하……!”
소진이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대비는 목젖이 보이도록 소리 내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대비전 상궁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대비마마.”
“정말 대단한 아이야. 미색도 또한, 지혜도 모두 탐이 날 만큼 대단해.”
그렇게 읊조리던 대비는 웃음을 거두고 소진이 앉아 있던 방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곤 조금 전, 대비전을 나서기 전 그녀가 남기고 간 대답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솔직하게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솔직한 네 마음이 궁금하구나.
-세자빈이…….
-…….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
대비의 동공이 옅게 흔들렸다.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예, 대비마마.
-어째서냐? 나는 한 규수와 우리 세자께서 서로 좋은 감정을 품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입니다.
-그래서다?
-세자빈이 아니라 그저 저하의 사람으로 곁에 있고 싶습니다.
-……!
-소인의 대답이 대비마마께는 발칙한 수작으로 들리지도 모르겠사옵니다만.
-아.
-진심이옵니다. 솔직한 소인의 마음을 원하시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진솔한 대답을 올립니다. 소인은 세자빈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저하의 사람이 되고 싶사옵니다.
여러 번 뜯어보았지만,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소진이었다.
게다가 대비인 자신의 앞에서 세자빈이 아닌 세자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과감함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대비는 몇 번이고 소진의 총명한 눈빛을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그날 재간택 때, 한 규수를 습격하였던 무리. 아직 입을 다문 채 옥에 갇혀 있다지?”
“예, 대비마마.”
“지금 당장 세자에게 가, 전하거라.”
“하명하시옵소서, 마마.”
“더는 지체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대답을 기다려줄 아량을 베풀 필요도 없다.”
“…….”
“하니 지금 당장 그 무리에게 죗값을 치르도록 하여라. 모두 중죄 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사형에 처하도록 하라. 감히, 간택전에 참가한 규수를 건드린 자의 최후가 어찌 되는지 모두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전례에 없는 무거운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그들에게 필요 이상의 죗값을 받게 한다면 영의정도 소진의 간택 재참가를 더, 반대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었다.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걱정을 거둘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강력하게 처벌할 것이며, 호위에 더욱 신경을 써 영의정의 반발을 애초에 꺾을 셈이었다.
“세자, 한 규수의 간택전 참가만큼은 이 할미에게 맡겨주세요.”
* * *
“아씨, 대비마마께서 혼이라도 내셨습니까? 어째 표정이 들어갈 때보다 더 안 좋으세요?”
터덜터덜 궐을 나서는 소진의 낯은 어두웠다.
자신이 대비에게 올렸던 대답이 옳았을까, 연신 그녀는 자신의 대답을 듣던 대비의 표정을 살폈다.
환한 빛을 띠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을 훤히 다 보이지 않던 대비.
소진은 찬찬히 대비의 주름진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셔…….”
“대비마마요?”
“응? 아…… 어. 벌써 노을이 지려고 하는구나? 어머니께서 궁금해하시겠다, 속히 가자.”
소진은 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마에 올라탔다.
그러곤 긴장감에 잔뜩 굳어있던 팔과 어깨를 주무르며 잠시, 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대비 전에 들기 직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던 그가 생각나 히죽 웃음이 터졌다.
“아이참, 정말.”
대비를 뵙고 오던 길,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걱정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가마 밖으로 소진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슬쩍 열린 창문 틈새로 숙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뭘?”
소진이 황급히 미소를 거두며 정색했다.
“방금 저하를 떠올리신 게지요?”
“그럴 리가?”
“누굴 속이시려고. 아씨, 저하 떠올릴 때마다 매번 똑같은 표정 짓는 거 모르시죠?”
“같은 표정……?”
숙자의 말에 소진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숙자를 빤히 쳐다보자, 숙자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이렇게요.”
“그게 뭐야.”
“도통 눈웃음을 지을 줄 모르시던 분이, 이렇게 눈웃음을 짓는다고요.”
그 말에 소진은 멋쩍은 듯 뺨을 쓸어내리며 숙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너는 나만 보고 있니?”
“당연하죠. 그것이 제 할 일인 것을요?”
숙자의 너스레에 소진이 어이없다는 실소를 지으며 다시금 작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어?”
눈에 익은 듯한 붉은 치맛자락이 소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저 많고 많은 다홍빛의 치마 중의 하나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콕 박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을 활짝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소진의 시야에 들어온 한 여인의 뒷모습에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저 여인은……!’
때마침, 애월루 쪽으로 방향을 틀며 연신 주위를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에 소진은 확신을 가졌다.
-김 도령의 부인이라는 여인이다.
길게 너울을 늘어뜨린 채, 뒷모습을 보여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 애월루 앞에서 보았던 여인과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김 도령의 부인이라며 한껏 경계했던 헌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 여인.
바로 그 여인이었던 것.
“숙자야.”
“예?”
“잠시 가마를 멈출 수 있겠니?”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목소리는 위험하리만큼 은밀했다.
* * *
애월루 앞에는 붉은 치마를 입고 검은 너울을 길게 늘어뜨린 강 씨 부인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부인, 아직입니다. 어찌 오늘 또 방문하셨는지요.”
기녀는 자신이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경계했다.
“너무도 급한 일이라. 하……. 내 서찰이 서방님께 전해지기는 한 것이오?”
“어제 분명 은신처로 부인의 서찰을 전했다고 했습니다만.”
“한데 답신이 없었다?”
강 부인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알겠소…….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얼굴을 푹 숙이고서는 돌아섰다.
“내일 새벽…… 몰래 한양을 빠져나갈 배가 수척산 입구에 당도할 것인데……. 부디 그 서찰을 받아보셨어야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 부인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헌의 무사 무리가 소리 없이 강 부인을 낚아챘다.
“놓으……!”
순식간에 입에 재갈을 물리고서 숲속으로 그녀를 끌고 가버리는 헌의 무사들.
그리고 그 모습을 소진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그 여인이 떨어뜨린 듯한 노리개가 흙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소진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노리개를 주워들었다.
옥빛 노리개는 꽤 값이 나가는 물건처럼 보였다.
소진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노리개인 듯했다.
그것을 손아귀에 넣으며 소진은 여인이 사라진 풀숲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드디어 잡았어……!”
소진은 숙자에게 그 노리개를 슬쩍 건네며 발걸음을 옮겼다.
“숙자야. 이것이 어디서 팔고 있는 노리개인지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