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세자빈이 되어 보겠느냐?
2021.07.19.
“좀 천천히 가자꾸나. 웬 걸음이 그렇게 빠른 것이야.”
“아, 예. 저하…… 아, 아니. 이 내관.”
헌은 뒷짐을 진 채, 전혀 내관 같지 않은 모습으로 소진의 곁에 서서 걷고 있었다.
그러다 걸음을 재촉해 대비전으로 속히 가려는 김 내관을 다그쳤다.
그의 타박에 김 내관은 서두르던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러곤 일부러 인적이 드문 통로만 골라서 대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행여 누군가가 눈치라도 채지 않을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볼까 봐 겁이 납니다. 저하. 정말 저하 때문에 제 수명이 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헌이 안심하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안심하세요, 낭자.”
“…….”
“설마 왕세자가 내관 옷을 입고 궐을 돌아다닐 거라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다 자기가 생각해도 재미있는지, 다시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피식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상상도 못 할 행동을 왜 매번 하셔서 이리 소인의 심장을 철렁이게 하시어요?”
“그건 낭자도 마찬가지지요?”
“소인이 왜요?”
“간택장에 있어야 할 낭자가 궁녀 옷을 입고 중궁전 앞에 있었을 때.”
“아.”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압니까?”
그의 말에 이번에는 소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드리웠다.
“그건…… 뭐, 사정이 있어서 그리 하였지요.”
“나도 오늘은 급한 사정이 있어 이리 입은 것입니다?”
“급한 사정?”
“정인을 만나야 하는데, 그 거추장스러운 곤룡포 때문에 못 만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
“하니 그것을 벗어버리고 이걸 입어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지요. 나름 긴박했습니다?”
소진은 그런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터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다.
이내 헌은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소진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하……!”
흠칫 놀라며 그녀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누가 봅니다!”
“누가?”
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자 소진이 빨개진 얼굴로 앞서 걷는 김 내관을 힐끔거렸다.
“보면…… 어쩌려고…….”
그녀의 말에 헌은 근엄하게 김 내관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김 내관.”
“예, 예?!”
“눈 감고 걷거라.”
“예……?”
황당한 그의 명령에 김 내관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서고 말았다.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헌을 바라봤다.
“네가 매번 입버릇처럼 내게 그러지 않았더냐?”
“무, 무슨…….”
“너는 눈을 감고도 이 궐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그것은!”
“그러니 한번 해보아라. 내 그것이 허세인지 아닌지 오늘 내가 확인해봐야겠구나.”
그의 억지에 소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러다 다칩니다, 김 내관님.”
“그런가.”
소진은 재미있다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하면.”
“……?”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걷거라.”
헌이 슬쩍 허리를 굽혀 김 내관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뒤돌아보면 큰일이 날 줄 알아라.”
“예! 절대 보지 않겠습니다!”
“어허, 말꼬리가 길구나.”
“아…… 알겠소.”
“자, 출발.”
그의 명을 받든 김 내관은 정말 목이라도 부러진 사람처럼 빳빳하게 정면만 바라보고 걸었다.
김 내관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소진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면 됐지요?”
그러면서 헌이 소진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행여 그 모습을 누가 볼세라, 숙자가 소진과 헌의 뒤에 바짝 붙어 서서 그 모습을 몸으로 가렸다.
“저하도 참…….”
“아. 중궁전 밀실은 종일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헌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의 봉희 소식에 소진의 눈이 반짝였다.
“지켜보니 삼시 세끼 꼬박꼬박, 배곯지 않게 밥도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마 중궁전의 출산 일이 임박해져서 그전에는 저 밀실 문을 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면 출산 직후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출산 날, 밀실 문을 열 것 같습니다.”
“아?”
“해서 비밀 군사들을 모두 대기시키고 있습니다. 행여 일이 커질 것을 대비해서요.”
헌의 말에 소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출산 날이라면 아무래도 궐 안의 모든 시선이 중궁전이 아닌 산실청에 쏠릴 것이었다.
당연히 중전이 출산하는 날이니 모든 경비 인력도 산실청으로 향할 것 같았다.
그의 예리한 추측에 소진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면 중전마마의 출산 날이…… 어쩌면 결판을 지을 날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날, 중전이 아들을 낳게 된다면 궐에는 새바람이 불 것이었다.
요즘 중전과 사이가 좋지 않아 ‘중전마마께서 반드시 공주를 낳아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사는 영의정이었기에 중전이 왕자를 출산한다면, 영의정의 사가 역시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중전이 꼭꼭 감추고 있던 밀실의 문을 여는 날이 될 수도 있으니.
소진도 영의정과 마찬가지로 밤잠을 못 이룰 것 같았다.
한참 고심에 빠져 있느라, 그녀의 말수가 대번에 줄었다.
헌은 심각한 얼굴로 땅바닥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다,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자 소진의 고개가 헌을 향해 세워졌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잘 해결될 것이니.”
“예, 저하.”
“내가 있지 않습니까.”
“예……. 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때, 대비 전에 다다랐는지 김 내관의 걸음이 느려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대비전에 닿았다.
“다 왔네요.”
어쩐지 아쉬움이 물씬 들었다.
두 사람은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았다.
이제 이 통로를 벗어나면 대비전 궁인들 여럿이 왔다 갔다 할 것이라 함께 가기에는 조금 위험할 것이었다.
“하면…… 가보겠습니다. 데려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하.”
“…….”
“잠시나마 얼굴을 뵈어, 좋았습니다.”
소진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곤 김 내관과 함께 대비전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는데.
갑자기 헌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며 자신을 보게 했다.
“이거.”
“……!”
그때, 돌아선 소진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를 쏙, 집어넣는 헌.
놀란 소진은 제 입술 사이에 물린 딱딱한 무언가를 꾹 씹었다.
그러자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약과입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오물오물 약과를 씹었다.
“긴장될 때 단것을 먹으면 긴장감이 조금 해소된다고 하여서.”
“아……. 저하.”
“긴장하지 말고 할마마마와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안 그래도 대비를 독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는데.
헌이 이렇게 긴장을 풀어주니,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도 보드라운 곡선이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저하.”
어떤 말로도 이 고마움을, 그리고 그에게 받은 감동을 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오물오물 입안에 남은 약과를 모두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앞을 휙, 가로 막고 섰다.
“예?”
“약과 값을 주고 가셔야지요.”
“값…… 이요?”
뚱딴지같은 그 말에 소진은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지그시 눈매를 반으로 접으며 그녀를 향해 볼을 쑥 내밀었다.
톡, 톡.
그러다 뺨에 입술이라도 맞추어달라는 듯, 검지로 자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려 보이는 헌.
소진은 자신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비전 앞이라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그녀의 말에 헌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소진을 제 품 속에 가두었다.
“……!”
내관복의 풍성하게 늘어진 소맷자락 속에 그녀를 감추며 슬쩍 허리를 구부렸다.
완벽하게 가림막이 생긴 것이었다.
“이러면 되는 것이지.”
소진은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까치발을 들어 촉, 그의 뺨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되, 되었지요?”
입맞춤은 자신이 해놓고, 소진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오늘 잠시였지만 널 보아, 너무 좋았다.”
“저하.”
“또 보자꾸나.”
그러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슬며시 맞추고는 돌아섰다.
그가 생긋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며 멀어졌다.
소진은 그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에 숙자가 씩, 웃으며 소진의 팔짱을 꼈다.
“어디 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요?”
“응?”
“아주 행복해 죽겠다, 얼굴에 쓰여 있어요. 아씨.”
숙자의 말에 소진은 달아오른 자신의 뺨을 슬쩍 쓸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쓸데없는 소리. 속히 가자꾸나.”
* * *
“그래, 잘 왔다.”
대비는 절을 올린 뒤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소진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그녀를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던 대비가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영의정 대감도 함께 오면 좋았으련만.”
“예……. 아버지께서 급히 용무가 있으셔서요. 함께 오지 못해, 아쉽다고 송구하단 말씀 전해 달라 하시었습니다.”
“그래. 내가 선약도 없이 갑자기 부른 것이었으니.”
“예, 대비마마.”
소진은 좀처럼 얼굴을 들지 않았다.
함부로 대비를 바라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조심해야 한다고 어머니에게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비는 그런 소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연신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한 규수.”
“예?”
“얼굴을 들어 보거라.”
그녀의 명에 소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세웠다.
그러곤 대비를 똑바로 직시하였는데, 순간 소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가까이에서 본 대비의 눈빛은 희끗희끗 센 머리카락과 다르게 새까맣고 힘이 있었다.
“이리 생겼구나, 한 규수는.”
“예, 대비마마.”
“간택 때는 멀리서 잠깐 보았던지라, 이리 오밀조밀 얼굴을 살펴보지 못하였는데.”
“…….”
“참으로 영민하고 지혜로운 빛이 흐르는 고귀한 얼굴을 가졌구나.”
“황송하옵니다, 대비마마.”
가까이에서 본 소진은 대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감히 세자빈을 넘어 국모의 자리에 앉아도 손색없을 귀티 나는 미색을 가졌으며 눈동자는 영롱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대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웠다.
“재간택 때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하마.”
“예……? 대비마마께서 어찌 사과를…….”
“어찌 되었든 간택을 주관했고 궐의 제일 웃어른으로서 더욱이 경계하고 호위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
“그러지 못해 간택에 참여한 규수가 큰 화를 입을 뻔하였으니. 내 규수들과 세자를 볼 면목이 없구나.”
“아니옵니다. 감히 대비마마께서 소인께 사과할 일이 아니옵니다.”
“특히 한 규수, 그대에게는 더욱이 그렇구나.”
대비는 소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크지?”
“이미 잊었사옵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옵소서, 대비마마.”
“이미 잊었다? 그래선 안 되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큰일이 아니었느냐.”
“하지만 저하의 도움으로 이리 무사하지 않습니까?”
“…….”
“하면 된 것이옵니다. 지나간 날에 연연하는 것만큼 시각을 허비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래?”
“예. 하니 대비마마께서도 그 일은 마음에서 싹 잊으시옵소서.”
소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그러자 대비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한 규수, 가까이 오거라.”
그녀의 명에 소진이 무릎걸음으로 대비의 앞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이내 대비가 그녀의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하다,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규수.”
“예. 대비마마.”
소진이 대답하며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세자빈이 되어 보겠느냐?”
이내 들려온 대비의 물음에 소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