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이 내관만 믿겠소. (83/125)

83. 이 내관만 믿겠소.

2021.07.16.

다음 날, 소진의 입궐 명을 들은 영의정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진아. 잠깐 보자꾸나.”

하지만 지엄하신 대비전의 명이니 감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소진은 무슨 영문인지,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빼꼼 별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예, 아버지?”

“잠시만.”

화원을 바라보고 등지고 서 있던 영의정이 이쪽으로 와보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혹시나 헌과 자신의 관계를 눈치채고 부르는 것일까, 소진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예, 아버지……. 무슨 일로…….”

쉽사리 영의정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소진은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힐끗힐끗, 소진은 영의정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소진아.”

“예, 예?”

“너를 처음 간택 전에 보낼 때, 내가 했던 말. 생각나느냐?”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은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그의 안색만 살피고 있었다.

곧, 정면만 고집스럽게 바라보던 영의정이 지그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모처럼 누그러진 눈빛으로 영의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간택에서 반드시 떨어져야 한다는…… 말씀이요?”

소진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

“그런데 너는 재간택까지 올랐지. 해서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고.”

“그것은 아버지…….”

“대비전에서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예?”

대비마마가 자신을 불렀다는 말에 소진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택은 중단되었고, 굳이 자신의 아버지와 척을 지고 있는 대비전에서 자신을 부를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소진은 분주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때, 영의정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그러쥐었다.

“간택이 재개될 것 같구나.”

“아…….”

“하면 대비마마께서 따로 너를 지목해 불러들이는 연유를 너도 알 수 있겠지?”

“대비마마께서 저를 세자빈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지요?”

그 정도쯤은 소진도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영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네가 만약 세자빈이 되기 싫다고 한다면 나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네가 그 간택에서 떨어질 수 있게 만들 것이야.”

“아버지.”

“그러니 말만 하거라. 네가 말만 한다면…….”

꼭, 세자빈이 되기 싫다는 말을 하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소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응, 소진아?”

영의정이 다시금 그녀를 재촉하자, 소진은 확고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되고 싶다면요?”

“뭐?”

“소녀가 세자 저하의 빈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

“저를 세자빈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까, 아버지?”

“안 돼. 그것은 아니 되는 일이야……!”

절규하듯, 영의정이 소진을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냐는 듯 그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하실 것이 아니옵니까?”

소진은 영의정을 원망의 눈으로 응시했다.

젖어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영의정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차피 아버지의 마음대로 휘두를 제 인생.”

“……!”

“제 뜻은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면서 어찌 소녀의 마음을 묻는 것입니까?”

“소진아.”

“이렇게 제게 답을 강요하는 연유도 아버지의 마음 편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까?”

“너는 어찌 이리 이 아비의 속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냐.”

“…….”

“왜 매번 나와 다른 길을 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냔 말이다.”

영의정이 가슴을 몇 번이고 내려치며 소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진은 싸늘한 눈으로 영의정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소녀는 아버지가 나아가고 있는 그 길이.”

“…….”

“싫습니다.”

“뭐…… 라?”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한소진.”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말에 영의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진 그의 가슴 위로 허탈함과 허무함이 끝없이 쏟아졌다.

“어째서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아.”

“더 가지려고 더 빼앗으려고. 이 나라의 군주이신 전하의 존재 또한 부정하고.”

“……!”

“그 위에 서려 하시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하께서 이미 정해놓으신 국본(國本)인 왕세자 저하마저도 끌어 내리시려 하지 않습니까?”

“한소진……, 너.”

“아마 아버지께서는 이 조선을 손에 거머쥐시고도 만족하지 못해, 자신을 끝없이 벼랑으로 몰 것입니다. 소녀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걷고 싶지 않아요.”

처음으로 소진은 속에 담겨 있던 말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인 영의정의 길을 부정하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할 말을 잃은 듯 영의정은 빨개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진과 말없이 시선만 맞추었다.

곧, 영의정은 소진의 말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모두 맞다.”

“…….”

“하지만 나는 너도, 그리고 손에 쥔 모든 것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내가 탐욕스러워 보이고 한심하고 못나 보이겠지만.”

“…….”

“이것이 네 아비인 걸 어쩌겠느냐?”

“아버지.”

“입궐은 하여라. 대비마마의 뜻이니.”

“…….”

“간택이 재개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돌아서서 별채를 나서는 영의정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걸이가 무겁기만 했다.

소진 역시 편치 않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 그만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아주 신이 났구나, 늙은이가. 감히 한 규수를 대놓고 대비전으로 불러들여?”

배가 너무 불러, 이젠 앉을 힘도 없는 중전은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조소를 터뜨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중궁전 상궁은 애가 타는지 연거푸 한숨만 내쉬며 우물쭈물했다.

“저하께서도 이제 전하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실 것이옵고…….”

“…….”

“간택마저 이제 모두 대비마마의 소관이 되었으니, 세자빈으로 영의정의 여식이 간택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인데.”

“…….”

“그것으로도 모자라, 뱃길마저 모두 가로막혀 저 여인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지하에 갇혀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마마?”

상궁이 우는 소리를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자 중전이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우악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지금 제일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내 앞에서 징징거리느냐!”

“……송, 송구하옵니다. 중, 중전마마.”

“김 도령은.”

“연락 두절이옵니다.”

“강 부인은?”

“부인 또한, 연락이 닿지 않사옵니다. 아무래도 추포령이 내려진 뒤, 꼭꼭 숨어 있는 듯합니다.”

“그자들이 청국으로 무사히 떠나야 저 밀실에 처박혀 있는 것들을 얼른 궐에서 내보내 버릴 것인데!”

“하온데…… 궐문과 뱃길을 가로막은 세자 저하의 속셈이 무엇일까요?”

상궁은 또 호통을 들을까, 중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말로는 치안(治安)을 위한 경비 강화라고 하지만 시기가 너무…… 수상쩍지 않습니까?”

“…….”

“재간택이 무사히 갈무리되는 대로 여인들을 골라 곧장 출궁시키려 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었고. 갑자기 뱃길과 궐문까지 걸어 잠가버리시니…….”

“시끄럽다.”

“앗…….”

“지하에 있는 것들, 배곯지 않게 끼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지?”

“예, 중전마마.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기고 야참에 간식까지 주고 있습니다.”

“……영양에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저 밀실에 오래 있을수록 그것들의 건강이 미령해 질 수 있으니.”

“예. 마마.”

“아주 골칫덩이들이야……. 골칫덩이들이 되었어!”

중전은 입술을 세차게 악물며 주먹을 바짝 쥐었다.

그러다 살살 아려오는 복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산달이 임박해진 듯, 진통이 슬슬 오는 듯했다.

“더는 밀실에 그것들을 두고 있을 수 없어. 내가 출산하는 날, 아마 궐 안이 바빠져 경비가 허술해질 것이다.”

“예.”

“그 틈을 타, 내가 미리 말해 놓은 아이들 빼고는 모두 출궁시켜 강 부인에게 넘겨 버리거라. 그러려면, 무조건 강 부인이든 김 도령이든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출산일 전까지 내 앞에 데려와야 할 것이야.”

“아마 김 도령이 잡혔다, 포도청에서 허위 소문을 알려 놓은 상태라 이젠 감시의 눈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중전은 금방이라도 아이가 나올 것처럼 묵직해진 아랫배를 보듬으며 눈을 번뜩였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자.”

“…….”

“나는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반드시.”

“마마…….”

“해서 감히 나와 내 가문의 손을 놓으려 한 영의정을 내 앞에 꼭 무릎 꿇리고 말 것이야. 어차피 조선은 내 발아래에 있어. 하니 나는 아들을 낳는 순간, 영의정과 그의 여식부터 제일 먼저 부숴 놓을 것이다.”

점점 더 통증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중전은 길게 숨을 뱉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고, 그녀는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

“와……. 궐은 언제 와도 좋아요. 그쵸, 아씨!”

혼란스러운 소진의 마음도 모르고 숙자는 오랜만의 입궐에 방방 뛰었다.

“궐이 좋으니?”

“예. 아씨께서 얼른 세자빈이 되셔서 쇤네 궐에 살게 해주세요.”

“너……?”

숙자의 너스레에 소진이 밉지 않게 그녀를 흘겨보았다.

“한데 대감마님께서는 왜 같이 입궐하지 않으셨어요?”

“어? 아…… 그것이.”

“아침에 대감마님과 싸우셨지요?”

다 안다는 듯 숙자가 소진의 어깨를 콕, 콕 찔렀다.

영의정과 그렇게 한바탕 하고 난 뒤라, 소진은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아버지께 너무한 것은 아닐까.

상처받은 영의정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그녀는 괜히 돌부리만 툭, 툭 찼다.

“아버지와 싸우기는.”

“……뭐 대감마님께서 조금 엄하시고 무섭긴 하셔도 아씨 생각하는 마음은 조선에서 제일이세요.”

소진은 그렇게 말하는 숙자를 넌지시 돌아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아. 알지만……. 알고 있지만.”

“…….”

“휴우. 모르겠다. 속히 대비전으로 가자꾸나. 대비마마께서 기다리시겠다.”

그러곤 대비전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던 궁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궐문을 지나 제일 처음 보이는 전각 앞에서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다.

소진은 장옷을 더욱 여미며 주위를 살뜰히 경계했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소진의 등을 톡톡 찔렀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는데.

“누구……!”

헌이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숙여 소진과 시선을 바짝 맞추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한소진.”

“저하……?”

그렇게 말하는 헌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어머, 이 차림은…… 무엇입니까?”

소진은 황급히 장옷을 거두며 내관 차림을 한 헌을 바라봤다.

그의 위아래를 훑던 소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내관……?”

“어떻습니까? 잘 어울리지요?”

“저하……. 왜 이런 차림으로.”

하다하다, 이젠 왕세자가 내관 차림으로 나타나다니.

소진은 헌의 무궁무진한 변신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관 복장을 한 헌의 옆에는 진짜, 헌을 모시는 동궁 내관이 서 있었다.

이 민망한 상황을 어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진짜 내관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숙자는 이런 헌의 모습이 익숙한지 그저, 소진을 따라 웃어버렸다.

제법 잘 어울리는 내관 복장에 소진은 킥킥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낭자를 만나러 오는 길이 이리 험난합니다.”

“저하.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그저 키가 큰 내관이겠거니, 지나칠 겁니다. 이 옷을 입고 있는 날 세자라 생각하는 궁인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헌도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소진의 옆에 바짝 섰다.

“낭자께서 입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생각했지요.”

“……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낭자를 볼 수 있을까. 이 눈 많은 궐에서 낭자와 편안히 마주할 수 있을까.”

“해서 내관이 되신 겁니까?”

“뭐, 궁녀보다는 나으니까?”

헌의 말에 소진이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인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딱인 것 같습니다.”

“하면 오늘은 내가 낭자를 대비전까지 무사히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은 소진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진짜 내관에게 앞장서라는 듯 휘휘 고갯짓했다.

“자, 대비전으로 안내하거라.”

“예, 저하…….”

“씁. 오늘 내 이름은 무엇이라 하였느냐.”

“아……. 아, 알겠소. 이 내관.”

그 말에 소진이 장옷을 다시 뒤집어쓰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이 내관만 믿겠소?”

“예, 낭자.”

헌이 그런 소진을 향해 찡긋, 한쪽 눈을 깜빡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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