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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대리청정, 그리고 간택 재개. (82/125)

82. 대리청정, 그리고 간택 재개.

2021.07.12.

대리청정이라는 말에 영의정 무리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영, 영의정 대감…….”

생각지 못한 변수의 등장에 민추환은 급히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영의정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헌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한 대 크게 얻어맞은 얼굴로 영의정이 실소를 뱉어냈다.

왕은 그런 영의정과 헌을 번갈아 쳐다보다, 환호하는 수론 파 대신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어떻게…….”

“아니 대리청정이라니요……?”

우론 파 대신들이 하나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의정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대리청정을 거절할 명목이 없었기 때문에.

선위가 아닌 대리청정이라면 기꺼이 왕의 뜻에 따라야 했다.

왕에게 피치 못한 사정이 생겼다면 때에 따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전례가 종종 있었다.

왕의 자격을 세자에게 아예 넘겨버리는 것이 아닌, 잠시 왕이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만 정사를 돌보는 것이었기에 대리청정을 두고 대신들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다?’

굳게 말아 쥔 영의정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헌이 대리청정을 시작한다면 본격적으로 영의정과 맞설 것이며, 영의정이 마음대로 조선을 쥐락펴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탄탄대로였던 영의정의 앞길에 장애물이 생긴 것이며 제 뜻에 처음으로 강력하게 맞설 적수가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내고 등장한 꼴이었다.

잔뜩 기대했던 것만큼, 영의정의 가슴에 차오르는 실망감은 너무도 컸다.

“세자, 나의 뜻을 헤아려 주어 고맙다.”

느긋하게 그 말을 뱉어낸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들을 향해 외쳤다.

“과인은 최근 몸이 점점 더 미령해져 불가피하게 선위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소.”

“…….”

“해서 왕세자가 장성하였고 이제는 세자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어도 될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고 선위를 결정한 것이었소.”

“…….”

“한데 세자와 그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의 선위를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며칠간, 과인은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소. 아주 귀중하고 뜻깊은 시간이었지.”

“…….”

“볼품없고 정신마저 해이해진 왕이라, 그대들이 당연히 선위를 받아들이고 새 왕을 이 자리에 앉히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고 세자를 왕으로 앉힐 채비를 할 줄 알았는데. 등청까지 거부하며 강력히 반발하는 그대들의 모습에 나는 아직 내가 건재함을,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음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소.”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왕의 시선 끝에는 흙빛으로 변한 영의정의 모습이 걸렸다.

“특히 영의정.”

왕은 정확하게 그를 짚어내며 그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영의정과 왕은 서로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사이로 지독한 냉기가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내 이번에 그대에게 크게 감동하였소.”

“…….”

“나의 선위를 그 누구보다 아쉬워하고 서운해하던 그대의 모습에 내, 다시 이 자리에 설 힘을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황송……하옵니다, 전하.”

영의정의 눈동자에 핏발이 선명하게 섰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애써 참아내고 있는 그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져갔다.

헌 역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왕과 마주 보고 선, 영의정을 지그시 바라봤다.

헌의 눈동자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영의정의 모습이 밀려들자, 헌의 입가에 느른한 조소가 번졌다.

“해서 과인은 선위의 뜻을 번복하고 세자에게 당분간만 대리청정을 명할 것이오.”

“전하…….”

“그리고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동안, 과인은 속히 이 무너진 마음과 몸을 추슬러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전을 가할 것이오.”

철저히 헌이 설계한 그림이었다.

헌이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왕은 세자에게 물려줄 옥좌를 더욱 견고히 만들 것이며 헌 역시, 자신이 얻게 될 그 자리를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벽을 쌓을 것이었다.

그저 더 단단하고 화려한 옥좌를 만들기 위한 시간을 번 셈이라는 걸, 영의정은 잘 알았다.

‘젠장……. 당했구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세자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니, 영의정은 속이 끓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어 소자, 아바마마의 명성에 누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아바마마의 빈 자리를 이끌어 가고 있겠나이다. 속히 옥체 보존하시어 다시 이 자리에 서주십시오, 아바마마.”

세자는 더 이상, 난봉꾼에 호색한이라는 추문을 달고 사는 망나니가 아니었다.

문턱이 닳도록 기방을 넘나들며 기녀를 끼고 술을 퍼마시던 지난날 그의 모습이 진짜일까.

아니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며 강력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이것이 진짜일까.

영의정은 처음으로 헌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까딱하다가는 정말, 그의 손에 제 뜻이 어그러질 수도 있겠다는 위협감까지 받고 있었다.

“전하의 뜻을…… 받잡겠나이다.”

부들부들 떨던 영의정이 곧 무릎을 꿇어, 어명을 받들었고.

그 모습을 헌이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

“대리청정을……?”

크게 한 방을 날린 헌의 대리청정 소식은 대비전에도 닿았다.

대비는 크게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방금 상참 때, 대리청정의 뜻을 밝히셨고 저하 또한, 그 뜻을 받들었다 하옵니다.”

“내 간택이 중단되고 웃을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내 속이 뻥 뚫리는 소식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구나.”

소식을 전한 대비전 상궁도 반색하는 대비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예, 대비마마. 모처럼 반가운 소식입니다.”

“영의정은? 그 일그러지는 표정을 내가 직접 보았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쉽구나.”

“아니 그래도 영의정 대감께서는 대리청정 이야기를 듣자마자,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대비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보지 않아도 굳어가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몇 해는 묵었던 체증이 내려간 듯, 대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 제까짓 게 무슨 까닭으로 대리청정을 막아.”

“…….”

“주상께서 선위의 뜻을 처음 내보이셨을 때부터 감히 보은군과 한 규수의 혼담을 내세워 주상을 협박하였다지.”

“예, 대비마마.”

“꼴좋군. 원하던 혼담도 얻지 못했고 그렇게 막고 싶었던 세자의 정계(政界) 입성도 방해하지 못하였으니 그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꼬?”

호호호, 목을 젖혀가며 대비는 크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로 냉랭했던 대비전이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상궁은 기뻐하는 대비의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다, 고개를 조아렸다.

“당분간 보은군 마마의 혼담을 두고 화론 파 대신들이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적나라하게 그 검은 속내들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몸을 사려야지.”

“차라리 이때, 보은군 마마의 혼담을 서둘러 버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마?”

상궁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대비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대비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얼굴로 느리게 도리질했다.

다, 생각해둔 것이 있다는 듯 그녀는 천천히 손을 모아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아니지. 내가 보은군의 혼례에 기를 쓰고 손을 뻗치려 했던 연유는. 보은군 뒤에 서서 그 아이를 쥐락펴락하려는 우론 파 세력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였지.”

“…….”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우리 영민하신 세자께서 우론 파의 콧대를 모조리 꺾어 놓았으니. 지금은 할미가 우리 세자에게 선물을 주어야 할 때인 것 같구나.”

“선물이라…… 하시면.”

한때, 궐을 호령하던 대비의 기세는 건재했다.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거센 욕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간택을 재개할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한 규수를 세자의 반려로 앉혀 놓을 것이야.”

“하오나…… 간택 재개를 한다고 해도 재간택 때 그리 위험천만한 일을 겪었던 한 규수가 다시 참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아니.”

조심스러운 상궁의 말허리를 세차게 자르는 대비의 음성에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반드시 참가하게 할 것이야.”

“……어떻게.”

“내게 다 생각이 있다. 내일쯤, 한 규수를 대비전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여라.”

“예, 대비마마.”

***

집으로 돌아온 영의정은 곧장 소진의 행방부터 물었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은 얌전히 닫힌 별채 문을 힐끗 돌아보며, 근심 어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내 집안에만 있었습니다. 한데, 궐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흠.”

“대감의 안색이…… 영.”

“당했습니다.”

당했다는 영의정의 말에 최 씨 부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했다니요?”

영의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싸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고 최 씨 부인은 그런 영의정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 보는…… 표정이구나. 어쩐지 풀이 조금 꺾인 것 같기도 하고.’

“대감.”

최 씨 부인이 다시금 영의정을 불렀다.

그러자 얼이 나간 얼굴로 한참, 우두커니 서 있던 영의정이 겉옷을 벗으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세자가 각성한 모양입니다.”

“각성이요?”

“예전의 세자가 아니에요.”

“…….”

“오늘 세자에게 크게 얻어맞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영의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은 슬그머니 그의 겉옷을 받아들며 입술을 달싹였다.

“대감께서 예전에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세자 저하는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그래……. 그랬었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내 목을 옥죌지, 이제는 가늠이 되지 않소.”

“대감.”

한참 고민에 빠진 영의정을 최 씨 부인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영의정의 눈동자에는 야욕 대신 허망함이 그득했다.

“세자 저하를…… 대감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에 영의정의 턱 끝이 예민하게 세워졌다.

“뭐요?”

“잡히지 않을 이라면 차라리 곁에 두고…….”

“그건 아니 될 소리!”

“대감…….”

“내가 세자와 손을 잡는 순간, 대장 노릇을 하고 있던 나는 화론 파의 표적이 될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영민하고 지혜로우신 세자 저하와 함께한다면 둘로 나뉜 세력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로 모은다? 과연 그럴까.”

“…….”

“수론 파로 모두 흡수시킬 세자지. 또한, 세자가 내 손을 잡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영의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소진이를 볼모 삼아 곁에 앉혀두고 결국 내 목을 옥죄다, 눈엣가시였던 우리 가문을 멸문지화 시켜 버릴 것이지.”

“…….”

“그러다 우리 소진이는 폐비(廢妃)가 되어 궐에서 쫓겨나겠지. 그땐, 내가 지켜주고 싶어도 세자에게 모든 힘을 빼앗긴 뒤라 우리 소진이를 지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소진이가 무너지는 꼴을 내가 어찌 봐. 어찌 보라고…….”

이미 그 끔찍한 상상이 눈앞에 닥친 듯, 영의정은 미간을 구기며 고통스러워했다.

최 씨 부인은 그런 영의정의 팔을 가만히 쥐어 자신을 보게 했다.

“대감.”

“…….”

“우리 소진이를 정녕 소중히 여기십니까?”

“부인.”

“대감의 정치에 소진이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소진이의 앞날을 위하고 아끼고 있는 것입니까?”

그녀의 말에 영의정이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이 영의정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런 것이면 우리 이제 그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소진이의 앞날을 위해서만 애쓰면 아니 되겠습니까?”

***

“할마마마께서?”

“예, 저하. 아무래도 한 규수를 간택에 참여시켜 최종적으로 세자빈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윤현의 말에 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간택을 재개시킬 것이라…… 하였다고.”

“예.”

“하면 내일…… 한 규수가 입궐할 수도 있겠구나.”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내내 긴장하고 있던 헌의 마음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허망함에 일그러지던 영의정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자 헌은 다시, 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그는 탁 트인 궐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뒷짐을 지었다.

어둠이 서서히 궐을 잠식하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자 하나둘, 궐을 밝히는 불빛이 곳곳에 켜졌다.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던 헌의 눈동자에도 반짝이는 불빛이 박혔다.

“내가 내린 결정을 듣고 과연…… 한 규수는 무슨 생각을 할까.”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보은군 마마에게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저하의 마음을 확고하게 드러낸 것이니까요.”

“하지만…… 한 규수에게는 제 아버지의 한쪽 무릎을 꺾어 버린 적이 아니더냐.”

“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저하.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아닙니다.”

“영의정의 무릎을 모두 꿇리고 나서야 나는 한 규수를 곁에 둘 수 있을 것이다.”

“…….”

“끝내 영의정과의 마지막 싸움은 한 규수를 두고 벌여야 할 것 같구나.”

헌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윤현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마냥 기뻐하기만은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내일 한 규수가 입궐한다니 열일을 제쳐두고 만나러 가야겠다.”

“하오나 내일부터 당장 대리청정을 시작하실 것이라,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윤현의 말에 헌이 희미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허수아비를 동궁에 세워두고서라도 나는 한 규수를 만나러 갈 것이다. 보고 싶어 죽을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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