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은애합니다, 아주 많이요.
2021.07.09.
소진과 헤어진 헌은 곧장 무사들에게 애월루를 감시하라 이르고 환궁하였다.
곧장 동궁에서 곤룡포로 갈아입은 그는 윤현을 독대했다.
“그래, 알아보라 한 것은.”
근언함 헌의 음성에 윤현이 그에게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그 어느 때보다 동궁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궁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사옵니다.”
“그래? 하면 포도청에서는.”
“그곳 역시, 이상하리만큼 조용했습니다. 저하의 말씀대로 꼭, 저하의 반응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예상했다는 얼굴로 헌이 느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그의 얼굴 위로 붉은 노을이 드리웠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헌의 눈썹 사이에 짙은 내 천 자가 그려졌다.
“윤현.”
곧, 생각을 마친 듯 그가 반듯하게 고개를 세우며 윤현을 내려다보았다.
동궁 안의 묵직한 공기를 가르는 그의 음성에 잔뜩 힘이 실렸다.
“무사 몇을 변장시켜 포도청으로 보내거라. 나인 것처럼. 김 도령을 추포하라 협박을 한 무리인 것처럼.”
“예, 저하.”
“해서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그리고 중궁전에서도 과연 반응을 보일지. 소상히 살펴야겠다.”
“명, 받들겠나이다.”
윤현이 방을 나서고 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등청을 거부하며 감히 어명을 거부하고 있는 그자들에게 답을 내려주어야 할 때였다.
“대전으로 향할 것이다. 길을 잡거라.”
헌의 말에 궁인들이 모두 그의 뒤를 우르르 따랐다.
대전으로 향하는 그의 반듯한 어깨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꼭 전장에 뛰어드는 장군처럼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걸음걸이에 뒤에 늘어선 궁인들이 긴장했다.
헌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내자 상선이 기다렸다는 듯, 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세자 저하 드셨나이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자, 헌이 그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섰다.
“전하.”
몸이 안 좋은지, 반듯하게 누워 있던 왕은 헌의 등장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헌은 얼른 그에게로 가, 왕을 부축했다.
끙, 끙 앓는 소리가 그의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연신 흘렀다.
“그래. 무슨 일로…….”
“아바마마, 내일 영의정을 포함한 우론 파 대신들에게 편전에 들라 명을 내리십시오.”
“내일……?”
헌의 말에 왕이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편전에 들라 명을 내리는 것은 곧, 그들의 제안에 대답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소자, 잘 아옵니다.”
“하면 네가 내릴 답은 무엇인가.”
이제 믿을 사람이라고는 헌 밖에 없었기에 왕은 초조한 얼굴로 헌을 직시했다.
왕의 팔을 굳세게 잡고 있던 헌이 자신감에 찬 음성으로 입술을 벌렸다.
“소자에게는 한 규수와 소자의 입지 모두 거머쥘 수 있는 해답이 있습니다.”
***
집으로 돌아온 소진은 애월루를 급히 나서던 김 도령의 부인이라는 여인의 뒷모습을 연신 떠올렸다.
바람에 휘날리던 그녀의 붉은 치맛자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 그 여인이라고……?”
소진은 일 년 전, 자신이 보았던 그 여인의 뒷모습을 한참 헤집어 보았다.
그러다 그 여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아씨.”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숙자의 목소리에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곧 별채 문이 열리고 화난 얼굴의 최 씨 부인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어, 어머니…….”
그 뒤에서 숙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낮에 그렇게 민추환의 사가를 나선 것을 혼낼 요량인 것 같았다.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 어미는 도통 네 속을 모르겠구나!”
그렇게 소리치던 최 씨 부인은 별안간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자신을 때리기라도 하는 줄 알고 소진은 질끈 눈을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
그런데 소진은 예상 밖에, 제 손등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파르르 어깨를 떨며 눈을 떴다.
“어머……니?”
최 씨 부인이 소진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 보였다.
그러곤 굳게 닫힌 문 쪽을 힐끔거리며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숙자야, 지금 당장 회초리를 가지고 오도록 하여라!”
“예, 예! 마, 마님.”
황급히 숙자가 방 밖으로 나가고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겨졌다.
성난 목소리와 달리 최 씨 부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소진아.”
“어머니…….”
“밖에 아버지가 계신다. 그러니 조용히 이야기하자꾸나.”
“아…… 예.”
아무래도 밖에 영의정이 서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 보았다.”
최 씨 부인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곤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됐는지, 멍하니 앉아 있는 소진에게 내밀었다.
소진이 불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는데.
“아. 어머니…….”
차마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펼쳐 보지 않아도 소진은 잘 알기 때문에.
소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깊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부터 저하와 그런 사이였느냐.”
이것은 오늘 낮에, 헌이 숙자에게 건넸던 서찰이었다.
아무래도 이 서찰을 읽고 최 씨 부인이 묻는 것 같았다.
은밀하게 묻는 것을 보니 아직 영의정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까.
잠시 얼굴을 숙인 채, 고민하던 소진은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세웠다.
“……꽤 되었습니다.”
“소진아.”
그녀의 대답에 최 씨 부인은 허탈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소진은 자신을 믿어달라는 얼굴로 최 씨 부인의 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압니다.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그리고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시는지. 하지만 어머니…….”
“알면서 어찌 저하와 이런 관계를……. 아버지께서 아시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예. 잘 알아요. 그러니 숨겼던 것입니다.”
“하면 이 끝은.”
“…….”
“이 끝은 어찌 숨길 요량이었느냐?”
정곡을 찌르는 최 씨 부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소진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하지만 소진은 다시 입술에 힘을 주었다.
“숨기지 않을 것이었어요.”
“……뭐라?”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소진아,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야.”
다부진 그녀의 대답에 최 씨 부인은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하필 정을 쌓은 상대가 가문과 반(反)하는 세력의 왕세자라니.
이 사실을 영의정이 알게 된다면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아 최 씨 부인은 소진의 손을 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소진이 그녀의 앞에 반듯하게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소녀가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시켜 보겠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최 씨 부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들었다.
“세자 저하께서도 너와 같은 마음일 것이란 보장이 없질 않으냐.”
“아닙니다. 저하께서도 소녀와 같은 마음이어요.”
“…….”
“소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은애하십니다.”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 성싶으니?”
“소녀는 저하와 그 끝을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어라?”
“지금 이 순간, 함께 하고픈 이 마음만 안고 달려가는 것이어요.”
“그러다 저하의 마음이 바뀌면.”
“그래도 후회 없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소녀는 그분과 함께 있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요.”
소진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말에 최 씨 부인은 끓는 가슴으로 한숨을 뱉어냈다.
“너 혹시…… 세자 저하를 이용하여 세자빈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면.”
“아니요. 추호도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
“그분이 왕세자가 아니었어도. 만약 지금이라도 그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해도 소녀는 기꺼이 그분의 곁을 지킬 것이어요.”
잠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로 켜켜이 쌓였다.
최 씨 부인은 덩달아 젖어가는 소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녀는 정계(政界)에 대한 불같은 욕망을 지닌 영의정이 내내 불안했다.
결국,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에 최 씨 부인은 늘 불안과 고민 속에서 영의정과 살아야 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늘 욕망에 휩싸여 살아가는 영의정의 삶이 단 한 번도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지 않았던 최 씨 부인.
정말, 영의정은 가진 것을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고 더 큰 것을 쥐지 못해 분노하고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진이 세상에 태어났고.
영의정은 내내 어린 소진을 품에 안고서 ‘네가 아들이었으면.’ 하고 아쉬운 소리를 냈다.
그랬으면 자신의 뒤를 잇게 해, 한 가(家)를 더 탄탄하고 힘 있는 가문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영의정은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차라리, 사내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 주지 못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욕심에 못 이겨 자식의 인생까지 망칠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정말, 소진이 자라날수록 영의정은 자신의 예상대로 그녀를 자신의 정치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순리를 거스르고 다른 이를 왕으로 앉혀, 그의 배필로 소진을 앉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 씨 부인은 소진을 욕망의 소용돌이로 내치고 싶지 않았다.
소진 역시, 영의정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행복할 수 있다면.
소진이 남들처럼 평범하고 편안한 삶만 살 수 있다면.
늘 그렇게 바라왔던 최 씨 부인은 영의정을 닮지 않은 소진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순간의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
“닿지 못할 곳에 계신 분이라, 그저 한순간 일어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느냐.”
잔뜩 내려앉은 최 씨 부인의 음성 끝이 어쩐지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물음에 소진은 젖은 눈가를 야무지게 닦아내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단호하고도 확고한 소진의 대답에 최 씨 부인은 그제야 소진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방금 너의 대답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네가 져야 할 것이야.”
“……어머니.”
“행여 지금의 네 마음과 믿음의 끝이 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너의 몫이며.”
“…….”
“그로 인해 받게 될 상처와 눈물 또한, 누구도 대신 아파해줄 수 없는. 오롯이 너의 것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한다.”
최 씨 부인의 말에 소진의 입가에는 초승달을 닮은 보드라운 곡선이 걸렸다.
“실패한 연모에 따른 고통까지 안을 수 있을 만큼.”
“…….”
“그분을 은애합니다, 아주 많이요.”
***
다음 날, 편전에 모두 모인 대신들.
우론 파가 전한 뜻에 대한 대답을 내리겠다는 왕의 말에 등청을 거부하던 대신들이 편전을 찾은 것이었다.
“원하던 바를 이룰 것입니다, 대감.”
“미리 감축드립니다.”
왕과 헌이 당도하지 않은 편전에는 우론 파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미 왕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축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 중, 단연 영의정을 향한 대신들의 가증스런 아부는 넘쳐났다.
마치 국구(國舅)라도 된 마냥 그를 치켜세우며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대신들이 하나, 둘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수론 파는 그저 힘없이 도리질만 해댈 뿐이었다.
“저하께서…… 부디, 현명한 답을 가지고 오셨어야 할 텐데.”
수론 파 대신들은 죽을상을 하고서 얼른 왕과 헌이 편전에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편전 위로 상선의 곧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상 전하, 세자 저하 납시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반듯하게 정면을 보고 서서 왕과 헌을 맞이했다.
고개를 조아린 대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왕이 먼저 착석했고 그 앞에, 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겁(永劫)같은 침묵이 흐르고.
영의정이 느긋하게 고개를 치켜들어 헌을 바라보는 순간, 헌의 굳게 맞물렸던 입술이 벌어졌다.
“전하께서.”
“…….”
“선위의 명을 거두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우론 파 대신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스몄다.
끝내, 옥좌 대신 영의정을 선택한 모양이다 싶어 그들은 환호했다.
영의정 역시, 원하던 대답을 손아귀에 거머쥐었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당장 보은군과 소진을 혼인시킬 수는 없게 됐지만, 이것은 그저 시간 싸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위라는 급한 불부터 끄고 이제 차근차근 자신의 뜻대로 보은군을 왕세자 자리에 앉히고 그의 배필로 소진을 이어주면 될 일이었다.
보은군과 국혼을 치르는 소진의 모습을 상상하며 영의정이 막, 감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대신.”
“……?!”
반듯하게 정면을 보고 앉아 있던 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하셨습니다!”
대리청정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영의정을 비롯한 편전 안의 모든 대신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대, 대리청정……?”
놀란 영의정이 무어라 반박할 새도 없이 헌은 계단에서 내려와 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자, 아바마마의 지엄하신 명을 받잡겠나이다!”
그러자 쭈뼛 거리던 수론 파 대신들 역시 반색하며 헌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전하의 명을 받잡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