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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그날 밤의 여인. (80/125)

80. 그날 밤의 여인.

2021.07.05.

“활은 이렇게 손끝으로 잡고 어깨는 반듯하게 펴고.”

“예…… 이렇게요?”

활을 잡는 법부터 가르쳐주겠다며 헌이 소진 쪽으로 다가왔다.

왕실 사냥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평화로이 산새들이 지저귀고 사슴들이 이리저리 뛰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음 놓고 너울까지 벗어던진 채, 활쏘기에 몰두했다.

“예. 그리고 허리는 꼿꼿하게.”

“이렇게요?”

“조금 더 힘을 주어보십시오.”

“이렇……게요?”

헌이 힘을 주라는 대로 소진은 허리를 바짝 세웠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헌은 들고 있던 활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소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를 덥석 쥐는 헌.

“……!”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쑥, 소진의 얄따란 허리를 그러쥐었다.

“여기에 이렇게 힘을 주고.”

“아.”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헌이 그녀의 허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얇은 옷 아래로 그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흡.”

괜히 민망해진 소진은 빨개진 얼굴로 슬금슬금, 그에게서 떨어졌다.

“혼자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내 그녀는 헌이 가르쳐준 대로 자세를 고쳐 잡고 활을 움켜쥐었다.

독학으로 활쏘기를 배웠을 때보다 조금 더 안정된 자세로 과녁을 볼 수 있었다.

“후.”

길게 숨을 뱉어내며 소진은 활 끝에 집중했다.

팟.

그녀의 손에서 떠난 화살은 저 멀리 있는 과녁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아…….”

하지만 헌이 새로 가르쳐준 자세가 몸에 배지 않은 듯 화살은 과녁 근처에 다다라 그만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소진이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제법입니다, 낭자.”

“그동안 잘못된 자세로 활을 쥐었던 모양이에요.”

“저번에 얼핏 사가에서 화살을 당기고 있던 자세를 보긴 했는데. 그 자세로 오래 활을 당기면 허리에 무리가 갑니다.”

“그랬군요…….”

아쉬움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가 다시 활을 쥐었다.

그러곤 활활 의욕을 태우며 헌을 돌아보았다.

“한 번만 더 자세를 보여주세요, 저하.”

“예. 그러도록 하지요.”

지치지도 않는지, 소진은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기녀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활을 쥐는 모양새가 제법 씩씩하고 당차 보였다.

화살을 들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헌은 나지막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정말 알려주신 대로 자세를 잡으니 이 어깨 쪽이 훨씬 더 편안…… 아…….”

그러곤 반듯하게 과녁을 바라보고 서 있는 소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저하…….”

소진의 자그마한 몸이 그의 품에 쏙 안겼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헌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꼭 따뜻한 이불을 덮은 듯, 소진의 몸이 사르륵 녹는 것 같았다.

“같이 살면 좋겠다…….”

“예?”

“너와 함께하는 순간 내내,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저하…….”

“그럼 넓은 앞마당에 이런 과녁을 놓고 함께 활쏘기도 내내 하고.”

“…….”

“네가 좋아하는 서책도 방 한가득 꽉꽉 채워 밤새 너랑 손을 꼭 붙들고 책도 읽고. 네가 배우고 싶어하는 검술도 매일 아침마다 내가 가르쳐줄 텐데.”

그의 말에 소진도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헌의 손을 잡았다.

“같이 살면 되지요?”

“그래. 그러자. 그러자꾸나, 우리.”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의 어깨를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촉촉하게 젖은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그윽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검술도 활도 모두 저하께서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내가 가르쳐줄 것이야, 모두.”

그의 다정한 대답에 소진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쪽, 입술을 맞췄다.

이런 애정행각이 낯부끄럽기는 했지만, 소진도 그에게 표현해주고 싶었다.

헌은 지금껏 자신에게 끊임없이 마음을 표현해주었다.

이젠 자신도 그에게 그렇게 하려 했다.

헌이 은애한다며 마음을 드러내어 줄 때마다 소진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했으니까.

그에게도 그 행복을 전해주고 싶었다.

“낭자.”

빨개진 얼굴로 그의 품에서 벗어난 소진이 그의 손에 활을 쥐여주었다.

“그럼 해볼까요?”

활시위를 당기는 소진의 손 위로 헌의 손이 포개졌다.

“같이 해봅시다.”

다정하게 붙어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 쌍의 원앙이 유유히 날아갔다.

***

“저하, 다음번에는 활쏘기로 겨루어 보아요.”

“자신 있습니까?”

“예. 오늘부터 열심히 연습할 겁니다.”

“도전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왕실 사냥터를 나서 저잣거리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어쩐지 무거웠다.

저 멀리, 애월루가 보였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각이 다가온 것이었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만큼이나 둘의 아쉬움도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볼 수 있어요?”

소진이 애써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 속은 어쩐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거란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보은군과의 혼인을 강행한다면 꼼짝없이 소진은 헌과 생이별을 해야 할 터였다.

자신의 혼인을 두고 헌의 선위와 거래를 한다고 하였으니.

분명 머지않아 결판이 나고 말 것이었다.

어떤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소진은 헌이 조금 더 선위에 욕심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기, 저하…….”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소진이 힘겹게 운을 뗐다.

다정하게 맞잡은 두 사람의 손 위로 보드라운 바람이 스쳤다.

“예, 낭자.”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요…….”

헌에게는 계획이 있을까.

그는 선위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진의 뺨 위로 깊은 근심이 어렸다.

“전하께서 선위를…… 생각하고 계시다고.”

“아.”

“해서 제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반대하고 계셔서…… 저하께서 많이 난감하시지요?”

은근슬쩍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소진이 헌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우려와 달리 헌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그것 때문에 내내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던 것입니까?”

“아……. 예. 저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

“오히려 저의 말에 저하께서 부담을 갖지는 않으실지, 홀로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께서 저하와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않으시고.”

“…….”

“보은군 대감과 저의 혼인을…… 저하의 선위와 맞바꾸려 하신다고 하시던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소진의 입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헌의 말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걱정은 가실 줄을 몰랐다.

“낭자.”

그런 소진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헌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동자가 근심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낭자도…… 그리고 내 자리도.”

“…….”

“모두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믿어도 좋다는 듯 그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대의 아버지와 맞서 싸워야 하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 저하.”

“하니, 나를 한번 믿어 보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소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소담한 입술을 벌렸다.

“대신, 위험해지지 마세요.”

“낭자.”

“이제는 안 됩니다.”

“…….”

“저하께서 위험해지는 건…… 저도 못 봐요.”

제 속마음을 얘기하고 쑥스러운지 소진은 몸을 비비 꼬았다.

소진의 예쁜 걱정에 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웠다.

“좋다.”

헌의 혼잣말에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밝아져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습니다.”

“예?”

“지금껏 내관들과 윤현 말고 날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었거든.”

헌은 소진의 양 뺨을 보드랍게 감싸 쥐며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니 평생 걱정해주십시오, 내 곁에서.”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곧 선위 문제도 또한, 낭자의 혼인 문제도 모두 해결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하께서는 이미 계획이 있으셨군요?”

“있었지요. 하나, 그 계획대로 해도 될지…… 확신은 없었지.”

“…….”

“그런데 이제는 확신이 듭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저하.”

헌은 소진의 머리를 따뜻이 감싸 쥐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낭자에게 꼭 약속할 수 있는 건.”

“…….”

“그것이 어떤 길이든 내 옆에는 낭자가 있으리라는 것. 그건 꼭 약속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남아일언 중천금. 아시지요?”

“예, 알다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떨어졌다.

그러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두 사람이 애월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여기, 이것.”

웬 아녀자 하나가 애월루를 나서며 기녀에게 무언가를 건네고 있었다.

속삭이는 모양새가 제법 친해 보였다.

헌은 무심코 그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 알겠습니다. 부인.”

그저 이 애월루의 많고 많은 기녀 중 하나겠거니, 생각하며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는데.

“……?!”

무언가 떠오르는 얼굴 하나에 헌이 다시금 그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여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저잣거리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왜 그러시어요?”

그때, 소진이 헌을 따라 그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헌이 심각한 목소리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때 그 여인입니다”

“예?”

“……내가 그날 밤, 미행했다던 여인. 김 도령의 부인 말입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다시, 여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 여인이라면…… 소인이 그날 똑똑히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속히 발을 움직이는 여인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소진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고 말았다.

“그 부인이 기방에는 어찌.”

얼굴을 보일 듯 말 듯, 여인은 아슬아슬하게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저하, 그 여인이 확실합니까?”

“…….”

“소인이 방금 저 여인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소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헌을 바라봤다.

헌 역시, 멀어지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합니다. 그날 내가 쫓고 있던 여인이 김 도령의 부인 같다고 하셨지요?”

“예. 쪽을 진 머리며, 그자의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이 영락없는 아내였습니다.”

“그럼 저 여인이 김 도령의 부인입니다.”

“아.”

“내가 김 도령의 흔적을 뒤쫓다 확실하게 얼굴을 봐뒀거든.”

행여나 저 여인의 뒷모습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헌은 부들부들 떨며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진은 그런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바투 말아쥔 그의 주먹을 꼭 감쌌다.

“제가 확인하고 올까요?”

그녀의 말에 헌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낭자께서요?”

“아무래도 제가 얼굴을 보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날 스치듯 보았지만, 반가의 여식 같았습니다. 이리 기생집을 오갈 여인이 아닌 것 같은데.”

“…….”

“저하께서 보셨다는 김 도령의 부인과 제가 그날 본 여인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소진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추며 금방이라도 여인의 뒤를 쫓을 기세로 치맛자락을 바짝 쥐었다.

그러자 헌이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소진의 어깨를 감쌌다.

“기녀가 아니라 이곳에서 김 도령과 연통을 주고받는 중일 수도 있지요.”

“……아.”

“일 년 가까이 이 기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나입니다.”

“…….”

“만약 정말 애월루의 기녀였다면 저 얼굴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요. 또한, 반가의 여식 같았다고 하니 더더욱 기녀는 아닐 것입니다.”

헌은 눈을 반짝이며 소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그가 단호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 김 도령의 부인이 오가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어찌하시려고요?”

“어차피 김 도령의 발이 꽁꽁 묶인 상태라 한양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청국으로 향하는 배편도 모조리 내 손아귀에 넣어 두었으니. 이제 저 여인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무사들에게 일러 이곳을 감시하라 할 것입니다.”

“…….”

“하니 낭자께서는 이 일에 더 나서지 마십시오. 그때처럼 곤란을 겪으면 어쩌시려고요.”

“저하.”

“위험해지는 건, 나 하나면 족합니다. 낭자가 위험해지는 것,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헌은 저 멀리서 자신을 뒤따르며 호위하고 있던 윤현을 불렀다.

소진은 다시금 여인이 사리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빨간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걷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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