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한소진, 그 이름.
2021.07.02.
“거짓이다?”
“예, 대감마님. 김 도령이라는 자는 관아에 추포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한편, 영의정의 사가.
영의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사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는 연신 피식거리며 안채를 왔다 갔다 했다.
“추포된 적도 없는 자를 거짓으로 추포했다고 소문을 내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
“누구를 속이려 한 것일까, 대체 누구를…….”
영의정은 깊어진 눈으로 고심에 잠겼다.
그러다 날 선 시선으로 무사를 돌아보았다.
“인신매매는.”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서.”
“주로 산속 깊은 곳에서 투전판을 벌였고 거기에 참가한 투전꾼들이 처음에는 세간살이, 쌀, 이런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제 식솔까지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감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딴 짓을 벌였다?”
소소하게 돈을 벌려는 자들의 장난이 아닐 테였다.
이렇게 관아까지 매수해 판을 벌여 사람까지 사고팔았을 때는 분명, 뒤에서 모든 것을 봐주는 큰 세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의정은 최근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였던 대신들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그러다 영의정은 이런 의심을 처음 하게 된 연유를 떠올렸다.
“중궁전.”
마냥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봉희 댁과 닮은 궁녀라 치부하고 넘길 수 있었던 일인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던 것도.
백성들의 일이라면 그저 무관심하기만 하던 자신이 이 일에 이토록 관심을 두려는 것도.
모두 하늘이 자신에게 준 기회인 것만 같았다.
“제발 이 일이 단순히 끝날 일이 아니었으면 하구나.”
의미심장한 영의정의 말에 무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허공을 헤집는 그의 눈빛이 시퍼렇게 날이 섰다.
“예? 그게 무슨…….”
“내가 지금부터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것이니까.”
“…….”
“그러니 별 게 아닌 일이 아니라 되도록 아주 큰 일이었으면 한다. 이 일로 인해, 중궁전을 완전히 쳐내버릴 수 있을 만큼.”
영의정의 목울대를 긁고 흘러내린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잔인했다.
“그래야 내가 이 일을 파헤치는 재미를 보지 않겠느냐.”
***
“앗. 널뛰기를 하나 봅니다!”
저잣거리 한쪽에서 여인들이 줄을 지어 널뛰기하고 있었다.
생소한 그 모습에 헌의 시선이 그쪽에 연신 머물렀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아니요. 꼭 무슨 날이 아니라도 저렇게 여인들이 모여 그네뛰기도 하고 널뛰기도 하고 그런답니다.”
궁에서는 널을 뛰는 궁녀들이 없었기에 헌에게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너른 판자를 두고 양쪽 끝에 여인들이 서서 차례로 발을 구르며 올랐다, 내렸다 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어 보였다.
“낭자도 널뛰기 잘 하십니까?”
“뭐…… 단옷날이나 한가위 때 종종 널을 뛰어본 적은 있지만.”
소진은 그렇게 말하며 헌의 손을 슬쩍 잡아당겼다.
“구경해보실래요?”
“구경이요……?”
“어차피 이렇게 입어서 아무도 못 알아봐요. 가요, 우리.”
소진이 그를 잡아당겨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단옷날에 사내들은 모래판에서 씨름하고 여인들은 이렇게 널을 뛴답니다.”
“듣기만 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런 놀이를 한다는 것을…….”
“다음에 단옷날, 함께 저잣거리 구경을 해요. 먹을 거도 많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많답니다.”
싱긋 웃으며 소진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러자 헌도 널뛰는 여인들을 따라 시선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피식 웃었다.
“그럽시다. 널뛰기라는 것도 이리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 말에 소진이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치맛자락을 바짝 올려 허리끈으로 꽁꽁 묶었다.
“무엇을 하시려고요?”
널을 뛰는 여인들을 바라보던 헌이 소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무지게 치맛단을 싸맨 그녀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하, 제가 한번 해볼까요?”
“낭자께서요?”
“예. 대신 저하께서 제 손을 꼭 잡아 주셔야 합니다!”
그러곤 손을 잡아 달라는 듯 제 손을 내밀어 보이자, 헌이 소진의 하얀 손을 꼭 잡았다.
널을 뛰던 두 여인이 내려오고 소진이 다음 차례로 올라섰다.
“오랜만에 타보는 거라…… 떨려요.”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헌은 소진이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기녀와 정인인 듯했다.
아녀자들이 숙덕이며 선남선녀인 둘을 바라봤다.
곧 맞은 편의 여인이 무릎을 슬쩍 굽히며 발을 굴렀다.
쿵.
“……어어!”
그러자 소진의 몸이 휘청하며 위로 떠올랐다.
“낭자……!”
헌도 흠칫 놀라며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소진은 맞은 편의 여인과 주거니 받거니 널을 뛰다, 이내 적응한 듯 헌을 향해 손을 놓아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헌이 슬쩍 그녀의 손을 놓으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쿵, 쿵, 쿵.
소진은 환한 얼굴로 가볍게 널을 뛰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모습에 헌의 얼굴에도 미소가 스미고 있었다.
“저리 아이같이 웃는 모습도 참 예쁘구나.”
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서둘러 소맷자락을 뒤적였다.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화구통을 꺼내 헌은 속히 소진의 널을 뛰는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슥, 슥.
붓은 날개를 단 듯 그녀의 어여쁜 모습을 종이 위에 그리고 있었다.
화선지 위에 사르르 번지는 먹물처럼, 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갔다.
“너의 모든 순간을 영원히 담고 싶구나.”
***
“우리 건강을 위해 돌계단으로 가볼까요?”
한바탕 널뛰기를 한 헌과 소진은 왕실 사냥터를 가기 위해 나란히 산 입구 앞에 섰다.
그러자 저번과 달리 돌계단이 쭉 이어진 길이 나왔다.
소진은 입을 떡 벌린 채, 계단 맨 위를 바라봤다.
“이 돌계단을 오르자고요?”
“사람이 걷기만 하는 것보다 이렇게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몸에 더 좋다고 합니다.”
“예,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마침 비도 그쳤겠다, 어떻습니까?”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돌계단을 바라보던 소진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의 손을 슬며시 놓으면서 치맛자락을 사뿐히 쥐었다.
빙그르르 돌아 헌과 마주 본 소진은 자신의 너울을 가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어여쁘게 반짝이며 헌의 너울도 직접 걷어 주었다.
그녀의 모습에 헌도 몸을 움직여 반듯하게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하려고요?”
“그냥 오르면 재미가 없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소진이 헌의 손을 잡아끌었다.
“끝말을 이으며 한 계단씩 올라요, 우리.”
“끝말을 이으면서?”
그녀의 제안에 그의 눈도 동그래졌다.
“예. 맨 마지막 글자를 이어 말하며 한 계단씩 오르다가 막히는 사람은 멈추기.”
“이긴 사람은요?”
“세 계단씩 오르기! 어떻습니까? 힘도 안 들이고 금방 오를 것 같은데.”
“좋습니다. 대신 이 계단을 제일 먼저 다 오른 사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시다.”
헌의 말에 소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원이요?”
“예. 이기고픈 마음이 있어야 열심히 끝말을 이을 테니까.”
“좋아요. 무엇이든 들어주기, 입니다!”
소진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음…… 전무후무(前無後無)!”
먼저 끝말잇기를 시작한 소진.
헌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상……, 음. 상부상조(相扶相助).”
하나씩 글자를 대며 두 사람은 계단을 나란히 올랐다.
“조강지처(糟糠之妻).”
헌이 그렇게 말하자 소진이 주춤했다.
“처……, 처.”
생각이 나지 않는 듯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곤란한지 팽팽하던 미간도 구겨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지요? 하면 내가 이긴 것…….”
“잠시만요!”
소진은 자신을 두고 성큼성큼 세 계단을 오르는 헌을 덥석 잡았다.
“봐주는 것 없는데?”
그러자 헌이 어깨를 으쓱하며 소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첫판부터 이리 허무하게 지다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음 판은 무조건 이기면 될 일이었다.
꼭 이겨서 헌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 싶었다.
아직 그에게 말할 소원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우선 이기고 보자 싶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요.”
“음, 청렴결백(淸廉潔白).”
소진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니 헌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백복장엄(百福莊嚴).”
헌은 웃음을 꾹꾹 참으며 글자를 뱉어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소진은 열심히 다음 말을 생각해냈다.
그는 그런 소진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한으로 끝난 글자에 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소진의 입꼬리는 배시시 올라가고 있었다.
“한이요, 한.”
“…….”
“모르시겠지요? 그러면 이번엔 소인이 이겼습니……!”
그때였다.
소진이 성큼, 계단을 오르기 위해 걸음을 크게 내디뎠는데 헌이 그녀의 앞을 우뚝 막아섰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그의 모습에 소진이 말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한소진.”
“……예?”
그의 우직한 입술 사이로 소진의 이름 세글자가 담담히 흘렀다.
“한소진. 난 말했는데?”
한으로 시작하는 글자로 소진의 이름을 말한 헌.
예상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은 소진의 차례였기에 서둘러 그녀가 말을 이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린 듯했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습니다?”
“아니, 그것은 제 이름이지…… 단어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진이 헌의 옷자락을 바짝 움켜쥐며 말했다.
이내 헌은 그녀의 말에 올라섰던 계단을 다시 내려와 소진을 향해 몸을 슬쩍 돌렸다.
그러면서 슬며시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수평으로 맞췄다.
“맞는데?”
“한소진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은애하는 것의 이름.”
“……!”
“내가 틀렸습니까?”
그렇게 말하니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맞는 말이긴 하니 달리 우길 수 없었던 소진은 슬쩍 쥐었던 헌의 옷자락을 놓았다.
이상하게 뺨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제일 은애하는 것의 이름.’
아무렇지 않게 달곰한 눈빛으로 그 말을 하던 헌의 얼굴이 소진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곧 헌이 아래에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단숨에 계단을 모두 오르겠는데?”
“…….”
“자.”
헌이 커다란 손을 내밀며 이리 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제법 멀어진 거리에 소진은 한껏 고개를 젖혀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럼 거기서 다시 시작해요.”
그러면서 소진이 그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잡아당겼고 소진은 사뿐히 그의 곁에 다다랐다.
이내 한 계단에 나란히 마주 보고 서게 된 두 사람.
소진이 그와 손을 놓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부터 시작……!”
그러자 헌은 다시금 소진의 손을 휙 잡아당겨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쪽.
그의 온기가 그녀의 이마 위에 보드랍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