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그날 밤의 여인. (78/125)

78. 그날 밤의 여인.

2021.06.28.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라 그런지 괜스레 나란히 붙어 걷는 것도 어색하고 낯이 간지러웠다.

소진은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 연신 땅바닥만 걷고 있었다.

그리고 헌 역시 괜히 그녀의 눈치만 살피며 헛기침을 뱉어냈다.

“흠, 흠흠.”

그의 어색한 헛기침에 소진이 고개를 조금 들어 헌을 힐끔거렸다.

한 손은 우산을,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그러쥔 그는 빳빳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는 빗줄기가 거세 자꾸만 두 사람의 어깨가 젖어갔다.

헌은 소진의 젖은 어깨가 신경 쓰이는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제 어깨에 물기가 더욱 번져가고 있었지만, 헌은 개의치 않았다.

“저하.”

그때, 소진이 슬그머니 그를 불렀다.

빗소리를 가르며 들려오는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헌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수줍음이 가득한 소진의 얼굴이 소담하게 담겼다.

“예, 낭자.”

“우리…… 어디로 가는 것이어요?”

조심스럽게 그 물음을 던져놓고서 다시 수줍어진 그녀는 헌의 시선을 슬쩍, 회피했다.

헌은 티가 나게 부끄러워하는 소진의 모습에 그만 미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웃음에 소진이 다시 고개를 젖혀, 그를 바라봤다.

“왜 웃으시어요?”

“귀여워서.”

“흠, 흠흠.”

귀엽다는 말에 이번에는 그녀가 낮게 헛기침을 뱉어냈다.

그러다 소진은 흠뻑 젖은 헌의 어깨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젖었습니다, 저하. 이러다 고뿔에 걸리시면 어쩌시려고.”

“낭자가 걸리는 것보다 내가 걸리는 것이 백번이고 낫습니다.”

“아이참……. 저하께서 고뿔에 걸리시면 소인의 마음이 아프잖습니까.”

다정한 그의 말에 소진이 볼을 붉히며 슬그머니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 찔렀다.

헌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내가 아프면…… 낭자의 마음이 아픕니까?”

자꾸만 번지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며 헌이 물었다.

그러자 소진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그를 홱 돌아보았다.

“당연하지요. 저하께서 아프신데 제 마음이 편하겠어요?”

“하면 내 오늘부터 이 건강관리에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

“내가 건강해야 낭자의 마음도 건강해질 터이니.”

부자연스럽게 정면만 바라보던 두 사람은 그제야 편안하게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조금 벌어졌던 두 사람 사이의 틈도 좁혀졌다.

맞닿은 팔 사이로 스치는 온기는 너무도 따스했다.

“지금 낭자와 함께 왕실 사냥터에 갈까 합니다.”

“왕실 사냥터요?”

“활 쏘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해놓고 한 번도 못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소진의 얼굴에 만월(彎月) 같은 웃음이 드리웠다.

“평소에는 저번에 갔을 때처럼 비어있는 곳입니까?”

“간혹 궁인들이 들러 재정비를 하기도 하고 경비를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한데 어디에 있다가 오시는 길이기에 보은군의 우산을 낭자께서 들고 있었습니까?”

잠시 잊고 있었던 물음이 그제야 생각난 듯, 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소진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소진이 조금 당황해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것이…… 그…… 보은군 대감께서 잠시 집에 오셔서…….”

차마 보은군과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고 있어 어머니와 함께 민추환의 사가를 들렀다 오는 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진이 우물쭈물하자 헌이 말없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보드랍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소진은 더욱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이미 자신의 아버지인 영의정이나 보은군의 외조부인 민추환은 보은군과 자신을 혼인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헌과 마음을 확인한 기쁜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영의정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소진은 고민이었다.

“낭자.”

한편, 헌은 어째서 보은군의 우산을 들고 있느냐는 자신의 질문에 어두워지는 소진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는 소진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예, 예……?”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소진은 휘휘 도리질했다.

오늘은, 이 순간만큼은 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비록 헌을 향한 이 마음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그와 행복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봐야 했지만.

스멀스멀 솟아나는 고뇌를 애써 밀어내며 소진이 활짝 웃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니, 헌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쥐고 있던 우산을 조금 더 아래로 숙여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게 차단했다.

“왜 그러시어요?”

“낭자가 혹, 곤란해질까 봐.”

“아.”

“사주단자까지 올렸는데 다른 사내와 함께 저잣거리를 다니더라는 소문이 돌면 난감해지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소진이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고민했다.

“하긴…….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실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너울로 얼굴을 가리면 되는데 낭자는 그럴 수 없으니.”

“봉희의 집으로 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야 하나……. 여기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긴 한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무언가 생각난 듯, 헌이 소진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

“한 규수가 급한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 씨 부인도 돌아가고 민추환은 홀로 화원에 서 있는 보은군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홀로 가라앉은 얼굴로 내리는 비만 바라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한 규수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마마? 안색이 안 좋습니다.”

민추환의 물음에 보은군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꾸만 가슴 깊이에서 한숨이 차올라, 속이 답답해졌다.

“무슨 일은요…….”

“곧 대비전에도 허락을 맡으러 제가 직접 갈 생각입니다.”

“……소진 낭자와의 혼인이요?”

“예, 마마.”

“만약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신다면요?”

“윤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영의정의 가문을 곁에 두는 것보다 세자의 보위를 더 제일로 생각하고 계시니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대감.’

먹먹한 눈길로 자신을 돌아서며 그렇게 말하던 소진을 떠올렸다.

억지로 끌어올리는 입매가 부자연스럽게 떨렸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아무 걱정 말고 궐 밖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는 것에만 몰두하십시오.”

“…….”

“처음이라 모든 것이 불편할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이 할애비에게 말씀하시고요.”

“예, 할아버지.”

곧 민추환이 물러나고 다시 혼자가 된 보은군이었다.

그는 비구름이 잔뜩 낀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볼까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번쩍, 하늘이 갈라지는 듯 천둥 번개가 내려쳤다.

그의 가슴에도 요란스러운 벼락이 몇 번이고 내려앉고 있었다.

“낭자가 내 운명이라면 내 손을 놓았어도 다시 돌아오겠지요.”

소진이 헌을 만나러 떠난 지 벌써 반 시진이나 지났지만, 보은군은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와 환히 웃어줄 것 같아, 연신 대문 쪽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 위로 빗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

“저, 저하…….”

문 너머로 소진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등을 돌리고 있던 헌이 휙, 몸을 돌렸다.

봉희 댁으로 가 변장을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은 가까운 애월루로 향했다.

헌이 일 년 전, 자신을 공격한 이들을 찾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

오랜만에 방문한 그를 반기느라 기녀들이 달라붙었지만, 헌은 그들을 냉정히 떼어냈다.

‘급히 옷을 빌릴까 하는데. 값은 넉넉히 치러줄 것이니 이 낭자께서 입을만한 옷 한 벌을 내어 오거라. 가채와 얼굴을 가릴만한 너울도.’

덕분에 소진은 처음 헌을 만났을 때처럼, 기녀로 변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다 되었습니까?”

닫힌 문을 돌아보는 헌의 음성에 옅은 떨림이 묻어났다.

“다…… 되긴 했는데…….”

곧, 문이 조금 열리고 큰 가채를 올리고 길게 너울을 늘어뜨린 소진의 모습이 틈 사이로 드러났다.

화려한 기녀 복장을 한 그녀는 영락없는 이곳 애월루의 기녀 같았지만, 긴 너울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에는 여느 기녀와 다른 귀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헌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음……. 처음 입는 것은 아닌데 영…… 어색하긴 합니다.”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소진이 멋쩍게 웃었다.

“아.”

헌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눈앞에 기녀의 차림을 한 소진의 모습은 너무도 황홀했기에.

자신이 본 기녀 중에서 제일의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헌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지요……?”

소진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불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놀란 소진이 한 걸음 물러나자, 헌은 기방 문을 탁하고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러면서 한 걸음 물러난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리가.”

“저하…….”

이내 길게 늘어뜨린 너울을 헌이 한 손으로 치워냈다.

그러자 가채를 틀어 올린 소진의 얼굴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턱 끝 아래로 단정하게 뻗은 하얀 목선이 연신 반짝였다.

헌의 눈동자에 황홀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곧, 그는 소진의 봉긋한 이마와 동그란 콧잔등, 잘 익은 능금 같은 뺨, 그리고 산딸기 같은 붉은 입술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그의 다정하고도 세심한 눈빛에 소진의 가슴이 쿵, 쿵 내려앉았다.

“이리 입은 그대를 보니, 처음 낭자를 마주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헌의 달콤한 목소리가 소진의 쿵쿵 뛰는 가슴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녀도 고개를 젖혀 그를 바라봤다.

“그때도 이리 아리따웠는데.”

“제 멱살을 쥐고 흔들었던 그때요?”

소진도 그날이 생각이 난다는 듯 킥킥거리며 입술을 슬쩍 말아 물었다.

“멱살을 쥐고 쥐새끼라 망언을 퍼부었던 여인을 내가 이토록 연모하게 될 줄이야.”

헌이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소진의 턱 아래 곱게 매듭지어진 너울이 끈을 팟, 풀었다.

그러자 스르륵 끈이 풀리며 헌이 그녀의 너울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저하.”

그윽한 눈길로 소진을 바라보던 그는 소진의 턱 끝을 보드랍게 그러쥐었다.

소진의 몸이 절로 긴장감에 굳어졌다.

헌은 소진에게 긴장하지 말라는 듯, 편안한 미소로 바라봤다.

그 미소가 굳어버린 그녀의 온몸을 느긋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긴장 풀어라.”

헌이 슬쩍 상체를 숙여 소진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닿자마자 그녀는 순간,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그 찰나, 그는 그러쥐고 있던 소진의 턱을 놓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읍……!”

순식간에 헌이 소진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커다란 손길이 너무도 따스해, 소진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자신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는 그의 숨결에 소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한동안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소진의 작은 손이 헌의 커다란 가슴 위에 살포시 얹혔다.

그리고 헌은 그녀의 하얀 손을 따뜻이 감싸 쥐었다.

곧 그의 입술이 느긋하게 떨어지고 헌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어여쁜 여인이 나의 것이라니.”

“……!”

“나는 아무래도 복을 받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이 핏, 웃고 말았다.

그러곤 그가 벗겨낸 너울을 다시 쓰며 헌을 돌아보았다.

“서둘러 가요. 지체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소진이 흠칫 놀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누가 보면…….”

“누가 보면 뭐, 기생에게 빠져 채신머리를 잃은 한량이라 보겠지요?”

괜찮다는 듯 헌이 다시금 바짝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진작 이렇게 입힐걸.”

“……예?”

방문을 휙, 열고 나서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소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헌을 올려다보았는데.

“이 손을 이리 꼬옥 잡고 거닐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낮게 속삭였다.

그 말에 소진은 터지려는 웃음을 꼭 참아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하도, 참.”

그리고 소진은 헌의 손을 꼭 잡은 채, 마루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헌이 먼저 내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치맛자락을 사뿐히 쥐었는데 헌이 소진에게 선물해주었던 꽃신을 발아래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신겨주겠습니다.”

고개를 젖혀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던 헌이 소진의 버선발을 살며시 쥐었다.

“아.”

정성스럽게 소진의 발을 움켜쥐던 헌은 그녀의 발에 꽃신을 폭 신겨주었다.

그녀의 달뜬 얼굴 위로 미소가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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