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하고 싶은 말.
2021.06.25.
소진의 말에 우산을 쥔 보은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미 수도 없이 예상했던 그녀의 대답이었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지.
보은군은 어떤 얼굴로 소진을 봐야 할지 몰라 그만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소진의 가슴도 저렸다.
“대감.”
소진은 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보은군은 자신에게 언제나 진심이었고 다정했고 좋았던 기억만 주었던 사람이었다.
십여 년을 함께 해온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그를 밀어내야 하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잠시 말을 잃고 땅바닥만 바라보던 보은군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씁쓸함을 애써 밀어내려는 듯, 억지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차마 그런 보은군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어 이번에는 소진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지…… 마세요.”
“예……?”
“피하지 마세요, 낭자.”
“아.”
“이 마음을 거절 당한 것도 서러운데 나를 피하기까지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습니다.”
“…….”
“당장은 불편해 마주 보는 것이 껄끄럽다 해도. 영영 나를 피하지만은 말아주세요. 그래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소진이 끄덕끄덕,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보은군이 소진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소진이 그를 응시했다.
“아까…… 그 여종이 들고 있던 것, 저하께서 보내신 서찰이지요?”
“……아. 보시었습니까?”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하면 속히 가보시지요.”
“……대감.”
“저와 서책 방에 볼일이 있다고 하고 먼저 나가 저하를 뵈러 가시지요.”
“…….”
“그럼 제가 두 분께 말씀드리고 뒤이어 나가겠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고 다른 사내에게 간다는 여인에게 어찌 이리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보은군의 배려에 소진은 더욱 그에게 미안함이 치솟았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보은군은 어서 가보라는 듯이 우산을 쥐여준 그녀의 손을 떠밀었다.
“기다리고 계시겠습니다, 저하께서.”
그 말에 소진은 말없이 보은군을 바라보다,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
“그리고…… 미안합니다, 대감.”
그러곤 소진은 서둘러 빗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은군은 소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낭자를 이 마음에서도 이처럼 보낼 수 있을까요…….”
***
숙자와 황급히 대문을 빠져나온 소진은 헌에게서 온 서찰을 펼쳐 들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정자나무에서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낭자.>
많이 보고 싶다는 말에, 소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장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보고 싶다는 이 한마디가 이토록 자신을 절절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내내 그의 답신을 기다리며 그가 이 말을 해 주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보고 싶다는 이 한 마디에 그간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소진은 눈에 힘을 주었다.
얼른 헌이 보고 싶었다.
“이거 언제 전해주신 것이야?”
“한 반 시진 전쯤……?”
“서둘러 가보아야겠어. 너는 집으로 돌아가 있거라.”
헌이 기다리고 있을 정자나무 언덕을 향해 소진은 서둘러 발걸음을 내디뎠다.
행여 넘어질까, 치맛자락을 꾹 쥐고서 그녀는 빗속을 뛰었다.
“하아…… 하아…….”
헌을 보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소진은 정자나무 언덕을 향해 뛰는 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좋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내달려 소진은 정자나무 언덕에 다다랐다.
차오르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그녀는 저 멀리, 정자나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신…… 것인가?”
설마, 하는 얼굴로 소진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정자나무 언덕 위까지 꽃잎이 무성히 깔려 있었다.
“어……?”
봄도 아닌데 웬 꽃잎인가 싶어,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발아래를 살폈다.
빨간 꽃잎, 노란 꽃잎, 자줏빛 꽃잎 들이 한데 어울려 발아래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대체 누가 여기에 이렇게 꽃잎을 깔아 놓은 것인지, 소진은 저 언덕 위에까지 이어진 꽃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조함으로 가득했던 소진의 가슴에 어느새 따뜻한 봄바람이 스며 있었다.
치맛자락을 살포시 쥔 채, 비에 젖은 꽃잎을 밟으며 언덕 위로 향하는 그녀의 입가에 동그란 미소가 달렸다.
“누가 이렇게 해놓은 것이지?”
내리는 빗줄기마저 꼭 보드라운 꽃비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뿐사뿐 꽃잎을 밟고 언덕 위에까지 올라온 소진은 우산을 접으며 헌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커다란 나무 아래에 헌은 없었다.
나무 아래 둘레에도 꽃잎이 아름답게 흩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다녀간 것 같아 소진은 조심스럽게 나무 가까이에 다가갔다.
“어라?”
그러자 커다란 나무 아래에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활인서에서 환하게 웃으며 방울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용모화였다.
익숙한 그림체에 소진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 옆에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소진의 모습이.
그리고 그 옆에는 궁녀 옷을 입고 중궁전 앞을 서성이는 모습이 예쁘게 그려져 나무 둘레를 따라 기둥에 붙여져 있었다.
제 모습을 어여쁘게 담은 용모화에 소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니 이번에는 간택에 참여했던 지난날 제 모습이 보였다.
“이때 저하께서 갑자기 참관한다고 하시어 정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련한 추억에 잠긴 듯, 용모화를 손끝으로 쓰다듬는 소진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다음 그림은 서책 방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그리고 그 옆에는 화전을 굽느라 한껏 집중한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풉, 웃음이 나왔다.
이 커다란 나무 둘레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용모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것을 대체 언제 다 그린 것일까.
소진은 감동한 얼굴로 용화를 따라 나무 둘레를 한 바퀴 찬찬히 돌았다.
그러곤 처음 그녀가 발을 내디뎠던 곳으로 와 보니 웬 고운 꽃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진이 가만히 그 꽃신을 손에 들었는데.
“내가 깔아 놓은 꽃길에.”
“……?!”
“낭자가 그 꽃신을 신고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정자 뒤쪽에 숨어 있던 헌이 뒷짐을 진 채,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낭자의 곁에는.”
“……!”
“평생 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소진의 동그란 콧잔등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헌이 그녀의 앞에 다다르자, 그는 무릎을 굽혀 손수 소진의 발에 그 꽃신을 신겨 주었다.
“저하…….”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두 발에 꽃신을 신긴 그가 고개를 젖혀,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준비한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소진은 그만 꾹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내가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낭자.”
진심이 담긴 그의 고백에 그녀는 그만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말았다.
헌을 향한 제 마음이 연모라는 걸 알면서도 내내 부정했던 시간이 야속했다.
그래서 괜스레 그를 외롭게 내버려 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저하.”
소진은 울음을 꾹, 삼키며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새 쌓인 그리움은 태산보다 높았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헌의 입가에 동그란 웃음이 그려졌다.
“나도…… 내내 그리웠습니다.”
그러자 소진이 그의 손을 잡아 헌을 일으켰다.
“해줄 말이 있었습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연통을 계속 보낸 것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오늘이 아니면 영영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거든요.”
소진은 꼭 쥐고 있던 그의 옷자락을 슬며시 놓으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멀지도 가깝지 않은 곳에서 소인을 열심히 연모해 볼 생각이라 하셨지요?”
소진의 물음에 헌이 엷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리했습니다.”
“그런 저하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으면 말하라 하셨지요.”
“예, 그리도 했습니다.”
“해서 이제 저하의 그 고백에 대한 답을 해드릴까 합니다.”
소진은 울음을 꾹꾹 참으며 진심을 담아 말을 이어갔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고 밀어냈던 모든 순간이 참이었습니다.”
“…….”
“저하를 보고 싶어 하는 이 눈, 저하만 담게 되는 이 입, 저하만 듣고 싶어 하는 이 귀.”
“……아.”
“저하만 그리워하는 이 마음.”
“낭자.”
“모두…… 참이었습니다. 소인이 저하를 연모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헌은 소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열병이라도 난 사람처럼 뜨거웠다.
헌의 눈가에도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저하…….”
헌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껴안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널 보러 오지 못했던 그동안의 시간은.”
“…….”
“널 욕심 내어도 좋다는 그 말이 내겐 너무도 절실했던 날들이었다.”
“……!”
“나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 너도 날 연모하고 있다고. 이제는 마음껏 연모해도 좋다고.”
“저하.”
“그 말이 너무도 절실해…… 너무도 힘겨웠고, 아팠고,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뇌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놓았다.
그러곤 구슬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리는 그녀의 눈가를 따스하게 쓸었다.
“한데 방금 너의 그 대답은 그 고민과 고뇌였던 나에게 해답을 주는구나.”
너무도 그리웠다는 얼굴로.
나 역시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아팠다는 얼굴로 헌이 소진의 입술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널 앞으로 더욱더 많이 연모해도 좋다는.”
그 말을 끝으로 헌은 소진의 입술을 보드랍게 삼켰다.
훅 다가온 그의 온기에 소진의 몸이 놀라 굳었지만, 이내 자신의 허리를 따스하게 감싸는 그의 커다란 손길에 그녀는 그에게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숨결이 눅진하게 얽혀들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그녀를 품에 안는 헌은, 조금의 틈도 허락지 않았다.
완벽히 소진과 밀착된 채 끊임없이 그녀의 숨결을 탐하고 보듬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소진 역시, 몸을 움직였다.
둘은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곧, 마주했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소진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헌은 그런 소진을 꼭 보듬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소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소인도 앞으로는 이 마음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살며시 고개를 젖혀 헌을 바라보았다.
달뜬 그녀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헌은 말없이 그 눈물에 입을 맞추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너를 어찌……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저하.”
“나는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너의 부친과 내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될 수도 있을 것이야.”
“…….”
“하지만 난 너의 부친 역시, 나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네 부친을 따르는 모든 대신도 내 편으로 돌려세울 것이야.”
“그럴 수 있도록 저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소진의 말에 헌이 작게 실소를 터뜨리며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뺨에 닿는 그의 눈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습니까?”
“아?”
“제 아버지께서 엄하기는 하셔도 끔찍한 딸 바보시거든요? 제가 어떻게든 구워삶아, 저하를 사위 삼아 달라 청할 것이어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코끝까지 빨개진 채로 소진이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헌은 그녀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러곤 양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게 해, 쪽 맞추어 버렸다.
“저하……!”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태산인데도 그저 좋기만 하구나.”
“저도요……. 저하가 좋습니다. 많이.”
호기롭게 고백할 때와 달리, 새삼 다시 그 말을 뱉으려니 부끄러워졌다.
소진은 몸을 배배 꼬며 헌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손을 척 내밀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갑시다. 낭자.”
“어디로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념으로 추억을 남겨야지요. 오늘도 호위무사 달고 왔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자유의 몸입니다.”
“허허, 자유의 몸이라. 그럼 더더욱 속히 움직여야겠습니다.”
헌은 자신이 가지고 온 우산을 곱게 접어 나무에 세워두곤 소진이 떨어뜨린 우산을 주웠다.
“이걸 쓰고 갑시다.”
“……왜요?”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헌을 올려다보니 그가 눈을 반으로 접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게 더 작으니까.”
“……?”
“딱, 붙어서 가야지.”
그러자 소진이 키득거리며 슬그머니 그에게 팔짱을 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한데 그 우산, 소인 것이 아니옵니다만.”
“……낭자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요?”
“보은군 대감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말에 헌은 당장 그 우산을 접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불결한.”
그러곤 다시 자신의 우산을 펼쳐 들어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버립시다, 저것은.”
“안 됩니다. 돌려드려야 합니다.”
소진이 다시금 그 우산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헌이 그 앞을 척 막아섰다.
“어딜. 씁.”
미간을 팍 구긴 채, 입술을 슬쩍 깨물던 헌은 자신이 그 우산을 휙 들었다.
“내가 가져다줄 것이다. 보은군에게, 직.접.”
그러곤 소진을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당겨 버리는 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