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나와 혼인해 주겠습니까? (76/125)

76. 나와 혼인해 주겠습니까?

2021.06.21.

<저하. 행여 무슨 일이 생기셨을까, 이젠 서찰을 보내는 것이 겁이 납니다. 

저하께서 그때 그러셨지요. 저하께서는 을(乙)이 되어 갑(甲)인 소인을 홀로 연모해 보시겠다고. 한데 이제는 소인이 을이 되어 저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갑질을 해도 좋으니, 그 얼굴 좀 보여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오늘은 꼭…… 저하를 뵙고 싶사옵니다.> 

진심이 뚝뚝 묻어나 있는 소진의 서찰에 헌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그러자 윤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돌아보았다.

“한 규수께서…… 무엇이라 합니까?”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화가 난 것은 아닐는지요.”

그때, 휘적휘적 대전을 나서던 영의정이 헌을 발견하고는 그의 뒤에 섰다.

“저하.”

헌은 소진의 서찰을 반으로 접어 다시 윤현에게 넘겼다.

그러곤 등을 돌려, 영의정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러셨지요.”

“…….”

“이번만큼은 소신이 저하의 뜻과 같기를 바란다고요.”

그 말에 헌의 입매가 비식, 일그러졌다.

“예,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뭐요?”

“저하와 제 뜻이 같기를요. 하면…… 소신 물러나 보겠습니다.”

보은군과 소진의 혼사를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멀어지는 영의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헌은 조소했다.

“저하…….”

헌은 뒷짐을 지며 영의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윤현을 향해 지그시 입술을 달싹였다.

“가자.”

“예……? 어디로요?”

윤현의 물음에 헌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궐 담, 저 너머를 바라봤다.

“욕심내러.”

***

“싫다니까요?”

“싫다고 떼를 쓸 일이니? 정말 왜 그러느냐.”

“왜 제 뜻은 묻지도 않으시고 이리 강행하시는 겁니까, 어머니?”

“지금 보은군 마마와 민 대감 모두, 기다리고 계신다. 이리 어린 애처럼 굴 것이야?”

별채에서는 소진과 최 씨 부인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저 그런 식사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진아.”

“다 압니다. 보은군 대감과 저, 혼인을 시키려고 그러시는 거지요?”

“……그건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라니까?”

“아직 간택이 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 못 들었느냐? 간택은 중단되었고 재개된다고 해도 너는 더 참석지 않을 것이다.”

소진은 허망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직 헌에게 답신도 오지 않은 채였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숙자는 소진이 안쓰러워 발만 동동 굴렀다.

“채비하고 나오거라. 다들 너만 기다리고 계시니, 가문에 먹칠하는 일 없어야 할 것이야.”

단호하게 그 말을 남긴 채, 최 씨 부인이 사라졌고 소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씨…….”

숙자가 황급히 소진의 곁으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

“그분께 진심을 담아 서찰을 보냈어.”

“아씨.”

“어린아이처럼 칭얼댄 것은 아닐까, 여인이 너무 실없이 속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종일 고민하고 고심하며 써 내려간 내 진심이었어.”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오지 않은 헌의 답신도 원망스러웠고, 제 뜻은 묻지도 않은 채 보은군과의 혼인을 강행하려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싫었다.

그보다 더욱 가슴을 애달프게 하는 건, 행여 헌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제 아비가 선위와 자신을 두고 거래를 청한다 하였으니, 헌이 자신이 아닌 선위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 걱정이 제일 소진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영영, 답신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설마요.”

“아버지 때문에 내게…… 화가 난 것은 아니겠지?”

“우선 아씨, 보은군 대감마님 댁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방마님, 무진장 화가 난 것 같아요.”

숙자의 말에 소진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환복하기 위해 별채로 걸음을 옮기다, 힘없이 숙자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말이야.”

“예.”

“너는 집에 남아 있다가 저하께서 답신이 오거든, 서둘러 내게 말해 주어야 해.”

“식사 도중에라도요?”

“응. 어떻게 해서라도 내게 답신이 왔다는 걸 알려줘. 알았지?”

“알겠습니다, 아씨.”

“꼭이야.” 

“예. 꼭요.”

숙자에게 거듭 대답을 들은 후에야 소진은 별채로 들어섰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감마님.”

“아닙니다. 비까지 이리 내리는 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부인.”

소진과 최 씨 부인은 결국, 민추환의 사가에 당도했다.

하는 수 없이 끌려온 소진은 내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최 씨 부인이 소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표정 풀지 못해? 민 대감께서 보고 계시는데 어찌…….”

“알겠어요.”

하지만 소진은 잔뜩 골이 난 채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민추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민추환이 인자하게 웃으며 소진에게 다가왔다.

“소진아, 오랜만이구나.”

“아…… 예, 그간 강녕하시었어요?”

그제야 소진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리며 민추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보은군 마마께서는 곧 당도하실 것이야. 속히 안으로 들자, 네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어린 시절 네가 즐겨 먹던 것을 생각해 내 차려 보았단다.”

“아휴, 뭘…… 그렇게까지. 대충 준비하셔도 되는데……!”

민추환의 말에도 여전히 뾰로통한 소진을 대신해, 최 씨 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민추환과 함께 예쁘게 꾸며진 화원이 훤히 보이는 정자로 올라섰다.

그곳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배고프지, 소진아? 어서 앉거라.”

상다리가 휠 만큼 갖가지 산해진미가 놓여 있었고 최 씨 부인은 감복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진아. 대감마님께서 널 위해 이리 정성스러운 상을 차려주셨구나.”

“우리 소진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 보면서 나도 외손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매번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민추환은 소진이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그가 시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어색하다 못해 껄끄럽기까지 했다.

소진은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상 앞에 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때, 대문이 삐걱 열리고 누군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혹시……?!’

헌의 답신을 가지고 온 숙자가 아닐까 싶어, 소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숙자가 아닌 보은군이었다.

“아.”

때마침, 소진과 눈이 마주친 보은군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소진도 그에게 반듯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우리 소진이가 보은군 마마를 많이 기다렸나 봅니다.”

최 씨 부인의 말에 민추환이 흐뭇한 얼굴로 소진과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이내 정자에 올라선 보은군이 최 씨 부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제가 늦었지요? 많이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닐는지요.”

“아닙니다, 마마.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사이에서 소진은 도통, 웃음을 보이지 못했다.

대화에도 끼지 못한 채, 그저 밥알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어제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마마? 출궁 후에 잠자리가 바뀌어 불편한 곳은 없는지요.”

최 씨 부인의 말에 소진을 바라보고 있던 보은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모두 걱정해 주신 덕분에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순간에도 보은군은 소진만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잘 웃지도 않고 참새처럼 재잘거리지도 않는 그녀였다.

어디 불편한 것인지 연신 어두운 얼굴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것 좀…… 드셔 보시지요, 낭자.”

“아. 고맙습니다.”

보은군이 그녀의 숟가락 위에 고기를 얹어주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소진은 그와 눈도 맞추지 않았다.

소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헌의 답신뿐이었으니까.

작은 인기척에도 소진은 서둘러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소진은 연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대문을 힐끗거렸다.

보은군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곧, 밥상이 물러가고 다과상이 차려졌다.

민추환과 최 씨 부인이 함께 앉아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했다.

“영의정 대감께서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그러게요. 요즘 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봅니다?”

“별일은 아니고요. 곧, 해결될 것입니다. 영의정 대감께서 힘써 주시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보은군과 소진이 한 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낭자.”

“예?”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소진을 보은군이 작게 불렀다.

그제야 소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기다리는 이라도 있습니까?”

“예?”

“자꾸 대문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것이…….”

소진이 말끝을 흐리던 그때, 대문이 삐걱 열리고 숙자가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소진이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자를 보자마자 소진의 가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종을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린 것인지, 보은군은 조금 의아하다는 듯 소진을 바라봤다.

“아씨.”

차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숙자가 대문 앞에서 속삭였다.

그러곤 종이 한 장을 꺼내 휘휘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헌에게서 답신이 온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은군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무엇이지……. 서찰 같은데.’

한편, 소진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초조함이 얼굴 가득 차올랐다.

‘어떡하지……. 지금 빨리 가봐야 하는데.’

숙자가 갖고 온 서찰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진의 모습에 보은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설마…….’

소진이 그토록 기다린 것이 서찰이라는 걸 깨닫자 보은군의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저하께서 보낸 서찰일까.’

어쩐지 씁쓸하다 못해, 그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내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하고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보은군은 가슴이 아려왔다.

“할아버지.”

갑작스러운 보은군의 부름에 숙자를 힐끔거리던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민추환을 불렀지만, 보은군의 시선은 소진에게 향해 있었다.

어쩐지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소진은 뜨끔해졌다.

“낭자와 화원을 좀 거닐고 오겠습니다.”

“아, 그러겠느냐?”

“예. 집구경을 시켜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도록 해라.”

웬 난데없이 집구경인가 싶어 소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보은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가시지요, 낭자.”

보은군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소진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보은군의 뒤를 따랐다.

보은군은 우산을 든 채, 앞서 걷기만 할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저…… 대감.”

소진이 불러도 그는 묵묵부답으로 걷기만 했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소진은 그저 그의 뒤만 졸졸 뒤따랐다.

그때, 보은군이 정자와 한참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 다다라서야 그 걸음을 멈췄다.

세찬 빗줄기도 나무 아래에서만큼은 멎어 있었다.

“낭자.”

보드라운 그의 음성에 소진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낭자께서도 이미 들었겠지요? 우리의 혼인을.”

“아, 대감.”

“어쩔 수 없이 낭자와 내가 혼인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보은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물음에도 소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억나십니까? 저번에 내가 낭자에게 했던 말.”

“어떤…….”

“좋은 벗이 되기 위해 마음을 숨겨야만 한다는.”

“……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 마음을 숨겨, 그대를 내 곁에 두고 볼 수만 있다면. 욕심내지 않고 끝내 마음을 숨겨 보겠다.”

“……!”

“그렇게 다짐했었습니다.”

“대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소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데 그게 욕심이었습니다.”

“…….”

“지금까지 둘도 없는 벗으로 지내왔으니, 그대를 갖지 못해도 벗으로나마 그대의 곁에 남으려 했던 것.”

“……!”

“그것이 욕심이었나 봅니다.”

보은군은 붉어진 눈시울로 소진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 슬픈 얼굴을 마주하자, 소진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대감, 어찌.”

“저하에게 가고 싶어 하는 낭자의 모습을 보면서 보내주기 싫어, 홀로 이리 끙끙 앓는 것을 보니. 이제는 이 마음을 욕심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벗이라면. 벗이 가고 싶어 하는 그곳으로 웃으며 보내주어야 하는 건데. 지금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

보은군은 우산을 펼쳐 든 채, 소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곤 소진과 우산을 함께 쓰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연모했습니다, 내내.”

“…….”

“은애했습니다, 저하보다 훨씬 전부터 낭자를.”

“아.”

“해서 저하께 낭자를 보내주기 싫습니다.”

그의 고백에 소진의 가슴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헌이 이 세찬 비를 맞으며 혹,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와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기어이 그 말이 보은군의 잇새에서 흐르고 말았다.

절절한 그의 고백에 소진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머뭇거렸다.

세찬 빗줄기만이 사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감…….”

힘겨운 듯, 젖어있는 땅바닥만 바라보던 소진이 고개를 들어 보은군을 바라봤다.

진심 어린 그의 눈동자를 애써 마주하며 그녀는 입술을 뗐다.

“미안합니다.”

“……!”

“저하께…… 가고 싶습니다.”

소진의 대답에 보은군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보내……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