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욕심내도 된다는, 한마디. (75/125)

75. 욕심내도 된다는, 한마디.

2021.06.18.

“저하께서 석고대죄를 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그 말에 영의정과 소진 모두 굳고 말았다.

석고대죄를 왜……?

혹, 그가 왕에게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인가 싶어 순간 소진의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하러 온 민추환 역시, 굳은 표정이었다.

대체 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영의정과 민추환을 번갈아 응시하는 소진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석고대죄라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영의정이 휘적휘적, 민추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문을 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어명을…… 받들 수 없다는…… 연유로.”

“이런!”

영의정은 민추환의 말에 크게 노하며 주먹을 바짝 쥐었다.

“선위의 명을 거두어 달라, 석고대죄를 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그 말에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소진의 눈도 커졌다.

‘선위를…… 어째서 거부하시는 겁니까, 저하?’

대체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조금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소진이었다.

그녀는 영의정만큼이나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듯, 영의정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래도 헌의 석고대죄는 화론 파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연유도 없이 그가 감히 석고대죄할 리는 없었다.

한참 고심에 잠겨있던 영의정의 입술이 거칠게 벌어졌다.

“하……, 가히 세자로세.”

그 입매에는 짙은 조소도 걸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영의정의 말에 민추환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부르는 겁니다.”

“……예?”

“대화를 시도하자, 미끼를 던지는 것이지요. 아주 영특한 세자십니다.”

조롱이 섞인 어투로 그렇게 말하던 영의정이 옷자락을 사납게 펄럭이며 돌아섰다.

민추환은 그 모습에 어쩐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미끼를 던지다니요?”

“이미 세자는 우리가 선위를 대상으로 거래를 준비했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그걸 어찌 압니까, 세자가!”

민추환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영의정의 옆으로 다가갔다.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체면도 상하고 한 수 굽히고 들어가야 하니 꺼려진다는 것이겠지. 거래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심상입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끼리 은밀히 나눈 대화인데요?”

“무슨 거래인지, 우리의 속내까지는 파악 못 한 듯합니다. 그러니 석고대죄라는 연극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요.”

“아.”

“우리는 등청을 거부하고 전하께서 먼저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한데 그것을 완전히 깨부순 것이지. 저하께서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석고대죄를 벌여, 우리가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도록 만든 것이지요.”

영의정의 설명에 민추환의 이맛살이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자였다.

“하긴…… 왕세자가 선위의 뜻을 받들 수 없다, 석고대죄를 하는 마당에 우리가 이리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

“…….”

“적이 이리 똑똑하니,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군요.”

영의정은 서둘러 입궐할 채비라도 하려는 듯, 민추환을 돌아보았다.

“궐에서 봅시다, 대감.”

“그러도록 하지요.”

“다른 대신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민추환이 돌아서고 영의정은 애써 분노를 삼키며 안채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적……이라.’

그러다 민추환이 했던 말이 괜스레 비수처럼 그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아, 따가웠다.

“저하와 같은 편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중얼거리는 소진의 눈동자가 촉촉해져 왔다.

***

“부디 뜻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

정말, 헌은 멍석 위에서 소복만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궁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굳게 닫힌 대전 문 안에서 왕은 그저 두 눈만 굳게 감고 있었다.

-석고대죄를 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저들은 우리가 한 수 굽히고 들어와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뜻대로 해 줄 수 없지요.

-석고대죄한다는 것은…… 불효를 저지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백성들에게 너의 석고대죄가 알려지면 좋을 것이 무엇 있겠느냐.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거머쥔 채 원하는 것만 얻을 수는 없사옵니다.

-……세자.

-속절없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 싸움이기도 하지요. 하니, 이번만큼은 소자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아바마마.

상선은 그들의 숨은 사정을 몰랐기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나절째 석고대죄하는 헌이 걱정이 되는지 상선은 결국, 왕의 앞에 섰다.

“전하…….”

상선의 부름에 왕이 느리게 눈을 떴다.

“저러다 저하의 안위에 문제라도 생길까…….”

“놔두거라.”

“전하.”

“곧 멈출 것이니.”

왕의 의미심장한 말에 상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 대전 문을 열고 나가 울상을 짓고 있는 헌의 내관 앞에 섰다.

그러곤 소용없다는 듯, 느리게 도리질을 해 보였다.

“아휴…….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요.”

“속히 저하께 가보게. 조금이라도 저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거든, 다시 전하를 찾고.”

“예, 그리하지요. 상선 어른.”

헌의 내관은 풀이 죽은 채, 여전히 석고대죄 중인 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윤현이 내관의 앞에 바짝 다가와 섰다.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것 같소.”

“알겠습니다.”

곧장 윤현은 무릎을 꿇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헌의 옆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그러자 헌이 천천히 눈을 떠, 닫힌 대전 문을 바라보았다.

“영의정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만, 곧 입궐할 것 같습니다.”

“한 규수에게서는…….”

“예. 오늘도 연통이 왔었습니다.”

윤현의 말에 헌의 입술이 힘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멍석을 짚고 있는 손바닥에 거센 힘이 들어섰다.

“그래……, 알겠다. 혹, 또 한 규수에게서 소식이 오거든 전하거라.”

“예, 저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벌써 며칠째, 소진에게서 밀서가 오고 있었다.

<전하,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와주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헌은 그 서신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 영의정과의 담판을 지어야 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은 세상에 없으니까.

영의정의 속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보은군을 두고 거래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섣불리 소진에게 기다리라는 말도, 또한 알겠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영의정이 무엇을 두고 거래를 하는지 두고 본 뒤, 헌은 정확히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정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소진이 함께 갈 수 있다고 판단이 선다면 그녀를 자신이 이끌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자신이 행여, 패(敗)한다면.

헌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져갔다.

“그대를…… 홀로 연모해서도 아니 되겠지.”

그때, 헌의 등 뒤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영의정 대감께서 납시셨나이다…….”

무릎을 꿇은 채, 대전만 고집스럽게 바라보고 앉아있던 헌의 고개가 드디어 돌아갔다.

저벅저벅 대전을 향해 걸어오는 영의정과 헌의 시선이 정확하게 부딪힌 순간이었다.

***

대전에 모여 앉은 세 사람.

영의정과 헌은 나란히 앉아 왕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대전에 와 앉은 듯, 영의정의 표정은 어두웠다.

거의 헌에게 멱살을 잡혀 이곳까지 끌려온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준비해 온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영의정.”

왕이 느긋한 시선으로 영의정을 내려다보았다.

영의정의 곁에 앉은 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여유가 흘러넘치는 듯했다.

이미 헌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느낌에 영의정은 마음이 찜찜했다.

“선위의 명을…… 거두어 달란 저하의 뜻에 저희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영의정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헌이 느리게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아직 선위하시기에는 너무 이르기도 하고 저하의 뜻도 이리 강경하니.”

“…….”

“선위의 명을 거두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전하.”

“해서 등청을 거부한 것이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저희의 뜻을 전할 길이 달리 없었사옵니다.”

“내가 선위의 뜻을 거두지 않겠다면?”

왕의 말에 영의정이 조금 더 턱 끝에 힘을 주었다.

“정녕 뜻을 거두실 수 없다면.”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싶어, 영의정을 응시하는 헌의 눈동자에 빛이 번뜩였다.

“대신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대들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

“예, 전하.”

왕은 괘씸했지만, 헌의 말대로 저들의 조건을 들어보려 할 참이었다.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영의정은 왕이 아닌 헌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헌과 시선을 맞춘 영의정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이번 건으로 화론 파 대신들 모두의 뜻을 모으기에는 저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

“모두 완강히 전하의 선위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일 리 없었다.

화론 파 모두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인물이 영의정인데.

자신의 힘으로 대신들의 마음을 모으기 힘들다는 것은 그저, 저들의 요구를 말하기 전 덧붙이는 서론 같은 것이었다.

헌은 그것을 너무 잘 알았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왕은 헌이 시키는 대로 대답하였다.

“저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면 저들에게 당근을 던져주시지요.”

“……당근.”

“보은군 마마와 제 여식의 혼인.”

“……!”

“그것이면 화론 파 대신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적격일 것입니다.”

그 말에 헌의 눈빛이 무자비하게 떨리고 말았다.

‘결국…… 그것이냐.’

왕도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어찌…… 그대의 여식을.”

“…….”

“그대의 여식이라면 이미 세자의 빈이 되기 위해 사주단자를 올리지 않았소? 간택이 갈무리가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런 청을……!”

황망하다는 투로 왕이 말했지만, 영의정은 주춤하지 않고 속히 준비한 대답을 올렸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요? 지난 재간택 때, 제 여식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을요.”

그것이라면 왕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소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하께 알현을 청할 요량이었습니다.”

“……!”

“남은 간택에 제 여식을 참가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여식만을 노리고 납치해 감금까지 했던 자들입니다.”

“…….”

“다시 간택이 진행된다면 또다시 그들은 제 여식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또한, 제 여식이 간택을 앞두고 사가에서도 변고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지요. 제 여식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더는 간택에 내보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왕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어쩐지 영의정의 말을 듣고 있는 헌은 착잡해졌다.

“세자빈 간택전에 참가했던 규수를 중간에 제외하는 것이 껄끄러우시다면 저 연유면 충분할 것입니다.”

“해서…… 그대의 여식을 보은군의 신부로 삼아라?”

“예. 그것이면 화론 파 대신들의 마음을 전하의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정은 그렇게 말하며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왕의 갈등은 시작됐고 헌의 고뇌도 커져만 갔다.

보은군과 영의정의 여식을 혼인 시킨다면 보은군의 세력이 커질 것이다.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선위 또한 왕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왕이 고심에 잠긴 듯, 머리를 감싸 쥐자 헌의 명치 끝이 아려왔다.

왕은 결국, 영의정의 뜻대로 소진을 보은군의 신붓감으로 윤허할 것이었다.

헌에게도 선위는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도 하루빨리,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영의정과 제대로 맞서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사사건건 제 발목을 쥐고 흔드는 화론 파를 모두 부수어 놓을 참이었다.

사실 헌은 석고대죄 연극을 펼치기 전, 왕에게 호기롭게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소자에겐 영의정의 뜻을 묵살 시켜 버리고 전하도 흡족해하실만한 결과물을 끌어낼 묘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래 상대가 소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보은군과의 혼인.

그것을 당장에 뭉개버릴 수도 있었지만, 행여 소진이 원한다면 자신이 함부로 그럴 순 없었다.

헌은 질끈 눈을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의정과 왕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전하께서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 대감.”

그러자 영의정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헌은 굳은 얼굴로 영의정을 싸늘하게 응시하더니 왕을 올려다보았다.

“하면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소자를 불러주십시오, 아바마마.”

“그래, 그러도록 하마.”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은 영의정도 속히 대전에서 꺼지라는 소리였다.

영의정은 건방진 헌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이미 보은군과 소진의 혼사를 입에 올린 영의정에게 불만이 가득한 헌은 그의 어깨를 세차게 부딪치며 지나쳤다. 

‘내가 낭자를 욕심내어도 좋다는 말, 딱 그 한마디면 됩니다. 그럼 내가 최선을 다해, 그대를 욕심낼 것이니.’

그러곤 기다리고 있던 윤현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오늘 낭자에게서 온 서찰은.”

“여기 있습니다.”

성난 얼굴로 동궁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던 헌은 윤현에게 건네받은 서찰을 거칠게 펼쳐 들었다.

이내 서찰을 내려다보던 헌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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