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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간택, 그리고 선택. (74/125)

74. 간택, 그리고 선택.

2021.06.14.

이렇게 하기는 싫다는 말에 민추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보은군은 숨을 고르며 민춘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도둑질하듯, 낭자를 훔쳐오기는 싫습니다.”

그 말에 민추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마마……! 훔치다니요, 도둑질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낭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간택을 재개하고, 배제해 버리고.”

“…….”

“그리고 선위를 거래 삼아 혼사를 마음대로 정해 버리는 것이, 도둑질이지요.”

“마마…… 그런 표현은 영의정 대감도 그리고 나도 너무 속이 상합니다.”

“진심으로 낭자를 은애하는 내 속이 더 상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해 보셨습니까?”

보은군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추환은 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

“대신들이 마마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한데 덜컥 전하께서 선위를 입에 담으시니……. 대신들의 반발이 거세 영의정 대감께서도 어쩌실 수가 없었겠지요.”

“이해는 합니다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습니다.”

“…….”

“소진 낭자와의 혼인은 나도 원하는 것이고 할아버지도 또한, 영의정 대감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해도 순서가 틀린 것 같습니다.”

보은군의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민추환은 그저 그 말을 덤덤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간택을 재개해도 그 간택에 소진 낭자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은군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워낙 심성이 고운 인물이니 그 고집을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추환도 이번만큼은 생각을 굽힐 수 없었다.

이것은 가문의 모든 것이 달린 사안이었다.

“마마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적당히 그렇게 대답하며 민추환은 한 걸음 물러났다.

어찌 이리 마음이 약한 것일까, 제 여식인 민 소용과 똑 닮은 보은군의 모습에 민추환은 속이 상했다.

“함께 가시지요. 저도 마침 궐을 나가려던 참이니.”

민추환이 돌아서자, 보은군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니요. 저는 전하와 저하를 뵙고 출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면 여기서 기다리지요.”

“…….”

“마마 홀로 출궁하시는 것, 보기 그렇습니다. 기다릴 테니 다녀오세요.”

민추환은 애써 미소를 그리며 보은군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

“소진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출타 후 돌아온 영의정은 곧장 소진을 찾았다.

어젯밤, 민추환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진은 괜히 영의정과의 대화가 두려웠다.

“무슨 이야기요……?”

“안으로 들어오거라.”

영의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안채로 먼저 들어섰다.

소진은 죽을 상을 하고 안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때 숙자가 쪼르르 달려와 소진의 곁에서 쫑알거렸다.

“아씨, 간택이 재개된답니까?”

“……간택이? 왜?”

“안방마님 하시는 말씀 들었는데, 곧 아씨 혼담을 준비한다고 하던데요?”

“내…… 혼담을?”

“예. 간택이 재개되어서 아씨께서 세자빈으로 뽑히시는 것 아닐까요?”

소진의 속도 모른 채 숙자는 히히거리며 홀로 수줍어 했다.

“세자 저하의 입이 귀에 걸리시겠네……!”

그렇게 말하며 숙자가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멀어졌다.

그 말에 소진은 더욱 조바심이 났다.

보은군과의 혼담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안채로 들어섰다.

영의정이 담담한 얼굴로 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앉거라.”

소진은 차분하게 그의 앞에 앉아,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영의정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소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이리 널 부른 것은. 간택 때문이다.”

“……간택이요?”

“간택이 지금 무기한 중단이 되었다. 곧 재개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전하께서 오늘 선위를 발표하시는 바람에 일이 좀 복잡하게 되었지.”

영의정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는 그녀의 손끝도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반대하던 헌이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르게 생겼으니 아마 자신을 당장 보은군과 혼인을 시켜버릴 영의정이었다.

소진은 꼭, 곧 떨어질 벼락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해서 나는 전하께 청을 넣을 생각이다.”

“……어떤 청이요?”

“간택에서 널 빼달라고. 그리고 보은군과 너와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내내 그녀의 가슴을 졸이게 하던 그 말이 영의정의 입에서 떨어지자 소진의 감정이 울컥, 치솟고 말았다.

“아버지, 그 간택은…….”

“……?”

“소녀의 선택으로 들어간 것이니. 그 마무리도 소녀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말에 영의정의 눈빛이 삼엄하게 번뜩이고 말았다.

이대로 헌과 허망하게 헤어지기는 정말, 싫었다.

***

“아, 보은군 마마…….”

보은군이 대전에 들어서자 상선은 조금 곤란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안에 전하 들어 계시는가? 출궁 전에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상선은 굳게 닫힌 대전 문을 힐끔거렸다.

“저, 그것이……”

그때, 안에서 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대전에서 듣는 왕의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에 보은군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걸렸다.

“전하께서 오늘은 옥체 강녕하신가 보구나. 속히 고해 주시게.”

하지만 보은군의 재촉에도 상선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대전 안에 누군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보은군의 머리를 스쳤다.

“안에…… 뉘, 들어계시는가.”

“예……. 저하께서…….”

“아.”

“전하께서 오랜만에 저하와 다과를 들겠다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시어서…….”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었던 보은군의 입가가 딱딱해졌다.

“아. 하면 방해할 수 없지.”

“…….”

“담소가 끝나시거든, 내가 들렀다 갔다는 것만 좀 전해 주시게.”

“예, 마마.”

그러곤 그는 씁쓸하게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다 한동안 왕을 보러 오기 힘들 것 같아 그는 발을 멈추었다.

보은군은 굳게 닫힌 대전 문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다시 뵐 날까지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전하. 소인…… 출궁하옵니다.”

그렇게 읊조리는 보은군의 눈시울이 어쩐지 붉어졌다.

한 번도 제게 따뜻한 손길을 보인 적 없던 왕이었다.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아들이었지만 아들이라 칭할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괜스레 그런 것들이 보은군의 가슴에 선명해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박자박 대전을 가로지르는 보은군의 등 뒤로 서운함이 가득하게 내려앉았다.

***

-네가 선택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분명 너는 초간택에만 임하고 떨어지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괜스레 호통만 듣고 별채로 돌아온 소진.

호기롭게 재간택에 다시 임하고, 결과에 따라 삼간택까지 보겠다고 했다가 된통 혼만 난 것이었다.

-세자빈에 대한 없던 욕심이 생긴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이대로 간택에서 홀로 빠지면 잡음만 날 것 같아…….

-그건 네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감히 우리 가문을 두고 누가 숙덕대!

-아버지…….

-세자빈의 자리가 탐이 나는 것이라면 조금만 기다려라.

-그것이 무슨.

-너는 보은군의 부인이 될 것이야. 시작은 군 부인이겠지만, 끝은 세자빈보다 더한 것을 쥐게 해줄 것이니.

탐욕스럽게 타오르던 영의정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하면 세자빈은…….

-저하는 수론 파 대신의 여식과 혼인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손을 쓰고 있으니 네가 세자의 빈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

-저하의 배필은 네가 아니다.

소진의 가슴이 더욱 답답해져 왔다.

그녀는 양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묻었다.

걱정했던 대로 영의정은 보은군과의 혼사를 서둘러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헌의 짝까지, 영의정이 정해두고 추진하고 있다니 꼭 가슴에 비수가 박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다 덜컥…… 저하께서 정말 다른 여인과 혼인이라도 하시면?”

갑자기 헌이 다른 규수와 국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치솟을 것 같았다.

“입맞춤……, 책임진다고 했으면서.”

그와 사고처럼 부딪혔던 입술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유독 따뜻하고 다정했던 헌의 모든 행동도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진은 창문을 활짝 열어 어둑해지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하를…… 만나야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하의 얼굴을 보아야겠어.”

이 끓는 마음을 잠재워줄 사람은 보은군이 아닌, 헌이었다.

“저하가 보고 싶어.”

***

다음 날, 소진은 곧바로 헌에게 서찰을 보냈다.

일이 생기거든 문지기에게 윤현의 이름으로 서찰을 보내면 된다던 그의 말을 떠올린 소진은 숙자를 시켜 연통을 보냈다.

하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씨.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아무런 연통이 없었어?”

“예……. 저하께서 많이 바쁘신가 봐요.”

숙자의 대답에 소진은 또다시 풀이 죽고 말았다.

영의정이 헌의 배필을 직접 골라 이어줄 것이라는 말이 생각나, 가슴이 더 조마조마했다.

헌은 소진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언제고 기다릴 것이라 했었다.

그때는 그저 헌이 연모의 감정에 앞서 한 소리라 생각하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이토록 믿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숙자가 굳게 걸어 잠근 대문을 바라보며 소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직접 궐로 들어가 헌을 만날 수도 없고.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굳건할 것 같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더욱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영의정이 선위를 반대하고 헌과는 철저히 상반되는 길을 가고 있으니 그의 여식인 자신까지 혹시 미워진 것은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소진의 마음은 더 아파졌다.

“참, 아씨. 오늘 민 대감마님 댁에 가셔야 해요.”

숙자는 우울해 보이는 소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민 대감 댁……? 보은군 대감의 외조부께서?”

“예.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시었대요.”

애타게 그리운 헌은 볼 수도 없는데, 보은군과의 혼사는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안채에서 영의정이 나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 옆에 최 씨 부인이 다가와 섰다.

“벌써 며칠씩이나 등청을 거부하고 계시는데……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조마조마합니다, 대감.”

영의정은 왕의 선위 선언이 있고 난 후 등청을 쭉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뜻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안 괜찮으면 나를 부르시겠지. 대화를 하자고.”

하지만 하루고 이틀이고 날이 지나도, 궐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왕이 크게 노하며 자신을 부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왕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예상과 크게 빗나가는 것 같아 영의정도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렸고 영의정과 소진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에 닿았다.

“누구냐.”

영의정 하인이 대문을 삐걱 열었고, 민추환이 다급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긴박한 일이 생긴 듯, 민추환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니 대감께서 어찌.”

영의정이 서둘러 마당으로 내려와 민추환의 앞에 섰다.

소진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감. 그것이…….”

“무슨 일입니까?”

“저하께서…….”

저하라는 말에 소진은 가슴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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