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어명을 받들 수 없나이다. (73/125)

73. 어명을 받들 수 없나이다.

2021.06.11.

“영의정.”

왕은 자기 뜻에 강력히 반발하는 영의정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런 반응을 아주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전하, 전하의 뜻을 소신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지만 선위는 시기상조입니다.”

영의정이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게 말하자 화론 파 대신들 모두, 그를 따라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전하께서 아직 강녕하시고 몇 해는 더, 거뜬하게 정사를 돌보실 수 있으신데 이리 일찍 선위를 결정하시게 되면 백성들이 크게 동요할 것이옵니다. 또한.”

“…….”

“타국에서도 이른 선위를 두고 전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잡음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

“하오니 그 뜻을 거두어주시고 백성의 아버지로서 또한, 조선의 주인으로서 조금 더 저희를 보살펴 주시옵소. 전하!”

그 말에 왕이 스르륵 눈동자를 굴려 헌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발아래에 앉아 있는 헌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 채 영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전, 편전에 들기 전에 헌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선위는 이릅니다, 아바마마. 어의도 점점 차도를 보일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자, 헌도 영의정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왕은 옥좌에 더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하루만 더, 딱 하루만 더.

그렇게 버텨온 것이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병세는 나을 기미가 없으니 왕은 점점 지쳐갔다.

-이르지 않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하여 나을 병이 아니다. 이 병마는 점점 더 내 맑은 정신을 갉아먹어 결국엔 내 몸 모두를 지배하고 말 것이야. 그렇게 되면 너를 폐위하고 중전의 아이를 왕으로 삼을 수도 있다.

-아바마마…….

-그런 참혹한 일을 내 손으로 벌이기 전에, 나는 너에게 선위를 해야겠다.

-하오나……. 영의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까짓 게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내 목이라도 베어낼 것이라더냐……!

흥분한 왕과 달리 헌은 침착하기만 했었다.

그의 호통에도 헌은 차분하게 고개를 조아린 채 왕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아바마마의 뜻을 소자가 결코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

-필시 아바마마께서 선위의 이야기를 꺼내시면 영의정과 그의 세력은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하면.

-끝까지 아바마마의 뜻에 반대하며 결국에는 등청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겠지요.

-뭐라? 등청을 거부해?

헌은 찬찬히 고개를 들어 왕을 직시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성균관 유생들을 앞세워 선위의 뜻을 거두어달라, 시위를 벌일 수도 있겠지요.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만약 영의정이 그렇게 나온다면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그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내버려 두면……?

헌의 말에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계획이 있다는 얼굴로 헌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까지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에, 그쪽 세력이 대화를 청해 올 것입니다. 물론 우두머리인 영의정이 직접 아바마마께 알현을 청하겠지요.

-……대화?

-예. 거래하자 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선위를 기꺼이 포기하게 할 수밖에 없는 거래. 혹은 선위의 뜻을 받아들여도 자신들에게 절대, 손해가 가지 않을 것을 대신 쥐려 하겠지요.

-그것이 무엇인가.

-글쎄요. 거기까지는 소자도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하오나 필시 거래를 청해 올 것입니다.

헌의 말을 들은 왕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었다.

거기까지는 미처 왕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이미 헌은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면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

-나는 이 옥좌의 무게를 더 견딜 수가 없다. 난 영의정이 무엇을 내게 요구해 오든 그것을 들어주고 너에게 나의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그래도 무엇을 걸고 거래를 해 올지는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래해 온다 한들, 나는 영의정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또한 선위를 포기할 수도 없음이야.

-소자에게 생각이 있긴 있습니다.

자신감에 찬 헌의 목소리에 흔들리던 왕의 눈빛이 진정이 되었다.

-선위도 거머쥐고 그들의 요구 또한 묵살 시켜버릴 묘안이 있지요.

-그래?

-하니 우선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도록 해야 합니다. 절대 아바마마의 조바심을 그들에게 드러내어서는 안 됩니다.

왕은 헌의 신신당부를 되새기며 표정을 굳혔다.

여전히 영의정은 선위는 아니 된다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고 헌은 그런 그와 기 싸움이라도 하듯 무지근한 시선으로 영의정을 쏘아보고 있었다.

“경들의 뜻도 영의정과 같은가.”

왕이 돌아본 곳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꾸물거리고 서 있는 수론 파 대신들이었다.

수론 파에는 영의정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 없었기에 그저 그들은 크게 반발하는 화론 파의 반응에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들의 뜻도 같으냐고 묻지 않느냐!”

왕은 호통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이렇게 목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한 채, 화론 파 대신들에게 끌려다니는 그들이 못마땅했다.

세자를 뒷받침하고 있는 저들의 힘이 영의정보다, 아니 그에게 견줄 수 있을 만큼 비등하기라도 했더라면 왕은 이런 이른 선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였다.

왕세자를 보필하는 저들의 힘이 조금 더 강력했더라면.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자신이 이렇게 무능한 왕이었나 싶어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신, 신들은…… 전하의 뜻에 따를 것이옵니다…….”

왕의 재촉에 수론 파 대신들은 슬금슬금 영의정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의정은 부러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전하!”

영의정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던 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영의정이 고개를 슬쩍 들어 헌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칠게 교차했다.

그때, 헌은 보란 듯이 왕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어명을…… 받들 수 없나이다!”

그 뒤에 있던 영의정의 미간이 적나라하게 구겨졌다.

“소자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이 소자를 더 가르쳐주고 일러주셔야지요!”

속내가 무엇일까.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의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세자……. 너까지 어찌.”

이미 헌이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왕은 그렇게 대꾸했다.

“선위는 이릅니다, 저하.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편전 안에는 날 선 기운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

“대체 세자의 꿍꿍이는 무엇일까요?”

민추환이 영의정의 곁으로 다가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위를 당연히 반길 줄 알았는데 어찌 화론 파의 편에 서서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지.

영의정도 도통 헌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편전을 나서는 대신들은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헌은 궁인들을 거느리고 편전을 나와 동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헌에게 길을 터주었다.

고고하게 허리를 세운 채, 걸음을 옮기던 헌이 별안간 발을 멈추었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영의정을 넌지시 내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이번만큼은.”

“……?”

“나와 대감의 뜻이 같기를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그 말을 남기고서 헌은 사라졌고, 그의 뒷모습을 영의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헌이 동궁 쪽으로 완전히 발걸음을 돌리자, 두 사람은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러다 덜컥, 전하께서 우리의 거래를 들어보기도 전에 선위의 뜻을 거두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왕 이렇게 저질러진 것, 무엇이라도 하나는 건지고 매듭을 지어야 속이 편할 텐데.”

보은군과 소진을 어떻게 해서든 혼인시키려는 영의정이었다.

“한데 저하까지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니 보은군 마마와 대감 여식의 혼사는 어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어렵다면 간택 재개, 단 우리 소진이는 배제한 채 진행되게 해야지요. 무조건 혼사는 보은군 마마와 이루어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민추환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며 보은군의 처소 쪽을 휙, 돌아보았다.

“하면 난 보은군 마마께 가 보아야겠습니다. 이야기도 전할 겸, 출궁 준비를 모두 마쳤는지도 살펴야 하고요.”

“그러시지요, 대감. 보은군 마마께 안부를 전해주세요. 조만간 제가 사가로 찾아뵙겠다는 말도요.”

한편, 헌은 조금 전 편전에서 선위는 아니 된다며 소리치던 영의정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사리물었다.

헌은 싸늘한 눈빛으로 동궁으로 걸음을 속히 옮겼다.

“전하. 급히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그때, 심란한 헌에게 윤현이 다가와 섰다.

“무엇인가.”

그러자 윤현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헌에게 성큼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김 도령이 추포되었다 합니다.”

“뭐라…….”

“어찌 하올까요?”

“중궁전은.”

“중궁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헌의 눈빛이 기민하게 떨렸다.

생각보다 김 도령이 쉽게 잡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동궁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는 헌은 윤현을 돌아보며 낮게 명을 내렸다.

“나를 잡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으니, 우선 중궁전의 반응을 살피거라.”

“예, 저하.”

“필시 팔아넘길 여인들과 관련이 있는 김 도령이 추포되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일 곳이 중궁전일 테니.”

간택 때 벌어진 사건 이후, 중궁전은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소진을 납치하고 감금했던 중전 쪽 무사들이 여전히 헌의 손아귀에 쥐여 있으니 중전은 더욱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하고 있지만, 그 속은 초조함으로 검게 타들어 갈 것이었다.

그 때문에 헌은 옥에 가둬 놓은 무사들을 더, 심문하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배후가 중전이라는 것을 절대 토설하지 않을 것이니 굳이 시간 낭비, 인력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전의 목을 옥죌 수가 있었으니.

중궁전 쪽으로 돌아서는 윤현을 보는 헌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예……? 선위와 저의 혼인을 맞바꾸실 것이란 말입니까?”

궁을 떠나기 전, 외조부인 민추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보은군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영의정 대감이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니, 아마 한 규수와의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입니다.”

“아…….”

“아주 잘된 일이지요? 마마와 한 규수가 혼인만 할 수 있다면 세자가 왕이 된다고 해도 마마의 앞길은 훤히 트일 것입니다. 그 자리를 노려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쩐지 보은군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둑해지는 그의 낯빛을 살피던 민추환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 물음에 내내 땅바닥만 응시하던 보은군이 고개를 들었다.

“기쁘지 않습니다.”

“예? 어째서요? 마마께서…… 한 규수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민추환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보은군의 눈치를 살폈다.

어렸을 때부터 벗처럼 지내오면서 켜켜이 쌓아온 정이라는 걸, 그의 외조부인 민추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같은 왕의 핏줄이면서.

그것도 무수리 출신의 어미에게 난 헌은 지금 곧,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탄탄한 가문을 가진 민 소용의 아들인 보은군은 출궁을 앞두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민추환의 속은 뒤집힐 것 같은데.

보은군은 내내 왕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니 속이 바짝바짝 탔다.

게다가 마음에 둔 한 규수를 헌과 왕이 탐내고 있는데도 이리 태평하게 출궁 준비를 하고 있다니.

대체 보은군의 진심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 할애비에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마마.”

“…….”

“왕위가 탐나지 않습니까?”

“…….”

“왜 마마는 이렇게 쫓기듯 출궁을 해야 합니까? 한 규수만 꽉 쥐면. 마마께서도 원하는 그 한 규수만 꽉 쥔다면 왕위도 그리고 그 마음도 모두 얻는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조바심을 내며 민추환이 보은군의 손을 맞잡았다.

민추환의 말이 보은군의 속을 더욱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치켜들어 민추환을 바라보던 보은군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소진 낭자도…… 영의정 대감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 오늘, 대감이 한 규수에게 뜻을 전할 것입니다. 혼사 준비도 곧 할 것이고요.”

“혼사 준비를 그렇게 빨리요?”

“서두를 수록 좋은 것이지요?”

“간택이…… 여전히 중단된 채로 있지 않습니까.”

보은군의 목소리가 어둑해졌다.

반대로 민추환의 얼굴이 밝아졌다.

“재개될 것입니다.”

“어찌요?”

“무조건 재개는 되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대신, 한 규수는 제외한 채로 말입니다.”

“누가요.”

“영의정 대감이…….”

그러자 보은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왜! 영의정, 영의정, 영의정!”

“마, 마마……!”

“영의정 대감의 그늘에서 벗어나시질 못하는 것입니까!”

“그, 그것은…… 다 마마를 위한…….”

보은군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서 할아버지께선 어찌 왜, 단 한 번도.”

“…….”

“내 뜻을 물은 적이 없습니까?”

“마마…….”

“원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원하고 있습니다. 소진 낭자를요.”

“……!”

“하지만 이렇게는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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