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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저하께서 나를 욕심 내어주셨으면 좋겠어. (72/125)

72. 저하께서 나를 욕심 내어주셨으면 좋겠어.

2021.06.07.

“해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대감? 어찌 되었든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신하 된 도리로 받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 최 씨는 말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영의정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왕의 선위는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었다.

그때, 고심에 잠긴 듯 최 씨의 물음에도 대답할 생각을 않던 영의정은 밖에 손님이 왔다는 말에 고개를 치켜세웠다.

“공조판서 대감마님 오셨사옵니다.”

민추환의 방문에 최 씨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판 대감이 이 시간에 어찌……?”

“내가 불렀소. 급히 상의할 것이 있어서.”

최 씨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민추환을 맞이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러자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던 민추환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습니다, 부인.”

“실례라니요. 속히 들어가 보시지요.”

최 씨 부인의 말에 민추환이 희미한 미소를 드리운 채, 안채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숙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뭐? 보은군 대감의 외조부께서……?”

소진은 가만히 서책을 읽고 있다, 민추환이 안채에 들었다는 숙자의 말에 흠칫 놀랐다.

“예. 방금 안채로 드셨어요.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이실까요?”

“그러게……. 이리 늦은 시간에…… 어찌.”

그러다 소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씨, 왜요?”

보은군과의 혼담을 본격적으로 주고받으려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안채 쪽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동자에 뜻 모를 슬픔이 넘실거렸다.

-내 것인 것 같은데 내 것이 아니고 하지만 내 것이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낮에 헌이 궐로 돌아가기 전,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내 것이었으면 하지만 나도 그 사람의 것이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연모겠지요?”

소진은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헌의 얼굴을 그렸다.

영의정이라면 간택이 멈춘 지금을 틈타, 보은군과의 혼인을 강행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재간택에 올랐고, 이미 세자빈이 되기 위해 사주단자를 올린 상태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영의정에게 중요치 않을 테였다.

“넌 원치 않은 이와 혼인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니?”

갑작스러운 소진의 물음에 숙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이니? 아니면 맞서 싸워볼 것이니?”

소진이 지그시 숙자를 내려다보자, 숙자는 대수롭지 않게 입술을 열었다.

“쇤네면 당연히 운명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지요? 거부할 힘이 어디 있습니까, 쇤네 같은 사람이.”

“…….”

“하지만 아씨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맞서 싸우시잖아요.”

“……내가?”

“예. 아씨는 언제나 그 얄궂은 운명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인걸요? 늘 그렇게 살아오시기도 하셨고요.”

매번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이 이상하게 소진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있었다.

“왜 아씨답지 않게 앓는 소리세요?”

그러면서 피식 웃는 숙자를 바라보던 소진도 그녀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숙자의 말대로 늘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었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신중해야 했고 또 제 뜻이 맞다는 확신이 서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분명 헌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처음과 많이 달라졌고 점점 더 진심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헌은 그저 그런, 이웃에 사는 사내가 아니었다.

내 것이었으면 해서 덜컥 마음에 담을 수도 또한, 쉽게 욕심을 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왕세자였고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말갛게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소진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나답지 않게 어찌 이리 주춤하게 되는지.”

누군가를 향한 이런 마음도 처음이고 그 상대가 평범하지 않으니 더욱 망설여지는 것 같았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진의 입가에 한숨이 흩어졌다.

보은군의 외조부가 자신의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소진은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서 조심스럽게 별채를 나섰다.

“아씨, 어디 가셔요?”

“……아무래도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들어보아야 할 것 같아.”

***

“하면 등청(登廳)이라도 거부할 요량입니까?”

민추환이 목소리를 은밀히 낮추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영의정도 마찬가지였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그의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뜻을 밝혀야지요.”

“아마 대감께서 등청을 거부한다고 하면 우리의 뜻을 함께할 대신들은 많을 것입니다.”

“상참 때 편전이 텅텅 비겠지.”

“…….”

“수론파들만 편전에 들어 왕의 눈치만 슬슬 보고 있을 텐데. 과연 그것을 보고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해서 그다음은요.”

민추환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생각해두신 것이 있습니까?”

“있다마다……. 내가 대감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기회로 바꿔 우리의 등에 날개를 달아보자고.”

곧 무너져 내릴 하늘이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구멍이 있을 것이었다.

영의정을 주시하는 민추환의 눈가가 옅게 떨렸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민추환은 숨을 죽였다.

“간택.”

“……예?”

“우리 소진이가 재간택까지 올랐던 그 간택을 재개하라 할 것입니다. 단, 우리 소진이를 제외한 뒤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에 민추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영의정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등청을 거부한 우리를 다시 편전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왕은 분명, 나에게 대화를 청할 것이지요.”

“그렇겠지요……?”

“하면 난 못 이기는 척 전하와 거래를 할 생각입니다.”

“거래……요.”

“전하의 뜻에 따르는 대신, 우리 소진이를 보은군의 신붓감으로 윤허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민추환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선위와 우리 보은군의 혼사에 연관성이 없는데. 다짜고짜 그렇게 청을 하면 대감께서 억지를 부린다며 노발대발하지 않겠습니까?”

걱정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민추환이 그렇게 묻자, 영의정이 슬쩍 웃어버렸다.

어쩐지 그 웃음기에 여유가 그득하게 묻어나는 것 같았다.

“연관성이 왜 없습니까?”

“…….”

“화론 파를 움직이게 하려면 화론 파들의 마음을 돌릴 만한 것을 쥐여주어야지요.”

“아?”

“선위를 반대하는 이는 화론 파, 그들을 전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들이 원하는 것인 보은군과 내 여식의 혼사, 그것을 성사시켜 주면 될 일이지요?”

“……!”

“보은군과 소진이 혼인만 하게 된다면 작금의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화론 파 대신들은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것은 그렇지요. 대감의 여식이 우리 보은군과 혼인만 한다면야 옥좌는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으니까요.”

“…….”

“대감의 여식이 없다면 그저 허울만 좋은 왕이 될 것이지요. 여전히 무수리 출신의 어미를 두어 힘 없고 볼품없는 왕.”

민추환이 그제야 영의정의 뜻을 조금 헤아릴 수 있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정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빛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자신이 생각해낸 묘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영의정이 웃음기 가득한 입술을 열었다.

“전하에게나 우리에게나 서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한데, 전하께서 꽤 고민하겠습니다. 선위냐, 대감의 여식이냐.”

“당연히 세자에게 선위를 해주고 내 여식을 중전으로 만들려고 하였겠지.”

“…….”

“내 여식을 세자의 빈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전하셨으니.”

“전하께서…… 무엇을 선택할까요?”

민추환의 말에 영의정은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하긴. 등청을 언제까지 거부할 수도 없고 전하의 뜻을 영원히 꺾을 수는 없으니.”

“…….”

“적당한 때에 우리 보은군과 대감의 여식을 혼인시키는 것으로 거래를 청하는 것은 참으로 기발한 묘책인 것 같습니다.”

“호락호락하게 당할 내가 아니지.”

“…….”

“감히 내 여식을 누구의 빈으로 만들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영의정의 목소리에는 살기(殺氣)가 가득했다.

그 앞에 앉은 민추환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영의정이 한 가지 걸린다는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한데 부원군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부원군이라는 말에 민추환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하긴……. 대감께서 전하께 내세울 거래 내용을 듣게 된다면 아주 난리를 피우겠습니다.”

“중전이 딸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야 중전을 화론 파에서 아주 내쳐버릴 명분이 생기는데.”

“……맞습니다. 어쭙잖게 중전 세력을 화론 파에 두는 것은 위험한 처사라, 화론 파 내에서도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영의정 못지않은 야망을 품은 중전이었다.

그랬기에 행여 그녀가 덜컥 아들이라도 낳아, 제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고 하면 화론 파 내에 균열이 생길 것이 뻔했다.

뿌리 깊은 정통(正統)을 가진 화론 파가 둘로 나뉘어 세력이 분배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중전이 차라리 딸을 낳아 제 욕심을 스스로 꺾고 영의정의 뜻에 따르거나 아니면 아예 화론 파에서 배제해 버리는 것이 답이었다.

“중전이 아들을 낳으면 일이 복잡해지겠지요?”

민추환이 영의정의 얼굴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복잡해지다마다……. 아마 보은군 마마를 치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손쓸 방법은 없을까요?”

민추환의 물음에 영의정이 자신의 이마를 슬쩍 쓸었다.

그러다 오늘 낮에 김 도령이라는 자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거기에 중궁전에서 보았던 봉희 댁의 얼굴도 묘하게 겹쳐졌다.

“……방법이야 만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요.”

“우선은 선위 문제부터 잘 해결할 수 있도록 하지요. 성심껏 대감을 돕겠습니다.”

“잘…… 해결될 것입니다. 참, 내일 보은군 마마께서 출궁하시지요?”

“예. 궐을 떠나시는 우리 마마가 참으로 안쓰럽고 가여웠는데.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보은군 마마께서 흡족해하실 선물이 되었으면 하네요.”

“……예.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민추환은 영의정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언의 눈빛이었지만, 그 속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밖에서 듣고 있던 소진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선위라니! 한데 그것을 이용하여 보은군 대감과 날 기어이 혼인시키려 하는 것인가.’

안채 안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뚝뚝 묻어났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거스를 수 없을 것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보은군과 혼인을 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툭, 툭.

돌계단을 내려서는 소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연모를 담고 있는 자신의 마음과 같아지기를 욕심내지 않겠다던 헌의 말이 떠올랐다.

“저하께서 나를 욕심 내어주셨으면 좋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진의 얼굴 위로 달빛이 느리게 번져갔다.

***

“주상 전하 납시오!”

다음 날, 상참이 열리고 대신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편전에 자리를 잡고 섰다.

왕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에 그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그 사이에는 영의정도 있었다.

편전으로 들어서는 왕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헌도 함께 따르고 있었다.

가끔 상참 때마다 왕세자인 헌이 동참하기도 했기에, 대신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왕이 건조한 얼굴로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찬찬히 대신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가, 무지근하게 입을 열었다.

“내 오늘 상참에 앞서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소.”

때가 되었구나, 싶어 영의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헌이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들도 알고 있다시피, 내 병세가 요즘 더 깊어가고 있소.”

“…….”

“해서 나는 인제 그만 내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요양이나 하며 남은 생을 살까 하오.”

“전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의정이 느리게 눈을 떴다.

“세자에게 선위를 할까, 하는데.”

순간 술렁이던 편전이 싸늘해지고 말았다.

반색하는 수론 파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구기는 화론 파의 반응이 명확하게 대비되었다.

“이제 내 뜻을 받들어 조선을 거느려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우리 왕세자도 장성하였고…….”

왕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던 그때, 영의정이 대신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전하! 선위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

“그 뜻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영의정이 선창하자 기다렸다는 듯, 화론 파 대신들이 그를 따라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뜻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왕은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헌은 여유 넘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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