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내 것인 듯, 내 것 같은. (71/125)

71. 내 것인 듯, 내 것 같은.

2021.06.04.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무슨 책이기에 그리 놀라…….”

헌은 소진이 냅다 던져버린 책을 줍기 위해 다가갔는데.

소진이 몸을 날려 그 책을 먼저 잡았다.

“안 됩니다!”

아니 되고 안 된다며 몸을 날리는 그녀의 행동에 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책을 쥔 소진은 그것이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품에 꼭 안았다.

그러곤 황급히 등 뒤로 감추며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아니 되고…… 뭐가 안 된다는 것입니까?”

“서책이 너무……!”

“너무?”

헌이 성큼, 소진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이리 당황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헌도 괜스레 궁금증이 일었다.

서책을 뒤로 감추며 쭈뼛거리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자 소진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무 불순합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이만 물러나라는 듯이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헌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녀가 뒤에 감추고 있는 서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불순하다면 더욱이 확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어, 어! 아니 됩니다.”

그의 손을 쏙 피하며 소진이 뒤로 더 물러났다.

그러다 바로 뒤에 벽이 있는지 모르고 홱 상체를 뒤로 빼려고 하는데.

“……!”

“위험합니다!”

헌이 몸을 날려 소진의 머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소진은 그만 툭 서책을 손에서 놓고 말았다.

바닥 위로 떨어지려는 서책을 헌이 한 손으로 받아냈다.

기어이 그의 손에 들어가고 만 책.

하지만 소진은 가까이 다가온 헌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조심하셔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헌은 감싼 소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근사한 얼굴에 화룡점정을 찍는 듯한 미소까지 더해지니 소진의 넋이 나가버린 건 한순간이었다.

소진은 헌의 손이 자신에게서 떨어진 후에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아…… 예, 저하.”

그 말에 소진이 서둘러 방을 나서고 헌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사수하려던 서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모의 정의……?”

소진이 읽고 있던 서책을 내려다보던 헌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소진이 나간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홀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연모의 정의를 내려주면 뭣하나. 인정하지 못할 것인데?”

얼굴을 붉히며 냅다 서책을 던지던, 소진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헌이 웃어버렸다.

그가 슬쩍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소진이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헌은 살금살금 그녀의 뒤로 다가가 슬그머니 뒷짐을 지고 섰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슬며시 내려다봤다.

“앗.”

“해서 연모란 무엇이라고 하더이까?”

“저, 저하…….”

고개를 뒤로 젖힌 소진과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헌의 얼굴이 마주했다.

보드라운 미소로 헌이 그렇게 묻자, 소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책에서 말입니다.”

헌이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그렇게 묻자 소진은 멋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글쎄요. 하하하.”

‘결국, 읽었구나.’

모르는 척 대답하자, 헌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내 것인 것 같은데 내 것이 아니고, 하지만 내 것이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예……?”

“난 그것이 연모라고 생각합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잠자코 그를 돌아보았다.

“낭자께서도 집으로 돌아가 연모가 무엇인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지요.”

“…….”

“하면 돌아가 볼까요? 시간이 지체된 것 같은데.”

소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헌을 반듯하게 바라보고 섰다.

“혹, 봉희와 관련된 또 다른 일이 생기거든 연통 주셔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낭자께서도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궐 문지기에게 윤현이라는 이름으로 서찰을 보내놓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저하. 하면 살펴가십시오.”

“예, 낭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는 돌아섰다.

-내 것인 것 같은데 내 것이 아니고, 하지만 내 것이었으면 하는 그럼 마음.

돌아서는 소진의 귓가에 헌이 내린 연모의 정의가 연신 맴돌았다.

그러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실은 말입니다, 저하. 저하께서 나의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해서 소인이 대체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

“전하께서 몇 번이고 저하를 찾으셨습니다.”

환궁하자마자 내관은 헌에게 다가왔다.

얼추, 궐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윤현의 말에 서둘러 입궐하였는데.

왕까지 저를 찾았다고 하니 헌은 어두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곤룡포를 여미며 헌이 서둘러 동궁을 나섰다.

대전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전하, 세자 저하 드셨사옵니다.”

곧 대전에 도착한 헌이 조금 긴장한 채 문 앞에 섰는데.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도착했다.

아무래도 왕의 부름을 받고 온 것 같았다.

헌과 영의정의 시선이 날카롭게 교차했다.

“저하를 뵙니다.”

“드셨습니까, 영의정 대감.”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로 재빠르게 흘렀고.

이윽고 상선은 영의정이 도착했음을 왕에게 알렸다.

“전하, 영의정 대감께서도 드셨사옵니다.”

하지만 왕은 묵묵부답이었다.

헌의 가슴 끝이 서늘해졌다.

고요한 정적이 그의 가슴을 베어내는 것만 같았다.

영의정도 심상찮은 느낌에 예민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전하…….”

상선이 다시금 왕을 부르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왕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상선이 헌을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아바마마.”

헌은 문을 열라는 듯, 눈짓을 해 보이며 서둘러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재빠르게 열렸다가 닫히는 문틈을 영의정이 서둘러 들여다보았는데.

왕이 곤룡포를 모두 벗어 던지고 옥좌가 아닌 맨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곧 문은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혔다.

“아바……마마.”

그 모습을 마주한 헌은 허탈한 듯 미간을 구기며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찌…… 이런.”

말을 채 잇지 못하며 헌은 서둘러 널브러진 곤룡포를 주웠는데.

맨몸으로 바지만 입고서 바닥에 누워있던 왕이 지그시 눈을 떠, 헌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너는!”

헌을 발견하자마자 또다시 낯선 이를 바라보듯 하며 소리 지르는 왕이었다.

헌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 왕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이런 모습을 영의정에게 보여주려 하셨습니까.”

낮고도 무거운 헌의 목소리가 대전을 갈랐고, 왕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저들에게 보이는 것은 날 물어뜯어라, 목덜미를 내어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

“중전마마에게도 영의정에게도…… 이리 나약한 모습은 보이면 아니 된다고…… 소자가 그렇게 누누이 말씀을 드렸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아바마마.”

밀려오는 허탈함에 고개를 푹 떨구던 그때, 헌의 시야에 옥좌 아래 떨어져 있는 종이 하나가 걸렸다.

헌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옥좌로 다가가, 그 종이를 주웠다.

어지(御旨)를 써 내려간 듯 종이 위에는 왕의 필체가 반듯반듯하게 쓰여있었다.

그 중, ‘선위(禪位)’라는 두 글자를 발견한 헌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전하.”

헌은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배고프다며 징징거리고 있는 왕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는 언제나 근엄한 모습으로 왕이 앉아있던 옥좌를 바라보았다.

왕이 선위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 말은, 이제 이 옥좌가 헌의 차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올려다보던 옥좌가 시선에 수평으로 맞닿아 있자, 묘한 감정이 헌의 온몸을 감쌌다.

왕이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마다, 사실 헌은 모든 것을 자신이 쥐고 바로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은 그저 왕이 정신을 찾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위라니.

“…….”

헌은 선위의 뜻이 적힌 어지를 가만히 옥좌 위에 놓고 영의정이 서 있을 대전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아바마마께서 선위의 뜻을 품고 계신다고 해도 영의정을 꺾어야지만 이 옥좌가 제게 무사히 넘어올 수 있겠지요.”

문 너머에 서 있을 영의정을 바라보는 헌의 눈빛이 불같이 타올랐다.

“선위는 아직, 때가 아닌 듯합니다. 아바마마의 뜻을 저자가 알게 되면 반드시 반기를 들고 어떻게든 선위를 막으려 할 테니까요.”

“…….”

“하면 소자는 그 반기를 나의 기회로 삼아보겠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써먹을지, 이제부터 소자가 고민해 봐야겠지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헌은 저벅저벅 옥좌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발을 버둥거리고 있는 왕의 어깨 위에 곤룡포를 걸쳐주었다.

“버거우시겠지만, 조금 더 옥좌를 지켜주세요. 아바마마.”

“배고프다, 이놈들아!”

“소자가 반드시 영의정을 이 손아귀에 넣고 대전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이 소자에게 아바마마의 옥좌를 물려주시지요.”

가만히 왕의 어깨를 따스하게 그러쥐던 헌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상선!”

그러곤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예, 예. 저하!”

“지금 당장 어의를 불러라. 그리고 어의 이외에 그 누구도 대전에 들지 못하도록 하라!”

그 말에 문 뒤에 서 있던 영의정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

“대감마님, 알아보라 하신 것 알아 왔습니다.”

굳은 얼굴로 궐을 나서던 영의정 앞에, 무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섰다.

“김 도령.”

김 도령이라는 말에 영의정이 무관심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추포령이 내렸었던 그자의 이름입니다.”

“김 도령…….”

“아직 그자의 정확한 신분과 식솔,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저잣거리와 숲에서 투전판을 아주 크게 벌렸었다 합니다.”

“투전판을……?”

“청국을 오가는 거상인 것 같은데. 꽤 돈을 만지는 자인 것 같습니다.”

“그자가 한데 왜 도둑질로 추포령이 내려졌던 것이냐.”

“도둑질이 아니라.”

“……?”

“사람을 담보로 투전판을 벌였다 합니다.”

그제야 관심 없던 영의정의 눈빛에 번쩍, 하고 불이 켜졌다.

“사람을……?”

“예. 해서 누군가가 익명으로 제보해 추포령을 내렸었다고 하는데.”

“……!”

“누가 제보를 했는지 또한, 그 죄목도 사실인지는 좀 더 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야 무언가가 서서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진다던 해괴한 소문.

포도청에 직접 찾아갔지만, 모른다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던 포도부장.

그리고 그의 방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포도대장과 좀도둑이라던 김 도령의 인신매매라는 숨겨진 죄명까지.

영의정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더, 소상히 알아볼까요.”

“김 도령이라는 자의 정체를 좀 더 파헤치거라. 확실히 잡혔는지도 알아보고.”

“예, 대감마님.”

궐에서 보았던 봉희 댁의 얼굴이 다시금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왜 하필, 그곳이 중궁전이었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중궁전에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곧, 영의정에게는 중궁전을 통째로 들어낼 기회가 될 것이었다.

“최근 입궐한 새 궁녀들의 명단과 따로 출궁한 이들이 있는지도 알아 오도록 하여라.”

“예.”

“특히, 중궁전을 중심으로.”

무사는 영의정을 명을 받잡고 속히 사라졌다.

영의정은 물끄러미 궐을 돌아보며 눈빛을 더욱 견고히 굳혔다.

내일 해가 뜨면.

왕은 반드시 오늘 자신을 대전으로 불러, 하려던 이야기를 대신들 앞에서 할 것이었다.

선위.

하지만 영의정은 왕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등청(登廳)을 거부할 생각이었다.

“전하께서 그 뜻을 굽히시지 않으면 궐이 어찌 되는지. 내일 똑똑히 보십시오. 전하의 것이라 생각하는 그 궐 안의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는 처참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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