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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연모의 정의. (70/125)

70. 연모의 정의.

2021.05.31.

“늘 어머니의 뜻을 따라온 소자입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기분이었지만 보은군은 그 비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꾹꾹, 감정을 내리누르며 보은군이 민 소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 된다.”

보은군의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민 소용은 그렇게 대꾸했다.

“어머니!”

“너는 절대 품어서는 아니 될 이를 마음에 품은 것이야.”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소진 낭자를 소자의 배필로 삼을 것이라, 마음에 두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

“소자의 안위를 위해서. 오로지 소자의 앞날을 위해서 영의정 대감을 반드시 뒷배로 두어야겠다, 그리 말씀하시었잖아요.”

그 말에 민 소용이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사실, 소진과의 혼담은 소진과 보은군이 태어나던 해부터 영의정과 민 소용의 가문 사이에서 오가던 이야기였다.

당연히 민 소용의 가문에게 한양의 실세인 영의정의 여식을 사돈으로 맞는다는 것은.

저들의 안위는 물론, 보은군이 헌을 물리치고 왕세자 자리에 오를 기회까지 엿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인 일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민 소용의 생각은 달랐다.

겉으로는 자신의 부친을 포함해, 외조부, 외숙부들의 말을 따르는 척 담담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그 위험천만한 모험의 선두에 서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 소용은 잘 알았다.

영의정은 굳이 자신이 나서서, 활시위를 당기지 않는다고.

보은군의 뒤에 서서 보은군과 자신의 가문을 입맛대로 조정하리라는 것을.

그러다 입에 맞지 않으면 단숨에 뱉어버리고 당장 중전의 뒤 편에 서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너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지.”

“그때와 지금 다를 것이 무엇 있습니까?”

“왜 없어. 세자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는데.”

“저하께서는 그때도 지금도 같은 마음이십니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싶어 하시는 마음. 조금의 변함도 없으시지요.”

“…….”

“나를 경계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또한, 그대롭니다. 한데 무엇이 달라졌단 말입니까?”

조금의 양보도 없이 보은군은 민 소용을 몰아붙였다.

따지듯 묻는 그의 말에 민 소용은 느리게 도리질을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이 너울 쳤다.

“네가 마음에 품은 그 여인.”

“…….”

“그 여인을 세자 또한,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큰 변화지.”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하지만 보은군은 채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과 같은 진심이라는 걸, 보은군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말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서렸고 민 소용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보아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어머니…….”

“세자 또한 네가 그 여인을 진심으로 은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

“그렇다면 세자는 그 여인을 갖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할까.”

“아닙니다, 그것은. 저하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하께선 소진 낭자를 얻기 위해 억지로 힘을 쓰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냐?”

안타깝다는 듯 민 소용이 얼굴을 구기며 느리게 입을 뗐다.

“소진 낭자를 욕심내지 않겠다, 그저 그 마음이 너와 같기를 기다리겠다던 너 역시 이렇게.”

“……!”

“행여 그 여인을 뺏길까, 너답지 않게 눈을 붉히고 이리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씁쓸함이 그녀의 목소리 끝에 묻어났다.

보은군은 그 말에, 차마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듯 그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래, 세자는 그렇다 치고. 하면 대비마마의 마음은 어찌 꺾을 것이냐.”

“…….”

“설령 네가 욕심을 내, 한 규수를 갖고자 한다면 넘어야 할 산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다.”

“어찌 셋이라 하시는지…….”

“세자 저하, 대비마마, 그리고 주상 전하.”

“……!”

민 소용의 말에 보은군은 그만 고개를 툭, 떨구고 말았다.

힘없이 떨구어지는 그의 고개에 민 소용의 마음도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다 넘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영의정 대감께서 소진 낭자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저하의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끝이 뻔히 보이는 그 길에, 절대 낭자를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영의정은 결코, 낭떠러지에 제 여식의 등을 떠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은군.”

민 소용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 여식이 굳이 그 길을 가겠다며, 낭떠러지 앞에 선다면.”

“……!”

“영의정은 그 절벽에 기와를 세우고 벽을 쌓아 제 여식의 안식처를 만들 사람이다.”

“그 말은.”

“그래. 기어이 그 길을 가겠다면 영의정은 그 길 위에 꽃을 뿌려줄 것이다.”

설마, 했던 보은군의 얼굴은 그대로 사색이 되고 말았다.

“한 규수가 세자의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지금 세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조선 제일의 왕으로, 그 누구도 음해하고 방해할 수 없는 최고의 군주로 만들어 줄 것이야.”

“……어미가 무수리 출신이라, 결코 칭송받고 존경받지 못할 왕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영의정이 세자와 척을 지고 있으니 나돌 수 있는 말이다.”

“……세자는 미비한 출신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흠 하나 잡을 것 없는 완벽한 왕세자시다.”

“…….”

“그런데 영의정이 그 뒷배로 앉아 있다? 세자의 어미가 무수리 출신이란 그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자가 있을 것 같으냐.”

민 소용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랬기에 보은군은 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부모는 끝이 뻔히 보이는 그 길에 자식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단다.”

“…….”

“나 역시, 민 소용으로 내 가문을 지켜야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하지만 나는 네 어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도 은밀했으며, 어쩐지 처연하기도 했다.

보은군은 슬픈 눈으로 자신의 어미인, 민 소용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네 어미이기에 나는, 그 절벽으로 네 등을 떠밀고 싶지 않구나.”

그러자 잠자코 그 말을 귀에 담고 있던 그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소자가 기어이 그 길을 가야 하겠다면요……?”

제발 그 길을 가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민 소용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

“선위를 생각하고 계신다.”

그 말에 보은군의 얼굴에 무자비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길을 가라, 네 등을 떠밀어도 너는 이제 가지 않겠다며 버텨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마를 적시고 마룻바닥을 탁, 탁 치는 빗소리에 소진이 느리게 눈을 떴다.

“아, 잠이 들었었나 보네.”

소진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빈방 안을 둘러보았다.

함께 전을 방 안에서 나눠 먹은 후, 헌이 잠깐 호위무사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방을 나간 뒤 깜빡 잠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저하께선…… 그대로 환궁하신 것일까?”

살며시 방문을 열어 보니 제법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무사가 여전히 비를 맞고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숙자 옆으로 소진이 다가갔다.

“얘.”

그러자 숙자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아씨, 깨셨어요?”

“어. 깜빡 졸았네? 저하는…… 환궁하셨니?”

“아뇨. 저쪽에서 무사님하고 얘기하고 계시네요.”

숙자가 마당 뒤편을 고갯짓해 보이자, 헌이 대문에서 안 보이는 담벼락에 서서 무사와 이야기 중이었다.

소진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근데. 봉희 서방은 어디로 갔니?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글쎄요? 누이 집에 갔나? 숨었나 봐요. 혹시나 해서?”

“그런가? 그래, 저하 들어오시면 인사만 나누고 우리도 속히 집으로 가자.”

그러면서 소진이 방 안으로 들어와 비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겨울이 다 돼가는데 웬 비가 이리 내리는 것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소진은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봉희의 옷가지가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지난날, 숲속 노름판을 갈 때 빌려 입었던 옷도 그대로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듯 소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봉희의 옷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하의 기억이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분명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약재 같은 것도 있을 것이야.”

소진은 언젠가 봉희에게 읽으라며 빌려주었던, 생활 속에 쓰이는 한약 재료가 적힌 서책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헌을 기다리며 그것이라도 잠시 읽으려 했다.

“여기 어디쯤 놔두었던 것 같은데.”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서책 더미를 뒤적거렸다.

봉희는 평민이었지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소진이 그녀에게 평민일수록 글을 알아야 한다며, 몰래몰래 글자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이건가?”

소진은 서책 하나를 들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가만히 서책을 펼쳐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는데.

“엥?”

찾는 책이 아니었다.

웬 연정 소설인 듯한 이야기가 쭈욱 쓰여 있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소진이 책을 덮으려 하는데, ‘연모의 마음이란.’ 글자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연모……?”

<당신이 누군가를 연모하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법.> 

별생각 없이 펼쳐 든 서책이었는데, 그 문구 하나에 소진의 눈이 조금 커지고 말았다.

<내가 그 사람을 연모하고 있는지, 아닌지 헷갈린다면 이것을 보아라. 그리고 나는 어떤지 빗대어 생각해 보아라.> 

“무슨 이런 서책이 다 있어? 얘는 서방도 있으면서 뭐 이런 걸 보고 난리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소진은 책을 놓지 못했다.

이내 그녀는 홀린 듯 한 장을 더 넘겼다.

<자꾸만 누군가의 얼굴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거나.>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얼굴?”

서책의 글귀를 소리 내 읽던 소진의 눈앞에 갑자기 헌의 얼굴이 그려졌다.

“뭐, 저하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긴 하지. 하지만 봉희 때문에 연일 붙어 다녀 그런 것인걸?”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거나.> 

“기다리고…… 있기는 하였지? 지난날, 보은군 대감이 방문하였을 때, 괜히 저하이길 기대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봉희 일을 해결하기 위해 기다릴 수밖에 없었잖아?”

<다른 이성이 그 사람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쾌하다거나.>

“이건 좀. 불쾌하기는…… 하던걸? 아까 그 규수들이 잠깐이었지만 저하를 진득한 눈길로 바라보았을 때? 그런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 그 규수들이 워낙 밥맛이니까.”

<그 사람이 내게 하는 행동들을 곱씹게 되고 여러 번 떠올리다, 얼굴을 붉힌다거나.> 

“……아.”

이 글귀에서 소진은 낮에 그와 슬쩍 부딪혔던 입술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어진 뺨을 감싸 쥐며 소진은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니야. 그건 너무 큰 사, 사고니까……! 떠올릴 수밖에 없고?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잖아?”

책 속에 적힌 글귀들에 하나, 하나 반박해가며 차근차근 읽어내려가고 있던 그때.

<위의 것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당신.> 

“……?!”

<이미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들에 한 얼굴을 떠올려 맞을까, 아닐까 고심에 잠겨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자를 연모하고 있는 것이다.>

“뭐?!”

<연모의 마음은 이렇게 숨길 수 없다. 당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몸과 마음은 이미, 그자를 은애하고 있다고 당신에게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 문구에 소진은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서책을 그대로 쥔 채, 소진이 멍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무슨 책을 그리 심각하게 읽으십니까?”

헌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허리를 굽히고선, 소진의 얼굴 바로 옆에 자신의 얼굴을 나란히 하며 그녀가 읽고 있는 서책을 바라봤다

“으악!”

그러자 소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서책을 냅다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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