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네 것이 아니다. (69/125)

69. 네 것이 아니다.

2021.05.28.

얼결에 헌의 품에 안겨버린 소진은 호들갑을 멈추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녀가 가만히 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헌은 덤덤한 얼굴로 아궁이 앞을 지나치는 생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갔습니다, 이제.”

쥐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

그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근엄하고 위엄있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 이제 내려주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멋쩍은 얼굴로 소진이 헛기침했다.

그러곤 슬쩍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훌쩍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이 밀려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헌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엄과 진지함이 녹아 있었다.

“예. 갑자기 쥐가 나타나 놀란 것일 뿐입니다.”

얼른 내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 이렇게 앉고 있는 것인지.

요즘 밥을 많이 먹어 꽤 무거울 텐데.

소진은 그의 품에서 내려오기 위해 허리를 연신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진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헌의 팔은 그녀를 놓을 줄을 몰랐다.

“저, 저기……. 저하…….”

한껏 심각한 얼굴로 발아래를 휙, 휙 내려다보고 있던 헌의 어깨를 소진이 톡, 톡 두드렸다.

그제야 그가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내려…… 주시지요.”

소진이 수줍게 말하자, 헌이 그녀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헌은 여전히 한껏 굳은 얼굴이었다.

‘내가 무거워서…… 화가 나신 건가?’

소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등을 돌렸다.

그러자 슬쩍 달아오른 소진의 뺨을 확인한 헌은 흐뭇한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역시 사내다움은 보은군보다는 나지.’

헌은 홀로 뿌듯해하며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리는 소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몸이 많이 무거워지긴 했는데…… 놀라신 얼굴이네. 어제저녁에 밥을 두 그릇 먹는 게 아니었는데.’

등을 돌린 소진은 괜스레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어젯밤 유독 많이 먹은 밥이 신경 쓰였다.

그때, 헌이 흠흠 헛기침하며 소진을 넌지시 불렀다.

소진이 쭈뼛쭈뼛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면 화전을 부쳐 보지요.”

그가 소진이 반죽해 놓은 그릇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반죽에 윤기가 흐르는 것이 참 맛이 있을 것 같습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슬그머니 그의 옆에 붙어 서며 가마솥 뚜껑에 기름을 둘렀다.

“봄이면 여인네들이 화전 굽는 것에 모두 혈안이 된답니다.”

달아오른 가마솥 뚜껑에 기름이 닿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방에 가득 찼다.

“봄에요? 무슨 화전 부치기 경연이라도 열립니까?”

“경연이라면 경연이랄 수 있지요? 모두 예쁘게 부친 화전을 뽐내고 싶어 하니까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흥미로운 이야기에 헌이 그녀에게 집중했다.

“화전을 예쁘게 부치면 잘난 사내와 혼인해 백년해로한다는 풍문이 있거든요.”

“아?”

“해서 봄이면 여인들은 저마다 예쁘게 화전을 부쳐 벗들에게 뽐내며 나눠 먹는답니다.”

“하면 낭자는…… 어떻습니까?”

헌의 질문에 반죽을 동그랗게 뜨던 소진의 손이 멈추었다.

“잘난 사내와 백년해로 할 것 같습니까?”

그 말을 풀어서 해석해보자면.

화전을 잘 부치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소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채, 작게 웃기만 했다.

화전이 제일 자신 있는 요리이기는 하나 그 모양까지 자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봄, 숙자의 말대로 승부욕에 불타올라 열심히 전을 부치기는 했었지만.

다른 규수들만큼이나 예쁘게 부쳐내지는 못했기에 그녀는 묵묵부답으로 웃기만 했다.

곧, 소진이 잘 빚은 반죽을 달아오른 솥에 올렸다.

촤아.

기름과 반죽이 만나 맛있는 소리를 냈다.

소진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반죽을 국자로 살살 눌렀다.

“…….”

한껏 집중한 듯,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반죽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헌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솥에 닿은 면이 익었을까, 소진은 기우뚱 몸을 숙이며 예리한 눈초리로 반죽을 살폈다.

“혹시…….”

가만히 소진의 모습을 살피던 헌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허리를 굽혔다.

잔뜩 심각한 얼굴로 상체를 숙여 익어가는 반죽을 살피던 소진이 그 상태에서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그러자 헌이 자신과 같은 표정과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홱 구긴 채, 진지하다 못해 큰일이라도 난 듯한 얼굴.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밝은 빛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예?”

“눈으로 전을 굽는 것입니까?”

“……아?”

“눈빛에서 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낭자.”

그 말에 소진은 서둘러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러곤 민망한지 콧잔등을 스윽, 훔치며 뒤집개로 전을 꾹꾹 눌렀다.

“솜씨가 비루할수록 정성을 더욱 쏟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뒤집개를 양손으로 곱게 잡았다.

“하나, 둘…….”

“……?”

갑자기 수를 세기 시작하는 그녀의 행동에 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셋! 으차!”

그 조그마한 전을 뒤집는데 기합까지 넣는 소진.

누가 보면 커다란 돌덩이라도 들어 올린다고 착각할 만한 기합이었다.

헌은 그만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완벽하게 뒤집힌 전!

하지만 하얗고 노릇노릇하게 굽혔어야 할 반죽이 새카맣게 타고 말았다.

“아…….”

소진은 그대로 뒤집개를 손에 쥔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실망감이 뚝뚝 흘러내리는 그녀의 얼굴.

화전을 잘 부친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소진이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며 다 타버린 전만 내려다보았다.

-잘난 사내와 백년해로 할 것 같습니까?

방금 전, 헌의 물음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놀리시겠지……? 솜씨가 너무도 형편없어서.’

그저 아무 말 없이 타버린 전을 내려다보는 헌을 향해 소진이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집기가 저의 손에 익은 것이 아니라…….”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소진은 무어라 핑곗거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데 헌이 살며시 미소를 그리며 소진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참으로.”

“……?”

“맛있겠습니다.”

맛있겠다고……?

뜻밖의 말에 소진은 하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탄내까지 솔솔 흐르는 이 까만 전이 맛있겠다니?

소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여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고로 전은 이렇게 노릇…… 흠, 흠. 노릇노릇해야 맛이 있는 법이지요.”

헌도 알고 있었다.

노릇노릇이라고 하기에는 심각하게 많이 타 버렸다는 것을.

그러다 헌은 소진이 쥐고 있는 뒤집개를 대신 들어 이미 탄 전을 슬쩍 들었다.

앞뒤로 폭삭, 타버린 화전을 빈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집기도 낯선 이의 것이라 손에 익지 않았을 텐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요.”

놀리는 것인가, 싶어 소진이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웬일인지 그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왠지 소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못난 화전을 보고도 훌륭하다, 칭찬을 해 주는 사내라면 천년을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때, 한 입 먹으려는 듯 헌이 젓가락을 들자 소진이 서둘러 그의 손을 잡았다.

“아, 드시지 마세요! 새로 부쳐드리겠습니다!”

급히 그를 막았는데, 헌의 시선이 소진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고 있는 그녀의 조그마한 손등 위로.

“앗.”

소진이 황급히 그 손을 거두자, 헌이 가만히 소진의 손등을 끌어당겼다.

놀란 듯 조금 커진 소진의 눈동자 속에 보드랍게 미소 지은 헌의 얼굴이 차올랐다.

그때, 헌이 소진의 콧잔등에 묻은 하얀 밀가루를 검지로 다정스레 닦아 냈다.

“마음을 받았으니 이젠 제가 보답할 차례지요.”

“마음……이요?”

마음을 담아 예쁘게 굽고 싶었지만.

이것을 제 마음이라 하기에는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소진이 속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며 타버린 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 마음은 이리 형편없지 않은데.”

볼멘소리를 중얼거리자 헌이 그녀의 뾰로통하게 부푼 볼을 검지로 콕, 찔렀다.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러곤 ‘자, 해볼까?’ 하는 얼굴로 소진을 아궁이에서 슬며시 밀어냈다.

“처음이니 괴상하게 만들어도 웃으면 안 됩니다?”

헌은 그렇게 말하며 반죽을 한 국자 떠, 솥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치익, 하는 맛깔스러운 기름 소리가 나고.

왠지 익숙한 자태로 헌이 반죽을 꾹, 눌렀다.

잠시 반죽이 익도록 내버려 둔 후 그가 잽싸게 전을 뒤집었다.

그러자 정말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전이 나타났다.

“우와!”

소진이 박수를 짝짝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 부쳐 본 전인데 완벽에 가까운 모양새에 헌도 괜스레 기쁜 얼굴로 소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신기한지, 하하 웃어 버렸다.

“최고이십니다. 저하!”

“내게 이런 소질이 있을 줄이야. 하하하.”

“이제 여기 위에 진달래 꽃잎을 올려야 합니다!”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소진이 한약방에서 사 온 말린 꽃잎을 꺼냈다.

그러곤 헌이 완벽하게 부쳐 낸 전 위에 살포시 얹었다.

어디선가 짙은 진달래 향이 솔솔 풍길 것만 같은 예쁜 화전이 완성되었다.

“역시, 감이 있습니다. 어쩜 꽃잎도 이리 예쁘게 올리시는지.”

“놀리시는 것이지요? 아까부터 계속 시답잖은 칭찬을…….”

싫지 않으면서 소진은 괜히 부끄러워 그렇게 말하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칭찬이 그저,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한 빈말인 줄 알면서도 괜스레 퍼지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소진은 눈치 없이 번지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며 꽃잎 한 장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제가 부쳐 볼 테니 저하께서 꽃잎을 올려보세요.”

“그러지요.”

그가 뒤집개를 소진의 손에 쥐여주고 한발 물러났다.

“자자. 이번에 제대로 실력 발휘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주방에서는 노릇노릇한 전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

“어머니, 소자이옵니다.”

보은군이 민 소용의 처소에 발걸음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민 소용은 보은군의 목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심란해,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보은군까지 왔다니 그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덤덤한 얼굴로 보은군이 안으로 들어섰다.

차분히 민 소용에게 인사를 올린 그가 그녀 앞에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민 소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마마마를 뵙고 오는 길이시라고요.”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닿았습니까.”

“해서 어머니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

“알겠다고, 뜻을 함께하겠다고.”

“…….”

“그리 대답하셨겠지요, 어머니께서는?”

보은군은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평소와 달리 조금은 격앙된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민 소용이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보은군.”

“…….”

“내가 대비마마께 어떠한 대답을 올렸든.”

그 말을 끝으로 민 소용은 아들, 보은군을 향해 슬픈 얼굴을 들어 보였다.

다음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처연한 눈빛에 보은군의 심장은 벌써 아려오는 듯했다.

“한 규수는, 네 것이 아니다.”

간단한 그 말이 보은군에게는 참, 어렵게 닿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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