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사내다움을 과시하는 법.
2021.05.24.
내관의 말을 전해 들은 보은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할마마마와 어머니 쪽 세력은 확연히 다른 정치색을 띠는데 어째서 할마마마께서 내 혼처를…… 어머니와 상의한다는 것인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보은군은 이내 심각한 얼굴로 대비전 쪽을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그곳을 바라보는 보은군의 속이 탔다.
급히 출궁을 결정했을 때도 보은군은 대비의 그 결정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혼인도 안 한 왕자를 어찌 그리 내치듯 서둘러 출궁을 결정 짓느냐며 외가 쪽 세력인 화론파가 거센 반발을 일으켜도 보은군은 그에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이라는 말에 그의 가슴이 예민하게 떨리고 말았다.
“할마마마께서는 분명…….”
소진을 헌의 배필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처(妻)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보다 대비가 직접 자신의 어미인 민 소용을 불러 혼담을 의논한다는 것은.
보은군을 추종하는 화론파 쪽에서도 탐내고 있는 왕비 감인 소진을 아예 헌의 세자빈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심상일 것이었다.
그 순간 보은군은 사람을 탐내서는 아니 된다며 남몰래 소진을 연모하는 자신을 향해 경계의 말을 잊지 않던 어머니, 민 소용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 정녕 이대로 낭자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합니까.”
***
봉희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안채에서 꼭꼭 숨어있던 봉희 남편도 반갑게 헌과 소진을 맞았다.
“왔어, 소진아? 오시었습니까, 선비님.”
“응. 한데 네 누이는? 안 보이시네?”
“너랑 선비님 오신다 해서, 우선 급히 뒷문으로 나갔어.”
봉희 남편은 그렇게 대답하며 거적때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마누라를 찾아주기 위해…… 귀하신 분이 이리 누추한 옷까지 입으시고. 선비님을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봉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 주는 헌에게 봉희 남편은 늘 고마움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헌이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소진의 다른 벗이자, 권세 있는 가문의 자제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 한데 어째 전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입니다.”
헌이 자리에 앉으며 봉희 남편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마누라를 여태 찾지도 못하고 있는데…… 혼자 호의호식하며 잘 살 수 있겠습니까.”
허탈한 목소리로 봉희 남편이 그렇게 대꾸하자 소진이 그의 팔을 툭 쳤다.
“봉희를 찾기 위해 선비님께서 나보다 더 노력하시고 계셔. 나중에 봉희 찾거든 너 선비님께 이 은혜 꼭 갚아야 한다?”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봉희 남편은 몇 번이고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당연하지, 당연합니다, 선비님. 이 한목숨, 평생 선비님께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소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걷어붙였다.
“선비님께서 네 목숨 얻어 뭣 하시려고?”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가 주방으로 향하기 위해 문고리를 쥐었다.
“어디 가려고?”
“화전 좀 만드려고. 너 여기에 꼭 붙어 있거라? 괜히 밖에 나와 호위무사한테 들키지 말고.”
“알겠어.”
소진이 숙자와 함께 방을 나서고 안에는 헌과 봉희 남편 둘이 남겨졌다.
봉희 남편은 슬쩍 헌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하면 저도 자리를 좀 비켜드릴까요, 선비님?”
“예?”
“소진이와 나눌 말씀이 있어 이곳으로 온 것인 듯하여……. 하면 소진이와 편히 말씀 나누시지요. 제가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의 말에 헌이 피식, 웃었다.
“그전에 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헌이 그렇게 말하자 봉희 남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엇입니까, 선비님?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음……. 봉희 댁과 관련된 것은 아니고.”
“예.”
“사적으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서요.”
어쩐지 헌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웠다.
덩달아 봉희 남편도 자세를 낮추며 헌을 바라보게 됐다.
“보은군을 혹, 잘 아십니까?”
보은군이라는 말에 봉희 남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진이와 오래 가까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는 정도?”
“…….”
“한데 보은군 대감마님은 어찌 물으시는지요?”
“보은군과 소진 낭자의 사이가 꽤 돈독해 보여서.”
“아…….”
“처음에는 그 두 사람이 정략혼인이라도 할 사이인가,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헌은 봉희 남편의 낯빛을 살피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러자 봉희 남편이 픽, 웃음을 터뜨리면서 도리질을 했다.
“정략혼인은 무슨. 소진이한테 그런 소리 했다가는 혼쭐이 날걸요?”
“아……. 낭자께서는 별로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보은군 대감마님과의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까?”
자신에 찬 그의 대답에 괜스레 헌의 가슴에 안도감이 스미는 것 같았다.
봉희 남편은 샐쭉 웃으며 대답했다.
“예. 보은군 대감마님과 워낙 어린 시절부터 벗처럼 자라와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소진의 눈에 보은군 대감마님이 남자로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허허, 내 눈에는 보은군만큼 근사하고 멋있는 사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얼굴로 봉희 남편이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헌은 그에게 집중했다.
“물론 보은군 대감마님이 사내 중의 사내이시고 무엇보다 소진이에게 다정다감하고 좋은 분이시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소진이의 사내 보는 눈이 좀 유별난 것 같습니다.”
“유별나다……?”
실은 제일 묻고 싶은 질문이, 그것이었다.
소진의 이상형이 내내 궁금했던 헌.
헌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봉희 남편에게 바짝 다가갔다.
“소진 낭자의 이상형을 혹, 알고 있습니까?”
헌의 물음에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봉희 남편이 은근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슬쩍 헌의 얼굴을 살피며 뜻 모를 미소를 씩, 지었다.
“한데 선비님.”
“……예?”
“외람된 질문이기는 하나.”
갑작스러운 봉희 남편의 말에 헌의 한쪽 눈썹이 솟았다.
“혹 선비님…… 우리 소진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헌이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띠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보입니까?”
“아……. 실례였다면 송구하옵니다. 그냥 제가 보기에는 조금 그런 것 같아서요.”
“흐음.”
“저번에도 뜬금없이 소진이의 정인이라고 말씀도 하시었고…….”
헌은 그만 낮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날, 보은군과 다정한 모습으로 걸어오던 소진을 발견하고는 봉희 남편에게 쓸데없이 투기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모하는 마음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더니.”
“……!”
“정말 그런 모양입니다.”
“참으로 선비님께서…… 우리 소진이를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신 것이옵니까?”
그렇게 되묻는 봉희 남편의 표정이 어쩐지 밝아 보였다.
소진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보은군도 좋았지만 어쩐지 봉희 남편은 헌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근엄함과 위엄이, 보은군에게서는 엿볼 수 없었던 사내다움이 물씬 풍겼기 때문에.
“소진 낭자의 오랜 벗으로서 어떻습니까, 나는?”
“아. 소인이 어찌 감히 선비님을 어떻다 저떻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소인은 선비님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소진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실 것 같아서요. 한데 소진이는 지금 세자빈 간택에 사주단자를 올린 것으로 아는데.”
오히려 봉희 남편이 걱정스러운지 헌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헌은 어쩐지 개의치 않다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하고 있었다.
“하면 왕세자 저하와 내가 낭자를 두고 겨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읊조리던 헌이 다시금 봉희 남편을 바라봤다.
“소진 낭자의 이상형에 내가 좀, 들어맞는 것 같습니까?”
“그럼요.”
봉희 남편의 대답에 헌은 화색이 됐다.
“소진이를 오래 지켜온 벗의 눈으로 봤을 땐, 소진이의 이상형에 보은군 대감마님보다 선비님이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이요?”
봉희 남편이 슬쩍 헌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소진이가 사내다운 것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 말을 남긴 채 봉희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소진이와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선비님.”
“어디 가려고요?”
“선비님께 고마운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봉희 남편이 은근히 너스레를 떨며 바깥의 동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호위무사가 밖을 향해 등지고 돌아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방을 나섰다.
“사내다움! 아시겠지요?”
그 말을 남기고서 봉희 남편은 사라졌고 헌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다움이라…….”
넌지시 그의 말을 곱씹던 헌도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숙자와 씨름을 하고 있는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 그것이 아니라니까요? 고새 반죽하는 법을 잊으신 것이옵니까, 아씨?”
“화전은 너보다 내가 더 잘 부친대도?”
“밀가루를 조금 더 넣어야죠. 이건 거의 밀가루 물인 것을요?”
“내가 규수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화전을 얼마나 많이 부쳤었는데!”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콧대를 눌러 준 적 없었으면서……. 매번 제일 못나게 부쳐 못난 서방 만날 거라고 아씨들이 놀렸잖아요.”
그 말에 헌은 그만 꾹꾹 참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뭐 도울 것이 없나 해서.”
헌이 자신의 콧잔등을 슬쩍 어루만지며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왕세자인 헌이 주방 한가운데 서 있자 그 모습이 신기한지 숙자와 소진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숙자가 서둘러 헌의 눈치를 살피고는 들고 있던 바가지를 내려놓고 손을 닦았다.
“하면 쇤네는 나가 있겠습니다?”
“어?”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숙자가 주방을 나서고 두 사람은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헌은 밀가루 반죽을 손에 잔뜩 묻히고 있는 소진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팔을 걷었다.
그러다 문득, 소진이 사내다운 것을 좋아한다던 봉희 남편의 말이 떠올라 괜스레 팔에 힘을 줘보는 헌이었다.
주먹을 꾹 쥔 헌의 팔뚝 위로 선명하게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밀가루 반죽에 여념 없는 소진의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내가 뭘 좀 도와줄 것은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헌은 괜히 힘줄이 드러난 팔로 국자를 들었다, 숟가락을 들었다 하며 소진의 옆을 얼쩡거렸다.
“괜찮습니다. 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니라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헌은 멋쩍은 듯 걷어붙였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러곤 분주히 움직이는 소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앞치마를 메고 제법 익숙하게 반죽을 하며 맛을 보는 소진의 모습에 헌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반죽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이제 슬슬 전을 구워 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기름을 찾기 위해 허리를 슬쩍 굽혔다.
“기름이…… 어디에…….”
그때였다.
소진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으악!”
들고 있던 숟가락까지 떨어뜨리며 소진은 뒤로 휘청 물러났다.
“무슨 일 있습니까?”
놀란 헌이 소진의 팔을 감쌌는데.
어디선가 찍찍거리는 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쥐, 쥐……!”
막 발밑으로 지나간 자리에서 쥐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소진의 치맛자락 아래로 쥐가 불쑥 나타나 쏜살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악!”
순간, 기겁한 소진이 저도 모르게 헌에게 바짝 달라붙었고.
헌은 이때다 싶어, 소진을 번쩍 안아 올렸다!
사내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