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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67/125)

67.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2021.05.21.

영의정은 황급히 환복한 후, 민 소용의 친부인 공조판서 민추환을 찾았다.

연통도 없이 갑작스럽게 방문한 영의정의 등장에 민추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감께서 어찌……?”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 내 연통도 없이 들렀소.”

“속히 안으로 드시지요, 대감.”

민추환은 영의정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정치적 뜻을 함께했다.

민추환의 여식이 후궁으로 입궐할 수 있게 물꼬를 터준 것도 영의정이었기에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궐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민추환은 단번에 영의정이 자신의 집에 방문한 연유를 꿰뚫고 있었다.

안채로 든 영의정은 부원군에게 처음 선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덤덤하게 굴었던 것과 달리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다.

어떠한 풍파에도 거뜬하던 영의정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민추환은 덩달아 가슴이 불안해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부원군에게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나.”

“예.”

“헛소문이라 하기에는 너무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것이라…… 마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소.”

“무엇인데요?”

영의정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전하께서 선위를 입에 담으셨소.”

그 말이 민추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우리 보은군 마마는……!”

민추환이 잘게 입술을 떨며 그렇게 소리쳤다.

“하면 대비께서 갑작스레 우리 보은군 마마를 출궁 시키라는 명을 내렸던 것도 선위 때문에?”

“그것은 아니오. 대비께서도 선위는 몰랐던 일인 것 같소.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굳이 우리 화론파의 눈초리까지 감수해가며 출궁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으니.”

“……선위라니. 대체 무수리의 배에서 나온 세자를 어찌 그리 감싸고 도는 것인지!”

“그 무수리에게 유일하게 어심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지.”

나지막한 영의정의 음성에 민추환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보은군 마마께서 버젓이 장성해 계시는데.”

“…….”

“왜 허구한 날 그 무수리의 자식만 쥐고 있는 계신 것인지요. 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습니다, 대감.”

그러자 영의정이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보위를 물려주기에는 너무도 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세자니.”

“…….”

“전하께서도 그것을 모를 리 없으니, 선위를 서두르는 것이겠지.”

“전하의 병세가 깊어진 까닭이 클까요?”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하지만 전례에 없던 이른 선위라 나 역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영의정의 말에 민추환이 조금 더 낮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일 상참 때, 그 어심을 밝히시겠지요?”

“이미 대비와 중전에게 뜻을 전하였다고 하니 선위의 뜻을 오래 감추고는 있지 못할 것이오.”

“……우리 화론파는 당연히 선위를 반대하겠고요?”

“잠잠했던 화론파와 수론파의 정쟁(挺爭)이 시작되겠지. 한동안 궐이 시끌시끌하겠구만.”

“우리의 반대로 전하의 뜻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대감?”

민추환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꼈다.

중전을 버리기로 하였으니 영의정에게 남은 것은 보은군뿐이었다.

아무리 왕의 뜻이 확고하고 현재, 국본(國本)의 길을 밟아가는 왕세자가 헌이라고 할지라도.

영의정은 헌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자신의 여식을 그에게 덜컥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 스러질지 모를 허수아비 왕이 될 게 뻔했다.

영의정은 헌이 언제라도 누군가의 손에 처참하게 끌어내려질, 비운의 군주가 되리라고 믿었다.

무수리의 배에서 나온 왕은 끝까지 위엄을 그러쥔 채, 대신들을 통솔하고 백성들을 보듬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선왕들이 그래왔기 때문에.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내쳐진 폐주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언감생심, 감히 무수리의 아들이 군주라니.

그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헌에게 제 하나뿐인 여식을 왕비로 보낼 수 없었다.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여식이 폐비(廢妃)가 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으니까.

굳게 말아쥔 영의정의 주먹도 덜덜 떨려왔다.

“반대만으로 꺾을 수 없다면.”

“…….”

“거래를 해야겠지.”

싸늘한 영의정의 음성에 민추환의 고개가 빳빳하게 세워졌다.

“어쩌면 말이오.”

“…….”

“이번 선위 발표가 나와 그대의 뜻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만.”

영의정의 의미심장한 말에 민추환의 눈빛이 번뜩였다.

***

“저하의 국혼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우리 보은군……의 혼인까지.”

“…….”

“대비마마께서 신경을 써주시다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조아린 민 소용의 뺨이 잘게 떨렸다.

무슨 꿍꿍이일까, 대비의 입술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대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보은군, 장성하시었으니 속히 배필을 맞이하여 백년해로하셔야지.”

“…….”

“어련히 민 소용과 자네의 외가(外家)에서 신붓감을 골라 주상께 아뢰겠느냐마는. 보은군은 내 손자이기도 하니까.”

민 소용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대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온화하기만 한 저 얼굴 뒤에 대체 무엇이 감춰져 있을지, 민 소용은 도통 예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자만큼이나 내가 보은군을 아낀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겠지?”

“알다마다요. 그래서 늘 보은군과 신첩, 대비마마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사옵니다.”

“보답이랄 것이 뭐 있겠는가. 그저 우리 보은군, 좋은 짝을 만나 건강한 자식 여럿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 주는 것이 보답이고 효도지.”

“…….”

“해서 내 우리 보은군의 배필을 직접 골라주고 싶은데.”

“아.”

“어찌 생각하는가.”

그 짧은 순간에 민 소용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치열하게 엉켰다.

속히 대답을 올려야 했지만 어쩐지 그 입술에 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민 소용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민망한 기류는 짙어져 갔다.

“저…… 그것이.”

“하, 하하하. 예상치 못한 말이라 당황했나 보군.”

대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민 소용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민 소용.”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대비를, 민 소용이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물론 자네와 내가 걸어가는 길이 다르기에 내가 보은군의 배필을 살피는 것이 불쾌할 수도 있지.”

“불쾌라니요. 가당치 않사옵니다. 어찌 신첩을 불효막심한 며느리로 만드십니까.”

“예상하겠지만, 나는 우리 보은군이 화론파가 아닌 수론파 대신의 여식과 혼인을 치렀으면 하네.”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직접 마주하니 민 소용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수론파와 대립해온 민 소용의 가문인데 뜬금없이 제 자식을 수론파의 여식과 혼인을 시키라니.

민 소용은 조금 굳은 얼굴로 슬며시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의 뜻은 잘 알겠지만. 그것이 제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지라.”

“…….”

“하오나 마마의 뜻이 그러하다면 전하의 뜻도 그러한 것이겠지요?”

“보은군의 혼담에 주상이 아무래도 가담을 하게 된다면. 나의 뜻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

“아마 민 소용, 자네의 귀에도 곧 들어가겠지만. 주상께서 선위를 생각하고 계신다.”

쿠궁 하는,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는 굉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민 소용의 입가에 짙은 경련이 일고 말았다.

“해서 내가 자네를 이리 따로 불러 내 뜻을 전한 것이야.”

“아…….”

“아직 선위를 입에 담기에는 주상의 나이가 아쉽기는 하지만. 주상이 그리 뜻을 품었다면 지지해 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예, 대비…… 마마.”

“보은군과 우리 세자만큼은 피바람이 불었던 선왕들의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어. 이것 역시 나의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손주들만큼은 그런 피바람 속에 내던져지게 하고 싶지는 않다.”

진심 어린 대비의 말에 민 소용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욕심내고 또는 아우를 의심하고. 살아보니 그것만큼 비참하고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 같더구나.”

“예, 대비마마.”

“해서 나는 우리 보은군만큼은 세자에게 좋은 아우로 남아주었으면 좋겠어서. 세자와 뜻을 함께하는 대신의 여식과 혼인을 한다면.”

“…….”

“세자 또한 경계를 풀고 어린 날의 그때처럼 보은군을 따스하게 보듬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대비의 말에 민 소용은 고심에 잠겼다.

든든한 뒷배를 지닌 채 입궐해, 왕자를 낳고도 민 소용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왔었다.

단 하루도 편히 발을 뻗고 잘 수도, 또한 맘 편히 보은군을 예뻐할 수도 없었다.

제아무리 내로라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입궐해 왕의 여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후궁은 후궁일 뿐.

정비(正妃)가 존재하는 이상,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할 후궁일 뿐이었다.

또한, 아무리 아들이 귀한 왕실에서 왕자를 낳았다 할지라도.

이미 임금이 정한 세자와 적자(嫡子)를 낳을 수 있는 중전이 있는 이상 후궁의 아들은 세자를 위협할 인물이라 하여 경계 대상 1순위가 될 뿐이었다.

민 소용은 괜스레 고되고 힘겨웠던 지난날의 궐 생활을 돌아보게 됐다.

‘전하께서 결국, 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보은군은…….’

영의정과 화론파가 굳건히 존재하는 이상, 제아무리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할지라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던 부친의 말이 떠올랐다.

보은군을 얼마든지 세자에 그리고 왕의 자리에 앉힐 수 있다며 으스대던 모습도 그려졌다.

하지만 민 소용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해서 얻은 왕위를 보은군이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보은군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어쩐지 그녀는 도리질만 하게 됐다.

“신첩은…….”

오랜 생각 끝에 민 소용이 입술을 달싹였다.

“신첩에게 보은군의 혼사를 결정할 권한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신첩은 그저 우리 보은군이 행복하기만을 바라옵니다.”

그 말에 대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민 소용…….”

“대비마마와 제 외가의 정치적 이념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

“그렇다면 신첩 역시, 제 가문의 정치색을 따라야 함이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민 소용의 눈빛에는 진실함이 담겨 있었다.

“보은군의 앞날과 안녕(安寧)만을 놓고 본다면.”

“…….”

“신첩, 대비마마와 같은 생각이옵니다.”

***

“보은군 마마……! 마마……!”

내일이면 출궁을 하게 된 보은군은 마지막으로 화원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저 멀리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은군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내관은 숨을 헐떡이며 보은군 앞에 멈춰 섰다.

“하아, 하아. 그, 그것이…….”

“호랑이라도 보았느냐? 숨 좀 고르고 이야기를 전하거라.”

보은군이 낮게 웃으며 화원에 물을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관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보은군 마마…… 지금 대비전에 소용 마마께서 들어 계시옵니다.”

“어머니께서 대비전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조하게 대꾸하며 보은군은 화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예…….”

“한데 그것이 왜?”

“…….”

“어머니께서 늘 할마마마께 문후 인사를 여쭈러 가지 않으냐?”

“문후 때문에 납신 것이 아니라 따로 대비마마의 연통을 받고 들른 것이라 하옵니다.”

“그래? 아마 내 출궁 때문에 할마마마께서 어머니를 부른 모양…….”

“그것이 아니오라.”

보은군의 말을 끊으며 내관이 속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의…… 혼처를 두고 상의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그 말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화원에 물을 주고 있던 보은군의 손이 멈추었다.

“나의 혼처를…… 어찌, 할마마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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