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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그 입술이 달콤해서. (66/125)

66. 그 입술이 달콤해서.

2021.05.17.

낮고도 은밀한 부원군의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 속에 담긴 ‘선위’라는 두 글자 때문에 영의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대체 그 무슨……!”

영의정은 부원군이 실언이라도 한 것이 아니냐는 듯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부원군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처럼 사색이 된 상태로 영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막…… 궐에서 듣고 오는 길입니다, 대감.”

그러곤 마치 영의정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의 팔을 꼬옥 붙들고서는 벌벌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의 선위에 제일 큰 타격을 입을 사람은 부원군과 중전이었다.

중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목숨을 위협받을 테였다.

세자가 왕의 자리에 오르면 당연히 헌을 추종하는 수론파들은 헌의 입지에 가장 위협을 가할 인물로 중전의 아이를 꼽을 것이었다.

중전이 덜컥, 왕자라도 생산한다면 그 아이는 궐에서 유일한 적통(嫡統)이니 당연히 제거 대상 1호가 될 것이었다.

“사실이오?”

“대비마마와 중전마마를 불러 전하께서 직접 그리 전했다 합니다.”

부원군과 중전, 그리고 영의정은 중전이 왕자를 생산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중전이 왕자만 낳아준다면.

작금의 세자를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중전의 아들을 앉힐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왕은 중전이 출산을 하기도 전에 세자에게 선위하려 한다니.

이건 필시 중전과 영의정의 세력을 꺾어 버리기 위해 왕이 선방을 날린 것이었다.

영의정의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중전이 왕자를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요즘 들어 중전의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과감하게 중전을 버릴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세자에게 덜컥 선위해 버린다면 보은군을 군주의 자리에 앉히려던 영의정의 또 다른 계획도 수포가 되는 것이었다.

“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표정을 굳히는 영의정을 부원군이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부원군에게 있어 영의정은 작금의 왕보다 더한 존재였고 자신과 제 가문을 구원해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대감…….”

조마조마한 얼굴로 부원군이 다시금 영의정을 불렀다.

“우선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거로 하지요.”

“방책이 있소? 선위 소리를 쏙, 들어가게 할 만한.”

그런 비책 하나쯤은 당연히 갖고 있을, 아니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영의정이었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반짝이며 부원군이 영의정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어쩐지 부원군을 돌아보는 영의정의 눈빛에는 냉기만이 그득했다.

겨울바람처럼 매섭게 시린 그의 시선에 부원군의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런 방책이…….”

영의정이 말끝을 흐리며 부원군의 끓는 눈길을 외면했다.

‘있다고 한들, 내가 너에게 알려줄 연유는 없지.’

영의정은 그 말을 꾹 삼키며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뚝딱하면 나오겠소?”

“……예?”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짧게 혀를 차며 영의정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순간 부원군은 심장에 큰 돌덩이가 떨어진 듯, 그 가슴에 큰 파문이 이는 것 같았다.

“대감…….”

부원군은 그저 영의정을 낮게 부르며 넋이 나간 얼굴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 상참 때 뵙도록 하지요, 그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부원군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며 보교에 오르는 영의정의 모습을 지켜만 볼 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영의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만한 얼굴로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멀어졌다.

부원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며 허탈함에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내가…… 국구(國舅)인데. 한낱 영의정 따위에게 매번 이리 굽신굽신거려야 한다니.”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하던 대원군의 시선은 궐 쪽으로 향했다.

이것이 전부 제멋대로, 망아지처럼 구는 자신의 수양딸인 중전 때문인 것 같아 부원군의 속이 꺼멓게 타들어 갔다.

***

입술이 맞닿은 후,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 헌과 소진.

두 사람은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서 정면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그런 헌의 한 손에는 곱게 말린 영산홍 꽃잎이 들려 있었다.

“아씨……! 아씨!”

그때, 저 멀리서 호위무사와 함께 따라오던 숙자가 소진을 부르며 곁으로 다가왔다.

헌과 어색함에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걸어가던 소진은 괜스레 숙자의 부름이 반가웠다.

“응?”

숙자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대답하던 소진은 힐끔, 헌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헌도 힐끗 소진을 바라보다가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바로 집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숙자가 그렇게 물으며 뒤에 서 있는 호위무사를 한번 바라보다, 은밀하게 속삭였다.

“어딜 가시려고요……, 저하랑.”

“봉희네 좀 들렀다 가려고.”

“봉희 댁에요?”

“응, 저하께서 좀 시장하다 하시어…….”

헌의 눈치를 살피면서 소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숙자는 그런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소진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니 진수성찬 차려줄 궐을 놔두고 왜…… 먹을 거라곤 풀 쪼가리뿐인 봉희 댁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꿍얼거리던 숙자는 순간, 헌과 눈길이 스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럼 쇤네는 먼저 봉희 댁으로 달려가 봉희 댁 서방에게 아씨와 저하께서 납실 것이니 숨어 있으라, 전하겠습니다.”

그러고 그녀는 서둘러 봉희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소진이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는데.

“나란히 좀 갑시다.”

“앗.”

성큼 다가온 헌이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의 미소를 보니 소진의 입술에도 절로 보드라운 곡선이 드리웠지만.

‘입술……!’

한약방에서 사고처럼 부딪쳤던 헌의 말캉하고도 뜨거웠던 입술에 시선이 절로 묶였다.

왜 이러지, 하면서도 자꾸만 그의 입술만 바라보게 됐다.

시선을 떨쳐내려 해도 연신 곱게 맞물린 헌의 잇새만 응시하게 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쿵.

“……?!”

소진은 자신의 이마를 주먹으로 콩, 쥐어박고 말았다.

‘엉큼해서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헌이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이마를 쥐어박은 소진은 혼자 꿍얼거리면서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예? 아, 아닙니다.”

소진은 황급히 헌에게서 등을 돌리며 앞서 걸었다.

어쩐지 그녀가 왜 저러는지 연유를 알 것도 같았다.

빙그레 웃음을 한가득 베어 물고서는 헌이, 조심스럽게 소진의 뒤에 다가섰다.

길게 늘어진 그녀의 그림자 위로 헌의 커다란 그림자가 살며시 포개졌다.

“아니 입술은 왜 쳐다보는 거야, 대체.”

“…….”

“뭐 할 거라고 눈길은 자꾸만 거기로 향하는 건지.”

애석하게도 소진의 혼잣말은 헌에게 고스란히 닿고 있었다.

풉,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참아내며 헌은 발소리를 죽였다.

연신 도리질을 하다가, 또 발아래 돌부리도 툭툭 걷어차면서 걷는 소진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바닥만 푹 내려다보며 걷는 그녀 앞으로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꼬마 무리를 발견 못 한 듯, 소진은 그저 고개만 숙인 채 걸을 뿐이었다.

“……!”

그때, 이러다 꼬마 무리와 소진이 부딪힐 것 같다는 생각에 헌이 잽싸게 그녀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위험합니다, 낭자.”

본의 아니게 소진을 뒤에서 끌어안게 된 헌.

소진의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꼬마 무리는 소진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달려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진이 멋쩍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았다.

“잠시 생각 좀 하느라……. 감사합니다.”

그러곤 다시 봉희의 집으로 가기 위해 그에게서 슬쩍 물러났는데, 헌이 집요하게 소진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요?”

“예? 아, 그것이.”

“…….”

“집에 키우는 강아지 밥을 오늘 주고 왔던가……. 숙자가 분명 챙겨줬을 텐데, 뭐. 이런 생각요……?”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던 소진이 슬쩍 말꼬리를 늘어뜨리자 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런 생각?”

능청스럽게 소진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헌은 겨우 참았던 웃음을 결국, 뱉고야 말았다.

느닷없는 헌의 웃음에 소진의 뺨에 홍조가 선명하게 피어났다.

“왜…… 웃으시어요?”

그녀의 물음에 헌은 고개를 슬쩍 숙이며 소진이 앞으로 다가갔다.

“나도 한 대 쥐어박아 주시지요.”

“……예?!”

토끼 눈을 한 소진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빙긋 웃는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소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헌이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입술이 아른거려 제 이마를 쥐어박는다면.”

“……?!”

“나는 내가 쥐어박는 것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그럽니다.”

“그, 그 무슨.”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개진 소진.

그런 그녀의 달아오른 귀를 헌이 슬쩍 그러쥐며 입술을 뗐다.

“아른거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니까.”

“저, 저하…….”

“그 입술이 너무 달콤해서 다시 맛보고 싶다.”

“아.”

“이런 불순한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소진의 굳게 맞물렸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고 말았다.

귓가를 간질이던 헌의 목소리는 소진의 뺨을, 그리고 가슴께를 간질이고 있었다.

슬쩍 스쳤던 그의 달달한 입술만큼이나 그 사이로 흐르는 음성도 꿀 같았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춘삼월이었다면 벌과 나비가 꽃인 줄 알고 착각해, 저 입술에 내려앉을 수도 있겠다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헌은 감싸고 있던 소진의 귀를 살며시 놓으며 뒷짐을 지었다.

“곶감 하나를 얻은 기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소진의 옆에 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난데없는 그 말에 소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곶감이요?”

“예.”

한 걸음, 두 걸음.

찬찬히 발길을 내디디며 헌이 대답했다.

“우는 아이도 달랜다는 곶감 말입니다. 울던 아이도 곶감 하나 주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이야기.”

“…….”

“낭자께서도 들어보셨지요?”

그러자 소진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예. 한데 그것은 왜요? 누가 웁니까?”

“기나긴 외사랑에 이 마음이 서글퍼 엉엉, 울고 있습니다.”

헌의 너스레에 소진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낭자와 스친 입술은 꼭, 우는 내 마음을 달래주는 곶감 같으니.”

“……!”

“나는 이 곶감 하나로 또 울음을 그치고 또 열심히 낭자를 연모하겠지요?”

따스함이 가득 묻어난 그 음성에 소진이 고개를 젖혔다.

“부담 주지 않겠다더니.”

“……?”

“눈치를 주는 것입니까? 그 마음, 속히 받아달라?”

이번에는 소진이 너스레를 떨자, 헌이 그녀처럼 말간 미소를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 곶감도 너무 달구나, 이 말을 해주고 싶어 그러는 것이지요.”

“……?”

“꼭, 낭자의 입술처럼 말입니다.”

“아, 저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 말을 남기고 헌이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소진은 그런 헌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

“어찌 신첩을 찾으시었나이까.”

대비 앞에 차분하게 앉은 민 소용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비가 직접 자신을 이곳까지 불렀을 때는 달리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다.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문후를 여쭙는 민 소용이었지만.

이렇게 따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려니 새삼 대비는 민 소용이 어렵게 느껴졌다.

영의정만큼은 아니지만, 화론파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민 소용의 외가였기에.

선뜻 대비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민 소용 역시, 그런 대비의 어려운 마음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살며시 고개를 조아렸다.

“편히 말씀하소서, 대비마마.”

“내가 민 소용 자네를 이리 따로 부른 것은…….”

보은군을 수론파의 집안의 여식과 혼인을 시켰으면 한다는 자신의 말을 듣고 과연 민 소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비는 은근한 긴장감과 함께 입술을 열었다.

“보은군의 혼인 때문에 상의를 좀 했으면 하는 것이 있어 부른 것이다.”

“보은군……의 혼인이요?”

보은군의 혼인.

명료한 그 말에 어쩐지 민 소용의 동공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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