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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첫, 입맞춤. (65/125)

65. 첫, 입맞춤.

2021.05.14.

“조 상궁은 지금 당장 수론파 대신들의 여식 중, 군(君)부인으로 마땅한 인물이 있는지 물색해보도록 하라.”

대비의 명을 받잡은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민 소용에게 대비전으로 오라, 연통을 넣거라.”

“예, 대비마마.”

화론파인 영의정의 반대 세력인 수론파의 여식 중 한 명과 보은군을 혼인시킨다면 영의정은 하는 수 없이, 보은군을 버리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쉬운 방법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행할 수 없었던 이유는 보은군의 생모인 민 소용의 외가(外家)가 화론파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비는 민 소용을 불러들여 보은군을 수론파 세력의 가문과 맺어주자고 설득시키는 일만 남았다.

쉽지 않을 것이란 걸, 대비는 잘 알았다.

하지만 왕이 선위의 뜻을 품은 이상, 세자를 무사히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는 대비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민 소용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보은군과 세자,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부디, 민 소용이 제 뜻을 헤아려 주기를 대비는 바랄 뿐이었다.

***

“화전을 만들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헌이 소진의 손을 잡아 이끈 곳은 한약방 앞이었다.

갑자기 왜 이곳으로 온 것인지 소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약방에는 어찌……?”

그녀의 물음에 헌이 생긋 웃었다.

휘어지는 그의 눈매 위로 옅은 햇살이 슬쩍 내려앉았다.

“이 추운 날, 꽃을 구할 수 없으니 말린 것으로 대체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소담히 맞물려 있던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아……!”

진달래꽃은 연산홍이라고도 불리며 한약재로도 종종 쓰이고는 했다.

그러니 당연히 한약방에 말린 꽃잎이 있을 테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소진은 손뼉을 딱 치며 한약방 안으로 들어섰다.

향긋한 약초 냄새가 밀려왔다.

“계시오?”

소진이 치맛자락을 살며시 움켜쥐고서는 한약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헌에게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잘 말린 약초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 사이에서 말린 진달래꽃잎을 발견한 소진.

“아, 저기에 있구나?”

하지만 자신의 머리에서 세 뼘이나 더 위에 있는 그것을 쥐기에는 무리였다.

한약방 밖에 서 있던 헌은 가만히 고개를 젖힌 채, 말린 꽃잎을 올려다보는 소진을 발견했다.

까치발을 하고서 슬쩍 손을 뻗어보던 그녀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손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것을 꺼내려는 것 같은데 한눈에 보아도 소진의 손에 닿지 못할 곳에 있었다.

‘내가 꺼내줘야겠군.’

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높이 있는 물건을 쉬이 내려주며 소진에게 다시 한번 더, 자신의 사내다움을 뽐내려는 헌.

이내 소진의 뒤에 살포시 서서는 단숨에 진달래꽃잎을 손에 쥐었는데.

동시에 소진도 발을 딛고 올라갈 것을 찾아서는 그것 위에 올라서서 말린 꽃잎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

꽃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그녀가 미처 무언가를 딛고 올라서서 꽃잎을 꺼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헌은 흠칫 놀라며 소진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손을 한번, 이내 눈앞에 있는 소진의 조그마한 머리를 한번 바라보았다.

“아.”

소진 역시, 딱딱하게 굳어서는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손이 닿지 않아 당연히, 발 디딜 것을 찾아 그것을 꺼내려고 했는데.

헌이 이렇게 도와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밀착한 채로 두 손을 포개고 있었다.

소진은 자신의 등 뒤에 닿은 탄탄하고 뜨거운 헌의 가슴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아.”

그녀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이자, 그제야 헌이 황급히 감싸고 있던 소진의 손을 놓았다.

그러곤 한 걸음 물러나기 위해 발을 떼려는 순간.

“……!”

촉.

예고 없이 빙그르르 돌아서던 소진의 입술이 그만 헌의 입술에 닿고 말았다!

순식간에 말캉한 두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고 둘은 토끼 눈을 하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위의 모든 빛이 거두어진 듯, 두 사람의 시선에는 서로의 얼굴만 담겼다.

또한,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소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고 헌의 반듯한 미간 역시, 옅은 떨림과 함께 구겨졌다.

“앗!”

“미안합니다, 낭자!”

그리고 동시에 굳어버렸던 것처럼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놀라며 떨어졌다.

소진은 황급히 헌에게서 등을 보이며 자신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헌은 넋이 나간 얼굴로 뒤돌아있는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찰나에 스친 입술이었지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사고였지만.

둘의 입술에는 서로의 온기가 깊이 각인되고 말았다.

‘이를 어쩌면 좋아……!’

불덩이가 떨어진 듯 소진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등을 돌려 헌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그저 뒤 돈 채 벽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 소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여전히 자신의 입술에 남아 있는 듯한 소진의 온기에 그의 입가에 느른한 곡선이 걸렸다.

단내가 났다.

참으로 달콤하고 향긋한 단맛을 그녀의 입술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한약방에서 풍기는 특유의 달큼한 향내인지, 그녀의 입술에서 맛보았던 단내인지는 모르겠지만.

헌은 여러 번 자신의 입술을 검지 끝으로 훑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낭자.”

그의 부름에도 소진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선 어깨만 떨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아, 예! 예…… 뭐.”

소진은 허둥대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슬쩍 가렸다.

그러곤 황급히 그에게서 벗어나 한약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아!”

헌이 그런 소진을 막아서며 그녀의 뜨거운 어깨를 쥐었다.

잘 익은 능금처럼 빨간빛으로 물든 소진의 뺨을 내려다보던 헌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소진의 시선이 절로 그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러자 좀 전에 자신의 입술 위에 나비처럼 날아와 앉던 그의 부드러운 온기가 연신 떠올랐다.

“책임지라면 지겠습니다.”

달콤하고 촉촉한 헌의 입술 사이에서 단호한 음성이 흘렀다.

소진의 동공이 옅게 떨렸다.

“비록 실수였지만. 낭자의 입술을 허락 없이 범한 것 말입니다.”

그 말에 소진은 그 커다란 눈만 하염없이 깜빡였다.

***

“저것이 무엇인가.”

영의정을 태운 보교(步轎)가 땅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방 앞에 웅성웅성 모인 백성들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졸들이 김 도령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화를 쭉, 쭉 뜯어내고 있었다.

영의정의 등장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포졸들은 영의정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대감마님……!”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나지막한 영의정의 물음에 포졸 하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며칠 전 붙인 절도범의 용모화인데 오늘 잡혀서요…….”

포졸은 포도대장이 시킨 대로 거짓을 고하며 영의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영의정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포졸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포졸들도 방을 떼어내고는 사라졌다.

“용모화를 가지고 와 보아라.”

그제야 영의정은 무사를 향해 은밀히 말했다.

무사는 아직 방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가, 김 도령의 용모화를 뜯어 가지고 왔다.

영의정은 한참 김 도령의 용모화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한양 곳곳에 방을 붙였던 절도범입니다.”

무사가 그렇게 말하자 영의정이 천천히 도리질했다.

“아니지…….”

“예?”

혼잣말로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영의정을 무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아니라고.”

그러다 영의정은 목구멍에 힘을 주어, 그 말을 뱉어냈다.

“무엇이…….”

“단순히 잡범(雜犯) 하나 잡자고 방을 이리 요란스레 붙여?”

영의정의 눈동자가 형형해졌다.

“이리 곳곳에 방을 붙일 만한 절도범이었으면 내 귀에도 이자의 범행이 들려도 진작 들려왔어야 했다. 하지만 근래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내, 들어보지도 못하였지.”

“예…… 대감마님.”

“게다가 이리 훤한 얼굴로 갓까지 쓴 절도범이라.”

영의정의 말에 무사 역시, 김 도령의 용모화를 다시금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영의정의 낯빛에 묘한 웃음기가 서렸다.

“누가 보아도 반가의 자제같이 생긴 도령이…… 절도를?”

이내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얼굴을 구겼다.

“한데 말이지. 이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단 말이야.”

그러다 영의정은 포도청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읽은 무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입술을 열었다.

“하면 제가 포도청으로 가, 일을 소상히 알아볼까요?”

영의정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도리질을 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포도청이 아니라도 알아볼 수 있는 길은 많으니.”

“예.”

“저번에도 마을의 여인들이 실종된 것으로 포도부장을 찾았을 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예, 그리하였지요.”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만 바보 되는 것이지. 그때 포도부장이 내가 포도청에 들러 그 일에 관해 물었다는 것을 포도대장에게 분명 고하였을 텐데.”

“…….”

“포도대장에게서 지금까지 아무런 연통도 없는 것을 보면. 정말 관심도 가질 필요 없는 단순한 가출 사건이든지, 아니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큰일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김 도령의 용모화를 무사에게 휙 건네며 영의정은 다시 보교로 돌아왔다.

그러곤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며 무사를 향해 말했다.

“한데 만약 후자라면. 정말 한양에서 나도 모르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더불어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지.”

“아.”

“그런 것이라면 내가 그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포도청 사람들에게 드러내서는 안 되지. 포도청에 내가 직접 발걸음 했다는 걸, 그와 관련된 자들의 귀에까지 이미 닿았을 수도 있는데.” 

“…….”

“평소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도 없던 내가, 그저 절도범이라고 붙인 방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 사람을 보냈다?”

“…….”

“오히려 그들의 관심이 내게 쏠릴 것이다. 영의정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구나, 뭔가 냄새를 맡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영의정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져갔다.

“내가 몰라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 대감마님.”

“관심 없는 척 좌시하다가 기회를 잡아야지. 그들에게 내 눈을 피해 도망갈 기회를 주면 아니 되지 않겠느냐?”

무사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한양 안이 어수선하단 말이야. 궐도 그렇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영의정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세자가 우리 소진이를 적시 적격에 구한 것 하며. 중궁전에서 보았던 봉희 댁의 얼굴도…… 여전히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는 하나…… 느낌이 좋지 않아.”

“…….”

“또한, 마을에 여인들이 실종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포도청 사람들이나. 이 용모화도 그렇고.”

찬찬히 그 말을 뱉어낸 영의정이 뺨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우선 이 용모화 속의 인물에 대해 소상히 알아 오라.”

“예, 대감마님.”

“그 모든 수상쩍은 일들이 나와 우리 소진이를 혹,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면. 나는 결코 좌시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니.”

그러곤 이내 집으로 돌아가자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이자 영의정을 태운 보교가 들렸다.

그런데 그때, 저잣거리 쪽에서 부원군을 태운 보교가 나타났다.

중전의 양부(養父)이자 왕의 장인.

순간 영의정과 부원군의 시선이 스쳤고 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 보교를 돌려 그에게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부원군의 등장에 영의정은 다시 보교를 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뵙니다, 부원군 대감.”

건조한 영의정의 인사에 부원군은 황급히 보교에서 내려 영의정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부원군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만 같았다.

같은 화론파이지만 중전의 행보가 점점 제 뜻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자 영의정의 심기가 불편하던 찰나였다.

“영의정 대감! 내 안 그래도 지금 대감을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소.”

“……나를 어찌.”

영의정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부원군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자 부원군은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힘겨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막, 궐을 다녀오던 참입니다.”

궐이라는 말에 영의정의 눈매가 매섭게 번뜩였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나…….”

이내 부원군은 주위를 삼엄히 살피더니, 영의정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오늘 전하께서 선위의 뜻을 내비쳤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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