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럼 좋아해 줄 건가, 나.
2021.05.10.
“영의정이?”
김 도령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을 뱉어놓고도 괜찮은 것일까, 포도대장은 우물쭈물했다.
“영의정이 왜. 무슨 일로.”
싸늘한 김 도령의 음성에 포도대장이 우물거리던 입술을 열었다.
“며칠 된 이야기이기는 하나…… 제가 없던 날, 영의정께서 직접 포도청에 발걸음을 했다고 합니다.”
“해서.”
“포도부장에게 마을의 실종된 여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김 도령이 매섭게 소리치며 포도대장을 쏘아보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것이야!”
“그저 포도청 앞에 모여있는 백성들을 보고 의문을 가져 물었던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런 사사로운 일에 직접 나설 영의정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엇을 물었다고 하더냐.”
“실종된 여인들에 관해서요. 하지만 포도부장도 그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수색을 해도 증거 하나 나온 것이 없다, 그리 고했다고는 합니다만…….”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포도대장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김 도령 역시 영의정이라는 의외의 이름에 그 낯빛이 굳어져 갔다.
“영의정이라…….”
왕 못지않은 권세를 가진 영의정이었다.
김 도령도 영의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일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일은 더 골치 아프게 꼬일 것이었다.
“설마 영의정 쪽 세력이 행수님의 추포령을 내리라, 명한 것일까요?”
포도대장은 표정을 굳힌 채 서안만 내려다보고 있는 김 도령을 바라보았다.
김 도령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아니.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면.”
“영의정이 굳이 나설 이유가 없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이 복잡한 일에 나설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양반의 일도 아니고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니.”
“예에…….”
“나설 이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익명을 내세워 서찰을 보낼 인물도 아니지.”
“…….”
“영의정인 내가, 이 자를 잡겠다. 얼굴 한 번만 드러내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일을 굳이 익명으로?”
“아.”
“그만한 권세를 지는 이가 영의정인데. 궐로 가져가겠다는 협박 없이도 충분히 포도청의 모든 세력과 다른 대신들까지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니.”
김 도령이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도대장도 놀라 몸을 일으키며 김 도령을 바라보았다.
김 도령은 한참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영의정과 그자들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면……?’
그럼 자신에게 더 불리하게 일이 돌아갈 것이었다.
“이번 추포령을 직접적으로 명한 자가 영의정은 아니겠지만.”
“……?”
“아무래도 영의정이 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내 얼굴이 그려진 방을 보고 필시 의아하게 여겨 포도청을 다시 들를 것이다.”
“예.”
김 도령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포도대장을 향해 묵직하게 입술을 뗐다.
“하면 내게 다시 고하거라. 영의정까지 이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면 부인과 나는 청국으로 떠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지고 말 것이다.”
“예. 행수님께서 청국으로 떠나실 수 있게 성심껏 돕겠나이다.”
“익명의 서찰을 보냈다는 그자를 먼저 잡아 없애버려야겠구나.”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김 도령이 무미건조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그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워, 포도대장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조만간 나를 잡았다는 허위 소문을 내거라.”
“예?”
“익명의 서찰을 보낸 뒤 여태 포도청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니. 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제일 먼저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
“그때, 그놈과 그년의 정체를 파악해 바로 제거할 것이다.”
말을 마친 김 도령은 건조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
“호위무사가 따르고 있으니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기는 그렇고.”
헌은 여전히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소진의 호위무사를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벗에게 집을 좀 빌립시다.”
“……예?”
“마침 시장하던 찰나였는데. 점심이나 먹고 환궁하지요.”
“시장하십니까?”
헌의 말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요?”
“하면 어쩌지요……? 봉희의 집에 먹을 게 있으려나.”
소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헌을 바라보다,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숙자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되겠구나, 소진은 숙자를 향해 미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봉희의 집으로 가시지요. 숙자에게 상 좀 차려달라고 해야겠습니다.”
“…….”
“어차피 호위무사는 저하의 집이 봉희의 집인 줄 알고 있으니 무리 없을 것 같아요.”
소진이 생긋 웃으며 앞서 걸음을 뗐다.
그러자 헌이 슬쩍 그녀의 팔을 그러쥐었다.
“저 여종의 솜씨 말고.”
“……?”
“나는 낭자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 먹고 싶은데.”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헌이 말하자 소진의 뺨이 당혹스러움으로 굳어갔다.
‘내가 차려준 음식……? 못 드실 텐데.’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서 슬쩍 입술만 벌리고 있자, 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고개를 까딱거려 보였다.
“가시지요. 가는 길에 장을 보면 되겠지요?”
“아, 저 그것이.”
소진이 서둘러 헌의 옷깃을 쥐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니 어쩐지 소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한 번도 그녀의 요리 솜씨를 본 적은 없지만, 헌은 예상할 수 있었다.
반가의 규수인 소진이 직접 음식을 해먹은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요리를 직접 맛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실력이 가늠되었다.
당황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헌은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왜요, 낭자?”
“저 그것이, 제가 요리를…….”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헌이 슬며시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곤 허리를 조금 굽혀 소진을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예?”
“나도 못 합니다, 요리는.”
“아.”
“뭐, 그럴 수 있지요.”
“하오나 소인과 저하는 다르지요. 저는 여인이면서 칼질도 제대로 못 하니…….”
“뭐가 다릅니까?”
소진의 말에 헌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낭자도 삼시 세끼, 차려주는 밥만 먹으니 칼을 들 일도 없고 직접 쌀을 씻을 일도 없잖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여인이라고 하여 모두 음식 솜씨가 빼어나야 하고 사내는 당연히 못해도 된다는 건, 너무 우스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지막한 헌의 음성이 소진의 가슴에 살포시 닿았다.
이내 헌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어 말하는 헌의 눈빛에서는 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남녀가 유별(有別)한 것이 당연지사고. 그리 생각하며 행동하라 배우고는 있지만. 낭자는 남녀 구분 짓지 않고 응당 사내가 해야 할 일도 거뜬히 해내려 하며.”
“…….”
“여인이라는 이유로 물러서지도, 비겁해지지도 않으려 하니, 나 또한 낭자를 그리 대하여야 할 것 같아서요.”
“저하.”
어찌 이리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건지.
어쩜 이렇게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인지.
그 순간, 소진은 흐뭇한 얼굴로 헌을 바라보게 됐다.
‘이런 사내라면…… 정말 평생 함께 살아도 좋을 것 같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번에는 헌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에서 꿀이 뚝, 뚝 떨어졌다.
소진이 반달 눈웃음을 짓자, 헌이 그런 그녀의 예쁜 웃음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낭자.”
헌이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자 소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반칙 아닙니까?”
“예? 무엇이요?”
난데없는 그의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찌 그리 예쁜 얼굴로 나를 보십니까.”
“아……!”
“내 마음을 어디까지 애태우시려고요?”
적나라한 그 말이 내심, 듣기 좋았다.
소진은 슬쩍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안 좋아해 준댔나……?”
그러면서 소진이 새침하게 등을 돌리자 그녀의 옆으로 헌이 성큼 다가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뺨 위로 드리웠다.
“그럼 좋아해 줄 건가, 나?”
“……!”
갑작스럽게 닿은 그림자와 헌의 달콤한 목소리에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여전히 근사한 그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어떻게 하면 낭자가 날 좋아해 주려나……?”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소진의 마음이 달떴다.
헌이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순간 심장이 멎을 뻔한 소진은 서둘러 그에게서 시선을 접으며 돌아섰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헌이 생긋 웃고 말았다.
“어라. 좋아하고 있는 건가, 이미?”
그러면서 다시금 그가 소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한눈에 보아도 열기가 오른 소진의 뺨.
헌이 묘하게 미소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녀의 얼굴도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슬쩍, 그가 손가락을 뻗어 소진의 뺨을 콕 찔렀다.
“뜨거운데?”
“흠, 흠흠! 볕이 너무 따가워 그럽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유혹하지 마시지요?”
다시 새침데기로 돌아온 소진이 시침을 뚝 떼며 눈을 깜빡거렸다.
“노골적으로?”
“예. 유혹은 원래 은근한 맛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웃음을 꾹, 참으며 휘적휘적 앞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헌의 입가에 실소가 터졌다.
“이거 지금…… 내 유혹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 소진을 향해 달려갔다.
“같이 갑시다!”
앞서 걷던 소진이 뒤를 돌아, 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십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걸 말하기보단, 낭자가 할 수 있는 음식을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
“아……. 그렇네요.”
소진이 멋쩍게 뺨을 쓸어내리며 시장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숙자와 함께 만들어 본 음식이 뭐가 있을까, 찬찬히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화전!”
그러다 지난봄.
화전을 예쁘게 굽는 여인이 시집가서 잘 산다는 이야기 때문에 규수들과의 모임에서 화전을 구워본 적이 있었다.
물론 워낙 손재주가 없는 소진이라 규수들 사이에서 제일 못난 화전을 굽긴 했지만.
꼴찌라는 굴욕을 맛본 후, 승부욕에 불타올랐던 소진은 숙자와 함께 봄 내내 화전을 구웠었다.
그 덕분에 이 자리에서 당장 화전을 부치라면 부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전이라는 말에 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겨울이 다 되어 가는 이 계절에 화전이라니?
헌은 어색하게 웃으며 커다란 그 눈만 깜빡거렸다.
“화전……이요?”
“네! 화전은 잘 부칠 자신 있는데. 지금 진달래꽃을 구하기는…… 어렵겠지요?”
소진도 추운 이 날씨에 화전을 만들기에는 무리라는 걸, 곧장 깨달았다.
“그럼 뭐가 좋을까…….”
자신 있게 화전을 외칠 때와 달리 조금 위축된 얼굴로 시장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진.
그런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헌이 미소 머금은 입술을 벌렸다.
“하면 화전을 만들어 봅시다.”
“화전을요? 한데 꽃을 구하기가 힘들 것인데.”
“내게 좋은 방법이 있지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헌은 그렇게 말하며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쥐었다.
***
“선위라…….”
한편, 대비전에서는 대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심에 잠겨 있었다.
왕이 선위의 뜻을 내비쳤으니, 내일 아침 회의 때 분명 대신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꺼낼 것이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비마마?”
그때, 연거푸 깊은 한숨만 내쉬던 대비를 향해 상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대비는 느리게 도리질을 했다.
깊이 팬, 대비의 주름살이 선명해졌다.
“세자를 부정하는 세력들에게 기름을 붓는 꼴이 될 수도.”
“……아.”
“영의정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무수리 출신의 어미를 둔 세자를 지금껏 부정해온 그가 아니던가.”
“대비마마…….”
“그런 세자가 왕위에 앉는다? 내내 감추고 있던 발톱을 드러낼 인물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 겨우 입을 열었다.
“영의정의 날개 하나를 꺾는 수밖에. 그래야 내가 영의정의 여식을 손주 며느리로 삼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날개라 하시면.”
고개를 치켜세운 대비의 눈시울에 핏발이 섰다.
“지금 영의정의 어깨에 달린 날개는 두 개다. 해서 주상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지.”
“…….”
“하나는 중전의 배 속에 있는 아이, 다른 하나는 보은군. 하지만 중전이 아직 아들을 낳은 것은 아니니, 그건 뒤에 생각할 일이고.”
그녀의 말에 상궁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잘게 떨었다.
“하오나 보은군 마마는……!”
“보은군의 혼사를 서둘러야겠다.”
“지금 세자 저하의 간택이 중단된 상황인데…… 어찌.”
“세자의 간택이 중단된 것이 천운인 듯하구나.”
“……?”
“보은군을 영의정의 반대 세력인 수론파의 여식과 혼례를 치르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