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영의정 대감이 찾아왔었습니다.
2021.05.07.
소진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우선 소진이 위험에 처한 것 같아, 그녀와 규수 사이를 갈라놓기는 했지만.
이 거적때기는 뭐냐는 말에 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소진에게 우악스럽게 달려들던 규수는 순간, 말을 멈추고 헌의 뒷모습을 빤히 훑었다.
비록 차림새는 허름하기는 했지만, 훤칠한 키와 딱 벌어진 어깨.
심상치 않은 헌의 풍채에 규수는 눈을 휘둥그레 떠서 그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소진은 그 규수의 눈빛을 읽고는 슬쩍 헌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어머…….”
그러자 헌이 빙그르르 몸을 돌며 소진의 뒤에 섰다. 이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규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른 규수들도 헌을 보고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양에 자신들이 모르는 이런 미남이 있었던가,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서 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누구……?”
한양의 웬만한 옥골선풍(玉骨仙風)의 사내들은 다 꿰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처음 보는 헌의 얼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헌이 대체 누구인지,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게 말이어요……? 저리 생긴 얼굴이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마 천민이라 몰랐던 것이 아닐까요? 차림새가 영, 천민 같은데? 양반가 자제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그런 규수들을 바라보며 소진이 핏,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곤 감히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듯 헌을 가로 막고 서서는 표정을 굳혔다.
“제 벗입니다.”
“……?”
“하면 저는 벗과 선약이 있어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진이 규수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반 체면은 한 규수가 다 떨어뜨리고 있네.”
그 말에 이번에는 소진이 아닌 헌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천민이 벗이라니. 참으로 우습군요.”
“다른 천민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양반과 천민이 이리 함께 어울려 다니니 천민이나 평민들이 양반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이지.”
“그러게요. 한데 뭐, 한 규수의 천민 벗이 어디 한 둘입니까? 격 떨어지게 뭣 하는 짓인지.”
중얼거리는 규수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헌.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규수들은 흠칫하며 서둘러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규수들의 비아냥거림에 소진이 한마디 하려 입술을 달싹였는데, 헌이 불쑥 나섰다.
“말씨는 생김새에서 비롯되며.”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헌의 낮은 목소리는 참으로 근사했다.
규수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닿았다.
“또한, 태도에서 인성이 보인다고 하지.”
“……?”
“내로라하는 가문의 규수들인 것 같은데. 배움이라고는 티끌도 보이지 않고.”
“지금 무슨……!”
“격식과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으니. 어쩜 다들 생긴 대로 불손한 언사를 행하며 불량한 인성이 그 태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인지.”
“……!”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것 없는 것 같아, 참으로 신기합니다.”
“뭐라?”
그 근사한 목소리가 뱉어낸 말은 규수들의 뺨을 붉히게 했다.
정곡을 찌르는 헌의 말에 규수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헌을 바라보았다.
조곤조곤, 입가에 웃음기까지 머금은 채 헌이 말을 이어가자 규수들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천민 주제에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
그러자 헌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뒷짐을 지었다.
그렇게 소리치는 규수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헌이 세자라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그에게 무례하게 호통치는 규수.
되레 그녀를 바라보는 소진만 냉가슴이 되고 말았다.
‘저…… 저, 세자 저하께…… 무슨 망발을!’
놀란 소진이 입술만 꾹꾹 깨물며 헌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헌은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싸늘하게 올려다보는 규수들을 찬찬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생긴 대로 불손한 언사를 행한다고? 불량한 인성이 태도에 드러난다고?!”
소진에게 사납게 달려들던 규수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치며 헌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헌은 ‘그런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리 방자하게 구느냐.’ 하는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소진은 그 뒤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만 보았다.
“나는 홍문관의 여식이다!”
그렇게 소리치는 규수를 향해 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
“흠. 홍문관 대감께 이런 여식이 있었다니. 내 기억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네까짓 게 무엇인데 기억하고 말고 한다는 것이냐, 천것 주제에! 양반인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아무리 양반이라도 도를 넘는 말에 소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기억해 달라고 한 말 아니었나.”
“뭐라.”
“묻지도 또한, 궁금하지도 않았던 그대의 가문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또 기억해 달라 그리한 줄 알았지요.”
능청스럽게 그 말을 이어가던 헌이 제 턱 끝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입술을 뗐다.
“어쩐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
“내 벗이…… 그대들이 아닌 이 한 규수라서 말입니다.”
그 말에 규수들의 시선이 소진에게 향했다.
소진도 그런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헌의 강직한 입술이 매끈하게 벌어졌다.
“차림새와 가진 것만으로 사람의 신분을 구분 짓고.”
“……”
“사람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며 안하무인(眼下無人)한 태도로 구는 벗을 곁에 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헌의 얼굴이나 그 음성이 여간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내는 투도 또한, 윽박지르는 것도 따지는 것도 아니니 규수들은 그저 볼만 붉힌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리 훈훈한 사내가 저들의 치부를 찌르니 창피함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헌은 느리게 웃으며 소진을 돌아보았다.
“세자 저하께서 왜 한 규수에게 편파적으로 대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소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소진 낭자, 대체 이 무례한 자가 벗이란 말이어요?!”
“무슨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긴 것만 번지르르하지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갑시다. 우리가 이런 천민하고 왜 마주하고 있어야 합니까?”
“그래, 갑시다! 가요!”
평민들과 어울려 다니는 소진의 모습이 그렇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기에 규수들은 콧방귀만 끼며 모두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진과 헌.
소진은 규수들이 제법 멀리 사라진 뒤에야 헌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인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송구하옵니다. 저들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그러자 헌이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도리질을 했다.
두 사람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낭자가 왜 사과를 합니까. 무례하게 군 것은 저들인데.”
“어찌 되었든 저들과 벗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지난날, 함께 모임을 가졌던 일원으로서 대신 무례함을 사과하여야 할 것 같아서요.”
“한데 평민들과 종종 어울려 다니나 봅니다? 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한두 번 마주친 것이 아닌 듯하여.”
소진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헌을 향해 돌렸다.
“지금 사라진 벗도 그렇고……. 소인이 평민들과 허울 없이 지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해서 양반 체면도 없느냐는 둥, 신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둥, 혼도 종종 났지요.”
“그렇습니까?”
묵묵히 걷기만 하던 헌이 걸음을 멈추고 소진을 돌아보았다.
“나는 칭찬을 해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세상에는 넘지 말아야 하고 경계해야 할 선들이 있으니까요.”
“…….”
“하지만 소인은 그것들에 사람을 나누는 선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지한 소진의 말에 헌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감히 이런 말씀을 조선의 왕세자이신 저하 앞에서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
“전하의 세상인 이 조선을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옵고, 그저 이제 막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 백성의 바람. 그 정도로 여겨주시옵소서.”
그러자 헌이 기분 좋은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고개를 젖혔다.
그의 얼굴이 흡족하다는 듯이 밝아졌다.
“그 정도로 여기기에는.”
“……?”
“날카롭지만 너무도 애정 어린 시선인 것을요? 왕세자인 나보다 더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나는 참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은 젖혔던 고개를 바로 세워 소진을 응시했다.
“해서 말입니다.”
“예?”
“이대로 환궁하기가 아쉬운데.”
“그대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
“대체 나를 찾으러 다니는 그년과 그놈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김 도령은 우악스럽게 서안을 내려치며 읊조렸다.
자신의 얼굴은 이제 한양 모든 곳에 붙어, 집 밖을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포도대장이 이 말을 할까, 말까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을 발견한 김 도령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내가 쥐여준 돈이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인가.”
“……예, 예?”
갑작스러운 김 도령의 말에 포도대장은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면 다른 이가 준 금은보화가 더 탐스러웠던 것인가.”
포도대장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결코, 행수님을 배반하고 다른 이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알고 있는 것을 토설치 않는 것인가.”
김 도령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포도대장은 잠시 망설이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이…… 소, 소인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찌 몰라! 포도청에서 일어난 일을 포도대장인 그대가 어찌 모른단 말이냐!”
김 도령이 크게 호통치며 언성을 높이자 포도대장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발자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참입니다!”
“하면 고발자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들의 말만 믿고 감히 내 얼굴이 그려진 방을 한양 천지에 붙였다?”
“…….”
“내가 곤경에 처하면 그동안 내 돈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내 거사에 일조한 그대 또한, 목숨줄이 간당간당해질 것이라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인가?”
“압, 압니다. 하지만……!”
포도대장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익명의 서찰에 행수님이 그동안 해왔던 일이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증거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요.”
“…….”
“그리고 그 서찰과 함께 행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화가 있었습니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는 김 도령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자는…… 이미 저와 행수님의 관계 또한,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뭐라? 너와 내 관계까지?”
“당장 행수님에 대한 추포령을 내리지 않으면 이 서찰과 증거, 그리고 제가 행수님의 일에 개입했다는 증좌까지 모두 가지고 궐로 가겠다고.”
“……!”
“그리 협박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말한 포도대장의 얼굴빛은 사색이 되어갔다.
김 도령이 이내 피식, 나지막한 조소를 터뜨리며 입술을 뭉근하게 감쳐물었다.
“해서 그 협박에 감히 나의 얼굴을 팔았다?”
“하오나 결코…… 결코! 행수님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방만 붙이라 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자가 궐로 그 서찰을 보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참입니다, 행수님. 지금까지 포도청 그 누구도 저와 행수님이 거래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저 지금처럼 조금만 더 숨어 계시면…… 그럼, 시간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내칠 것만 같은 김 도령의 얼굴에 포도대장은 애원했다.
그의 애원을 김 도령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포도청에서는 지금까지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진 것에 대한 단서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지요. 관심도 없습니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니, 그저 부녀자들이 가출한 것이라고 그리 믿고 있습니다.”
김 도령은 깊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얼른 청국으로 피신해야 하는데 뱃길마저 막혔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하는 시늉만 며칠 하다, 부둣가를 지키고 서 있는 포졸들을 물릴 것입니다. 하면 그때, 속히 부인과 함께 청국으로 건너가시지요.”
그 말에 김 도령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궐로…… 가지고 가겠다, 협박을 했다?”
“예?”
“궐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또한, 궐이라 함은 지극히 왕을 뜻하는바.”
“…….”
“협박을 하고자 했으면 그렇다 할 대신들을 지목해도 되는데, 굳이 겁박용으로 궐을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중얼거리던 김 도령은 그날, 숲속 투전판에서 보았던 헌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혈기 왕성한 젊은 사내였다.
제 또래 같아 보이기도 한 그 사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치밀하게 진행했던 거사를 단번에 뒤엎어버리고 증거까지 모두 모아 왕에게 고하겠다는 배포까지 가진 사내.
또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며 눈빛을 단단히 하던 그 여인도 떠올랐다.
대체 그 둘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리 한양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일까.
김 도령이 고심에 잠겨 이마만 어루만지고 있던 그때, 그의 눈치를 살피던 포도대장이 입을 열었다.
“한데 행수님.”
“…….”
“하나 걸리는 게 있습니다만.”
포도대장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김 도령이 얼굴을 들었다.
“좀 지난 일이기는 한데…….”
“무슨.”
“포도청에 영의정 대감이 찾아왔었습니다.”
순간, 김 도령의 눈이 번뜩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