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조 숙원의 죽음에 대한 의문. (62/125)

62. 조 숙원의 죽음에 대한 의문.

2021.05.03.

“선위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전의 목소리가 대전의 공기를 갈랐다.

대비는 신경질적으로 중전을 쏘아보며 입술을 벌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겁니까, 중전!”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중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왕은 평온한 얼굴로 대비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마마마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전하……!”

철저히 자신을 무시하는 왕을 향해 중전이 다시금 소리쳤다.

그러고 그의 앞으로 좀 더 다가가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전하께서 아직 이리 강건하신데 어찌 선위를 입에 담으십니까!”

그런 중전을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던 왕이 우악스럽게 말했다.

“내가 강건해 선위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세자가 왕이 된다니 그 사실이 아니꼽고 두려워 이러는 거겠지.”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내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중전?”

“신첩도 세자의 어미입니다! 세자를 내 배로 낳지는 않았지만 입궐 후, 신첩은 단 한 번도 세자를 내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면 더욱이 나의 선위를 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의 말에 대비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비에게 있어, 왕의 선위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세자 헌을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왕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몇 해는 거뜬히 옥좌에 앉아 조선을 통솔하여야 할 왕이 그만큼 쇠약해져 버렸다는 의미니, 안타까웠다.

헌이 대비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이기도 하지만 작금의 왕 역시, 대비에게는 둘도 없는 아들이었기에.

왕이 지금의 병세를 훌훌 떨쳐내 헌에게 군주로서의 위엄과 그 자격을 모두 가르쳐준 후, 적시 적격에 선위를 해주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였다.

하지만 왕의 병세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선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하의 선위를 반길 궁인은 없습니다.”

“중전께서 제일 잘 알지 않소? 내, 이 정신병의 심각성을.”

“……전하!”

“아니, 어쩌면…… 그대는 내 이 병세를 이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신첩이 감히 어찌……!”

“그러니 내가 선위를 입에 담자마자 이리 노발대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왕은 주먹을 바짝 움켜쥐고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곤 헤집을수록 구역질이 나는 듯한 자신의 병세에 치를 떨고야 말았다.

“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 우리 세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

“그대를 조 숙원이라 착각해,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원자로 삼겠다, 왕세자 자리에 앉히겠다, 보위를 잇게 하겠다……!”

“아.”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니…… 중전께서는 내 병세가 더 심해지기를.”

“……!”

“해서 언젠간 중전이 낳은 아이가 지금의 세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을 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나의 선위에 발끈하는 것이 아니오?!”

왕의 말에 중전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대비는 그런 중전을 건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중전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씹어 뱉듯 말을 뱉어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 아이도…… 전하의 아이입니다!”

“…….”

“왜…… 어째서 왜. 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남의 아이 보듯 하십니까?”

원망 서린 눈으로 중전은 왕을 직시했다.

하지만 왕은 그마저도 외면하며 등을 돌렸다.

“배 속에 있는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만은.”

그러곤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가 중전의 아이라서.”

“…….”

“해서 나는 어쩐지 정이 가지 않습니다.”

“전하!”

“연유를 모르겠습니까?”

왕은 호통치며 중전을 세차게 돌아보았다.

대비는 묵묵히 당의 안에 손만 집어넣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

높아지는 두 사람의 언성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이토록 왜 중전을 박대하고 경멸하는지를……!”

“전하.”

“아직도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왕의 말에 중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겁게 입을 뗐다.

“조 숙원의 죽음.”

“……!”

“나는 여전히 조 숙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하! 배 속에 아이가 듣고 있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면 제가 조 숙원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씀입니까?”

억울하다는 듯 중전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왕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꾹 맞다물고 말았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대비를 바라보았다.

“소자, 선위를 생각하고 있으니 어마마마께서도 이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왕은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고개 숙인 중전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대전 문밖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 소용은 묘한 얼굴로 대전 상궁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전하를 뵙기가 그럴 것 같군.”

“예, 소용 마마.”

“돌아가 있을 테니 전하께 내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발걸음을 하였다고 전해줄 수 있겠는가.”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민 소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조 숙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전에 대전 안에서 들려왔던 왕의 말이 메아리처럼 민 소용의 귓가에 퍼지고 있었다.

***

“아……?”

소진은 그대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앞에 우르르 몰려온 것은 함께 다과 모임을 하는 반가의 규수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여인들의 등장에 헌이 흠칫 놀라며 소진에게서 슬쩍 떨어졌고.

소진 역시, 서둘러 규수들의 얼굴을 살폈다.

‘휴, 다행히 함께 간택에 들었던 규수들은 없구나.’

소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표정을 굳혔다.

“여기서 다들 만납니다? 이리 뵈니 반갑네요.”

하나도 안 반가운 얼굴로 소진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규수들이 피식거리며 소진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헌은 괜스레 약초방 앞을 서성이며 소진과 규수들을 힐끔거렸다.

“반갑기는 합니까?”

“……예?”

톡 쏘는 듯한 말투로 규수 하나가 소진의 앞에 섰다.

“그렇게 다과 모임에는 나오지도 않더니…… 소문에 의하면 세자빈이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하던데. 간택 수업 때문에 모임에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은 것이어요?”

“그러게요. 그래서 우리 같은 것들하고는 겸상하지 못하겠다면서 다과 모임에도 불참하신다면서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소진은 멍한 얼굴로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규수들을 돌아보았다.

헌 역시,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규수들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그것들이 다…… 무슨 말입니까?”

소진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규수들을 응시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한껏, 비아냥거리던 규수 하나가 소진을 세차게 바라보았다.

“이번 세자빈에는 한 규수로 내정되어 있다면서요?”

“……누가 그런 소리를.”

“누가 그런 소리는. 한 규수께서 아주 간택 장에서 티를 팍, 팍 내신다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봐요.”

“지금 간택에 참여했던 다른 이들에게 모두 다- 듣고 오는 길입니다.”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소진도 팔짱을 끼고는 자신을 세차게 노려보는 규수들 하나, 하나를 직시했다.

평소 똑똑하고 자신들보다 권세 있는 가문의 여식인 소진을 싫어하며 은근히 따돌리던 규수들 무리였다.

“무엇을 다- 듣고 오는 길인데요?”

“초간택 때는 세자 저하께서 직접 납시셔서 한 규수의 실수를 무마시켜 주었다면서요?”

“예, 그리했습니다.”

당당한 소진의 대답에 듣고 있던 진짜 세자, 헌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그걸 저렇게 부정도 하지 않고. 맞다고 하면 미움을 더 받을 것인데.’

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웃음기를 머금고서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뭐요……?”

“그리했다고요. 세자 저하께서.”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모두 간택에 뽑히고 싶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한 규수는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그리 차별 대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

“게다가 실수투성이였는데 재간택까지 떡하니 올랐고.”

“그게 어째서 내가 제 아버지의 여식이라는 이유라 하는 것이지요?”

소진이 눈을 반짝이며 규수들을 향해 쏘았다.

그러자 규수들은 눈만 끔뻑이며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저하께서 그리 차별 대우를 하신 것이 아니라.”

“……?”

“뭐, 저의 미모에 저하께서 한눈에 반해 그리 하신 걸 수도 있지요?”

그녀의 대답에 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라고요?”

“안 그렇습니까? 그게 꼭 제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지요. 그리고 실수투성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함께 참여했던 규수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

“그대들이 간택 장에 함께 들어 그날의 간택을 지켜본 것도 아니면서 어째 그 규수들의 말만 믿고 이리 우르르 몰려와 행패를 부립니까? 초간택의 일을 따지고 싶거든 내가 아니라 세자 저하께 직접 따져 물으시지요.”

“행, 행패요?”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듯 그렇게 말하자, 규수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이것은 행패가 아니라 남은 간택은 부정행위를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임하라는 경고입니다. 우리 한양 규수 모임에 더는 먹칠하지 말라는!”

“그러니까요. 우리가 어떤 가문의 규수들이 모인 모임인데. 재간택도 엉망인 답을 올려놓고, 제시간에 과제 제출을 못 하게 되니 납치니 어쩌니 하는 자작극으로 간택까지 중단시켜 놓았으니.”

“…….”

“부끄러운 줄 알고 앞으로는 실력껏, 간택을 치르시지요. 갑시다.”

“창피한 줄, 아세요. 한 규수.”

콧방귀를 끼며 규수들이 그렇게 사라지려 하자, 소진은 돌아서는 규수들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 모임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하면.”

“……?”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그 모임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저 또한, 그 모임의 일원이라는 것이 막 부끄러워지던 찰나였으니까요.”

소진의 말에 규수들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실력을 모두 발휘해 간택에 임한다면 더욱,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그 규수들이 징징거릴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실력 차이가 워낙 나서야 말이지.”

그 말을 덧붙인 소진은 우르르 몰려 있는 규수들의 앞으로 자박자박 다가갔다.

헌의 시선도 소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그간 왜 다과 모임에 불참했는지, 아직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였습니다.”

갑작스럽게 뱉어진 사자성어에 규수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소진만 바라봤다.

헌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소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 말이 어렵다면. 까마귀 노는 데 백로야 가지 마라, 이건 들어 보셨지요?”

“뭐? 우리가 까마귀라는 거야?!”

“만났다 하면 다른 이들 험담하기 바쁘고 그 자리에 없는 이들을 깎아 내리기에만 연연하는 그대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나까지 그 나쁜 물이 들까.”

“……!”

“유익할 것이 조금도 없는 그 모임에 괜한 나의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집에서 서책이라도 한 자 더 읽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해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지금부터 그 모임에서 빠지도록 하지요.”

그러자 규수 중, 제일 키가 큰 여인 하나가 불쑥 무리를 헤집고 나와 위협적으로 소진의 앞에 섰다.

“네가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면 다야?! 가문의 그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해! 넌 진작 초간택에서 떨어졌어야 했어, 주제를 알아야지!”

그렇게 언성을 높이자 소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런 그대는 가문의 그늘 없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결국, 가문의 그늘에서 금수저 물고 자란 그대들이 모여 하는 일이라고는 남 뒷담과 하릴없는 소문 생산뿐이지 않습니까?”

“뭐. 너 지금 말 다 했느냐?!”

“내 주제를 운운하기 전에 그대들의 주제부터 파악하시지요?”

소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던 그 규수가 우악스럽게 소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헌이 불쑥, 소진과 그 규수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만두었다가는 소진이 한 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헌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에.

“……?!”

그 규수가 소진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게 그사이를 가로 막고 선 헌.

소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는데 그 역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규수가 헌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뭐야! 이 키 큰 거적때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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