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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왕의 결심. (61/125)

61. 왕의 결심.

2021.04.30.

소진의 차분하고도 설렘 가득한 말에 헌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낭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나지막이 뱉어낸 소진도 볼을 붉힌 채,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살갗에 닿는 햇볕도 보드랍기만 했다.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헌은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깊숙이 소진의 마음에 자신이 스며들기를.

속으로 그렇게 바라며 헌은 슬쩍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소진을 돌아보았다.

***

“중전마마, 소인이옵니다.”

종일 우울한 얼굴로 누워만 있던 중전은 밖에서 들려오는 상궁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중전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곧 문이 열리고 상궁이 어두운 낯빛으로 들어섰다.

“중전마마. 전하께서…….”

전하라는 말에 중전의 미간이 구겨졌다.

“전하께서 왜.”

“급히 대전으로 납시라는 명을…….”

왕이 직접 중전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상궁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중전은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며 불안한 듯 동공을 떨었다.

“연유는.”

“따로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인 것이지. 뜬금없이 대전이라니.”

혹시 재간택에서 있었던 일이 대전에까지 들린 것일까.

행여 자신이 꾸민 일이라는 게 드러난 것은 아닐까, 중전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추국청에서는?”

“들려온 새 소식은 없습니다.”

중전은 한껏 찌푸린 얼굴로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배가 불러 움직이기 힘든데 왜 대전까지 오라는 것인지, 그녀는 중궁전을 나서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간택 때의 일로 부르시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일 말고…… 부를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내 대전으로 향하던 중전은 저 멀리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대비를 발견했다.

중전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졌다.

“대비가 왜.”

낮게 중얼거리는 중전의 음성에 상궁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대비마마께서도 대전으로 향하시는 모양입니다.”

상궁의 말에 중전은 더욱 긴장하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비까지 대전으로 오라는 연통을 넣은 거라면 중대한 일 때문에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중전은 아니꼬운 얼굴로 대비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중전 근처에 다다른 대비가 사납게 입을 열었다.

“중전은 시어미를 보고도 인사가 없습니까?”

그제야 중전이 새초롬한 얼굴로 대비를 향해 고개를 꾸벅거렸다.

“아. 보지 못하여서요. 납시셨나이까, 대비마마?”

“배가 제법 부른 것이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

“만삭인 중전까지 대전으로 부른 것을 보면 주상께서 긴히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뭐, 그러니 대비마마까지 부른 것이겠지요.”

당의 안에 손을 넣은 채, 중전은 부른 배만 만지작거렸다.

대비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이 영 불편한지 중전은 자꾸만 대비를 외면하고 있었다.

“한데 중전. 간택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요?”

“중단되자마자 들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질문인데.”

“…….”

“하면 간택은 언제 재개하실 것인지요?”

그렇게 묻는 중전의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재개하면 왜요.”

“……예?”

대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중전에게 되물었다.

그러곤 지그시 중전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싸늘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순간, 중전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부터 중전과 간택은 별개의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대비마마.”

“중전께서는 간택에 손 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저 순산에 만전을 가하시지요.”

“……그래도 궁금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차가운 어조로 대꾸하는 대비를 향해 중전이 몸을 돌렸다.

“왜 이리 과민반응이신지요, 대비마마?”

“이유를 몰라 묻습니까?”

“…….”

“하면 중전께서는 왜 또, 간택에 관심을 가지는지요?”

“뭐라……고요?”

“또 누구를 다치게 하려고.”

대비는 낮게 중얼거리며 혀를 쯧, 찼다.

그러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전을 가볍게 지나쳐 대전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대비를 바라보는 중전의 눈동자가 불같이 타올랐다.

“저 늙은 여우를 내 반드시 처치하고 말 것이야.”

***

“곧장 궐로 가십니까?”

“그리 해야지요. 그 소식을 낭자께 전해주려 잠행을 나온 것이니.”

그 말에 소진이 어쩐지 아쉬운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소진과 헌은 발걸음을 나란히 맞추어 저잣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숙자와 소진의 호위무사가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왜요?”

“예?”

“아쉽습니까? 그냥 환궁한다고 하니.”

“……아. 그런 것은 아니고.”

헌의 말에 소진이 멋쩍게 웃으며 입술을 감쳐 물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다시금 헌을 돌아보았다.

“한데 간택이 재개되기 전까지, 중궁전도 잠잠하겠지요?”

“아무래도요. 출산이 임박해졌으니 다른 곳에 눈길을 둘 여력이 없을 겁니다.”

“그래도 만약 그 전에 중궁전에서 움직인다면요?”

소진이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헌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뒷짐을 진 채 걷던 헌이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도리질했다.

다 계획이 있다는 듯, 그는 어쩐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낭자에게 이야기도 전했으니 궐로 돌아가는 대로 전하께 청을 넣을 생각입니다.”

“전하께요? 무슨 청을…….”

“일을 하나 꾸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헌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덩달아 긴장한 소진이 헌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궁녀 하나를 포섭하여 몰래 출궁하려 했다는 자작극을 꾸밀 요량입니다.”

“해서요?”

“그럼 궐 안에 소문이 파다하게 날 것이고 그 일은 대전에도 또한, 중궁전에도 닿겠지요?”

“그렇겠지요. 넓은 궐이기는 하나 소문은 그 어느 곳보다 빨리 퍼지는 곳이 궐이라 들었습니다.”

소진의 대답에 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렇게 되면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궐문을 단단히 걸어 잠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헌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왜 그런 일을 꾸미려는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았다.

“아……. 궁녀가 간밤에 도망을 치려 했으니 타당한 이유로 궐문을 잠그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요. 야간순찰을 강화하고 궐을 출입하는 궁녀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삼엄히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니.”

“…….”

“대놓고 궐문을 감시할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헌의 작전이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같아, 소진이 슬쩍 그에게 물었다.

“그럼 중전마마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그 비밀 통로 안의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았다.

“절대요.”

“절대……요?”

“중궁전에 그 소식이 닿아야, 그 안의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아?”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인의 몸으로, 그것도 만삭인 중전마마께서 궐 안에서 그 안의 사람들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내보내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일인데 뜻밖의 일로 궐문을 걸어 잠근다고 하니.”

“…….”

“찜찜하고 신경 쓰이더라도 통로 안의 사람들을 더욱 꽁꽁 감출 수밖에요. 삼엄한 경비의 눈을 뚫고 그자들을 모두 궐 밖으로 보내기에는 궐 안에 가려야 할 눈들이 너무 많으니까.”

헌의 말에 소진이 그제야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하께서는 참, 똑똑하십니다.”

그 말을 덧붙이며 소진이 샐쭉 웃었다.

이내 헌도 그녀를 따라 입가에 고운 미소를 그리며 슬그머니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았습니까?”

“원래도 알긴 했는데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흠……. 하면 앞으로 더, 알게 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이 해박한 학식을.”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은 소리 내 핏,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소진의 앞에 한 무리의 여인들이 우르르 다가와 멈춰섰다.

“한 규수?”

***

“오시었습니까, 어마마마.”

“주상, 몸은 좀 어떻습니까?”

대전에 대비와 중전이 나란히 들었다.

그러자 옥좌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왕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중전은 못마땅한 얼굴로 비스듬히 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습니다.”

그러다 왕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중전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시선이 부딪히자 적나라하게 굳어가는 왕의 얼굴을 보자 중전의 뺨에 잔 경련이 일었다.

증오와 경멸만이 가득한 왕의 눈동자를 직시하니 그녀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중전은 울분을 삼키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당신은 첫날밤부터 날 그런 눈으로 보았지. 내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날 중전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만 날 보듬어 주었지. 하나, 그것도 내가 아닌 죽은 숙원 조 씨라 생각하면서 말이야. 내게 준 이 모욕감 반드시, 이 배 속에 있는 내 아들이 갚아 줄 것이다.’

그 말을 삼키며 중전이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불러 오래 서 있지 못합니다. 먼저 앉겠습니다.”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중전이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단, 궐 안에서는 왕의 자식을 잉태한 여인이 상전이라고 하였다.

중전은 그 유세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참이었다.

새초롬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부른 배를 쓰다듬는 중전을, 대비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들을 낳아야 할 텐데요.”

대비의 말이 중전의 심기를 거슬렀다.

“대비마마?”

“아들을 낳아야 그 유세, 오래오래 부리며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날아든 언중유골(言中有骨)에 중전이 피식, 조소했다.

“예. 안 그래도 그리 해 보려 합니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줄 압니까, 중전?”

“어째 소첩이 아들이 아닌 딸이라도 낳길 바라는 듯한 말투이십니다.”

그 말에 왕이 버럭 소리쳤다.

“그 무슨 말버릇입니까, 중전!”

그러자 중전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언성 높일 것 없습니다, 주상. 뒷방 늙은이가 눈치 없이 중전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으니.”

그렇게 말하며 대비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왕은 싸늘한 얼굴로 중전을 빤히 훑다, 역시 옥좌에 앉았다.

이내 고심에 잠긴 듯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어마마마와 중전을 이리, 대전에 부른 연유는.”

왕의 낮고도 근엄한 목소리의 대비와 중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두 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증세가 나날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비의 입가에 옅은 한숨이 흩어졌다.

“그 때문에 아침마다 열리는 상참도 또한, 어전 회의도 거르기 일쑤지요.”

“주상, 그것은…….”

“해서 더는 내 병세 때문에 왕실의 권위를 실축시키고 싶지도 않고 조선의 안위를 위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찌 그것을 주상의 병세 때문이라 단정 지어 말씀하십니까.”

안타까운 듯 대비가 말을 보탰고 중전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일까, 중전이 왕을 뚫어지라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우리 세자, 내 뒤를 이어 조선을 거느리고 대신들을 통솔하며 궐의 주인으로서 잘 해낼 수 있을 만큼 장성하였으니.”

“……?!”

“내, 세자에게 선위(禪位)를 할까 합니다.”

왕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비와 중전, 그리고 상선까지 모두 놀란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중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위라니요! 그것은 절대, 아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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