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저하의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60/125)

60. 저하의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2021.04.26.

정자나무 언덕에 오른 소진은 가만히 앉아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위무사를 힐끔거렸다.

“아씨. 저하께서 오시면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요?”

숙자도 호위무사의 눈치를 살피며 소진에게 소곤거렸다.

그러자 소진은 양 무릎을 끌어안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야. 저하께서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니, 호위무사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하신 것이겠지.”

그 말에 숙자는 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진도 조금 긴장한 얼굴로 헌이 오기를 기다렸다.

“혹시 가신 걸까?”

“아닐 거예요. 서찰 받자마자 서둘러 나왔잖아요.”

“그러게. 기다리고 있으면 오시겠지? ”

먼 산을 바라보며 소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진의 이름을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어? 소진이 아니냐!”

갑작스러운 외침에 숙자와 소진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또한, 소진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무사 역시 흠칫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엥……?”

그런데 그곳에는 봉희 남편의 옷차림을 한 헌이 서 있었다.

그는 환한 얼굴로 소진을 향해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어머……? 저분은…….”

숙자도 헌을 발견한 것인지 흠칫 놀라며 소진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이래서 호위무사를 대동해도 괜찮다고 한 것이었구나.’

소진은 피식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반갑다는 듯 이쪽으로 달려오는 봉희의 남편이 아닌, 헌을 향해 함께 손을 흔들었다.

호위무사가 그런 헌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인 것이야?”

또다시 시작된 소진의 어색한 연기.

시선은 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호위무사에게 고정한 채, 입술만 헌을 향해 내밀고 우물거렸다.

다행히 호위무사는 일전에 봉희 집에서 이런 차림새의 헌을 본 적이 있는지라, 별다른 의심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이리 딱, 만나니 참으로 반갑구나.”

이내 소진의 앞에 다다른 헌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환히 웃어 보였다.

소진은 물끄러미 헌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제법이십니다?”

그러곤 나지막이 헌에게 말했다.

뒷짐을 진 헌은 피식 미소를 터뜨리며 호위무사를 느긋하게 돌아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감쪽같지요?”

“예. 한데 이것들은 다 어디서 구하신 것입니까?”

“이 정도는 어렵지도 않은 일이지요. 한데, 괜찮으십니까?”

헌이 소진의 안색을 살뜰히 살피며 물었다.

“닷새 내내 연통이 닿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그러곤 그 말을 덧붙이며 호위무사가 안 보이게 소진을 자신의 몸으로 가린 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숙자는 흠칫 놀라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괜찮기는 한데, 외출이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그때의 일 때문에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닷새 내내 기다리신 것이옵니까?”

소진이 걱정스럽게 헌을 향해 물었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밝은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잦은 잠행이 어려워 닷새 내내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면요?”

“첫날과 세 번째 날에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나머지 날에는 윤현에게 서찰만 전해주라 하였고요.”

“그리 하셨군요.”

헌의 말에 소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안한지 미간을 조금 좁혔다.

“본의 아니게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

“저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쉬이 나오지 못하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슬그머니 호위무사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나누는 대화가 저곳까지는 들리지 않겠지요?”

그 말에 소진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럽시다.”

두 사람은 탁 트인 전경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앉았다.

한양의 저잣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헌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느리게 소진을 돌아보았다.

“닷새 내내 집에만 있으신 겝니까?”

“예. 첫 외출입니다.”

“어찌 나오셨습니까?”

“좀 울었습니다.”

울었다는 말에 헌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울었……다니요?”

그러자 소진이 피식, 옅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닷새 내내 방 안에만 있으니 비관적인 생각만 든다며 거짓 눈물을 보였습니다.”

“아.”

“해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지그시 소진을 바라보던 헌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나름 기지를 발휘하였군요.”

“예. 참, 그자들의 자백은 받아 내시었습니까?”

“쉬이 입을 열 자들이 아니지요. 하나, 영의정 대감께서 직접 나서서 중전마마와 이야기를 잘 끝내준 덕에 다행히 간택은 중단되었습니다.”

순간, 소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면 그날 재간택은…….”

“무효 처리되었지요.”

“그렇군요.”

“아마 재간택이 다시 열릴 것입니다. 하지만 대비마마께서도 날짜를 쉬이 잡지 못하실 것입니다.”

말을 이어가는 헌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소진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헌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다정한 눈빛으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던 헌은 시선을 접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시지요?”

“예?”

“간택을 멈추려고 하는 연유.”

소진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중궁전에서 비밀 통로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비밀 통로요?”

“지하로 향하는 문 같은 것을 따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예?!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헌의 말에 소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지하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고요?”

“예. 확실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진이 헌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그날 봉희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혹, 그럼 그 안에.”

“예. 낭자께서 찾는 봉희댁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떡해!”

소진의 심장은 두근거리다 못해, 터져나갈 듯 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중궁전으로 달려가, 봉희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다.

“그날 어디에서도 봉희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여인들도요.”

“아무래도 그곳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중궁전 궁녀들이 돌아가며 감시하는 것도 그렇고 심상치 않은 공간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오면 간택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던 연유도 그곳과 관련이 있습니까?”

헌의 팔을 움켜쥐는 소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행여 봉희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자신의 팔을 꼭 움켜쥔 채 굳어가는 얼굴의 소진을 헌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상궁과 궁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간택이 마무리되는 대로 속히 통로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겠다는…….”

“아.”

“해서 급히 간택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봉희를 향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모라는 자가 그런 야비하고 추악한 짓을 뒤에서 저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였다.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말을 이어보려 했지만, 소진의 숨결은 이미 흐트러진 뒤였다.

“낭자.”

그런 그녀의 분노를 이해한다는 듯이 헌이 느리게 소진을 불렀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땅바닥만 응시하던 소진의 눈동자가 헌에게 고정됐다.

“이제 기회만 포착하면 됩니다.”

“……저하.”

“다 되었습니다. 더는 낭자께서 슬퍼할 일도, 걱정할 일도. 그리고 이리 화낼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 기회를 잡지요? 어떻게 해야 그 비밀 통로 안을 살필 수 있을까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소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헌에게 애원해도 그 역시,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진은 조바심을 냈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조그마한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두 사람의 온기가 보드랍게 포개졌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만삭인 중전마마께서 간택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출산 전에 지하 통로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려 한 것인데.”

“……”

“간택까지 중단되었으니 섣불리 지하 통로의 문을 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마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예에…….”

“내가 그곳을 본 이상, 중궁전은 절대로 내 눈을 벗어나 단독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궐문도 더욱이 삼엄하게 지킬 것이고 궐 밖을 통할 수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감시할 것입니다.”

“…….”

“이미 중궁전에도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일러놓은 상태입니다.”

괜스레 헌의 말에 위안이 되는 것만 같아 소진은 눈가를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그리며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보았다.

소진은 진심을 다해 자신을 돕고 있는 헌에게 새삼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

“실은 봉희를 구하기 위해 간택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뱉어낸 고백이었다.

물끄러미 소진을 바라보는 헌의 눈빛이 다정했다.

“벗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인은 무조건 궐 담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기는 했지만, 살갗에 닿는 촉감은 보드라웠다.

헌은 옅게 미소를 그리며 소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궐 담을 넘어 구애받지 않고 궐을 살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해서 아버지께 청을 넣어 간택에 참여한 것이었지요. 원래는 초간택에만 참여해 궐 안을 둘러 보려 했습니다만. 결국, 저하와 함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네요.”

소진 역시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헌을 돌아보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함께 했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초간택에서 떨어지겠다는 낭자의 뜻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

“아마 중전마마께서 재간택 중, 낭자를 납치하라 한 것도 낭자를 간택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술수였겠지요.”

헌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그 계획마저 내가 어그러뜨렸으니. 낭자께서는 어쩌면 삼간택에 오르실 수도 있을 겁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소진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모시빛의 햇살이 흐드러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괜찮으니 그날, 저하와 함께 중궁전으로 든 것이겠지요.”

“아.”

“사실 초간택 때와 재간택 때의 제 마음이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소진의 양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헌은 그런 소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초간택 때는 그저…… 봉희만 찾고 속히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는 난봉꾼에 호색한이라 소문난 저하의 사람이 절대 될 수 없다, 그리 마음먹고 초간택에 임했지요.”

“…….”

“하나 재간택 때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어떻게요?”

그렇게 되묻는 헌의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이런 저하라면. 만약 예상치 못하게 삼간택까지 올라…… 세자빈으로 간택이 된다고 하여도.”

순간 말을 멈춘 소진과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헌.

묘하게 달아오른 두 사람의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행복하게 저하의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