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1.04.23.
다시 추국청으로 돌아온 헌은 싸늘한 얼굴로 죄인들을 내려다보며 명을 내렸다.
“바른대로 실토할 때까지 매우 쳐라.”
그때, 영의정이 휘적휘적 추국청 안으로 들어서며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오시었습니까, 대감.”
영의정은 포박당한 채 모진 고문을 받는 죄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자들입니까? 우리 소진이를 납치하였다는.”
“예. 배후가 누구인지는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
“하지만 배후가 누구인지 저들이 말하지 않아도 쉬이 유추해 볼 수는 있지요.”
헌은 싸늘한 시선으로 죄인들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건조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영의정의 고개가 천천히 헌을 향해 돌아갔다.
조금 전의 말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영의정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확실히 배후를 가려내려면 한 규수를 그곳까지 유인한 궁녀를 잡아야 하는데.”
“…….”
“그 궁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
“대비전에서는 그런 궁녀를 한 규수에게 보낸 적이 없다고 하니, 그 궁녀만 찾으면 배후를 이곳까지 끌어올 수 있겠지요.”
헌의 말에 영의정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내 정면만 뚫어지라 바라보며 조소하던 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중전마마를 만나 뵙고 오시는 길이지요?”
“예, 저하.”
“하면 대감께서 원하는 답은 듣고 이리로 오신 것이겠지요.”
그 말에 영의정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역시…… 세자는 처음부터 배후가 중전이라는 것을 알고 움직인 것이다.’
영의정은 덤덤히 헌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면 무엇 때문에 나선 것일까. 간택을 멈추기 위해? 이번 재간택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단지, 내 여식을 세자빈으로 세우기 위해 그런 것일까.’
헌이 중전을 영의정인 자신만큼 경계하며 그녀의 흠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정도의 흠이면 자신이 중궁전에 들기 전에 중전을 협박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한데 왜, 겨우 이 좋은 패를 간택 중단이라는 것에 쓰려 했던 것일까.
영의정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그 순간에도 헌은 여유롭게 영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명을 거두셨습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영의정은 헌에게 말했다.
그러자 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포박당해 축, 늘어져 있는 죄인들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너희의 배후가 죄를 인정했나 보구나.”
곧 헌은 죄인들을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리며 추국청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의정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헌을 불러 세웠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하.”
영의정의 물음에 헌이 느리게 대꾸했다.
“차차 생각해보려고요. 고맙게도 대감께서 시간을 벌어주셨으니.”
“……하면 간택은.”
“오늘 재간택은 당연히 무효가 될 것이고 재간택 재진행은 대비마마와 함께 상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헌의 뜻대로 되고 만 것이었다.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대비 역시 중전이 장난을 쳤다는 걸 직감했을 테였고.
그렇게 되면 다음 간택에서 중전의 권한은 배제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입맛대로 짜놓은 계획이 점점 일그러져가자 영의정은 초조함을 느꼈다.
“하면 다음에 또 뵙지요, 대감.”
“예……. 저하.”
“참, 한 규수께서 오늘 많이 놀랐을 것인데 심신을 잘 다스리라 전해주시고요.”
헌은 영의정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영의정은 그런 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면 언제부터 중궁전이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소진을 세자빈으로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재간택이 여기서 멈춘 것이 어쩌면 다행인 일일 수도 있었다.
‘중전을 이제 버릴 때가 온 것이라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민 소용이겠구나.’
영의정은 곧바로 소용 민 씨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던 헌이 윤현에게 낮게 명령을 내렸다.
“속히 뒤를 따라,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아보거라.”
“예, 저하.”
“그리고 내일 강습이 끝나는 대로 한 규수를 만나러 갈 것이니 채비하도록 하고.”
“……하오나 한 규수께서 쉽게 나오지 못할 것 같은데.”
윤현이 헌의 말에 조금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일도 있고 하여 외출이 어려울 듯한데. 또 외출한다 하더라도 호위무사가 반드시 따를 것도 같고.”
그러자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헌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게 다 좋은 수가 있지.”
***
“영의정 대감께서 지금 민 소용 처소로 향했습니다.”
민 소용이라는 말에 헌의 한쪽 눈썹이 거칠게 솟았다.
서책을 반듯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그 시선에도 감정이 실렸다.
“민 소용의 처소를.”
영의정의 행보가 무엇을 뜻하는지 헌은 잘 알았다.
헌의 기다린 손가락이 서책을 툭, 덮었다.
“예, 저하.”
“영의정이 많이 초조한가 보구나.”
“…….”
“보은군과 한 규수의 혼인을 확인받고 싶은 것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답답한지 창을 휙, 열어젖히고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바람이고 소망이라…….”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야만 했다.
헌은 가만히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내 아까, 보은군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심이 듬뿍 담겼던 그의 눈빛도 지워지지 않았다.
“태어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토록 간절히 소망해본 적은 없는 것 같구나.”
헌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윤현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라시는 대로 될 것이옵니다.”
헌은 피식 웃으며 소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품에 안기며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던 헌은 소진에게 보낼 서찰을 쓰기 위해 다시금 서안 앞에 앉았다.
<이 서찰을 보는 즉시 정자나무 언덕으로 나와주십시오. 호위무사를 대동해도 좋습니다. 외출이 쉽지 않다면 잠깐 바람을 쐬고 온다 하며 나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써 내려가며 헌은 쥐고 있던 붓을 가지런히 놓았다.
서찰을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으며 헌을 턱을 괬다.
“그날 꼭……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낭자.”
그 간절한 바람을 그 안에 함께 담았다.
***
닷새 후, 소진은 연신 마당을 기웃거리며 헌의 서찰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도 서찰을 보내주시겠지……?”
“그저께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닷새 내내 이 시간에 그 무사님이 대문 앞을 기웃거렸었어요.”
“……오늘은 꼭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닷새 내내 절대 외출을 금하라는 영의정의 명 때문에 집 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던 소진이었다.
그때, 안채로 향하던 최씨 부인이 낮게 혀를 차며 소진을 바라보았다.
“소진아.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어찌 그리 찬 바람을 쐬고 있느냐.”
“아……. 그게.”
무어라 대꾸할까, 잠시 고민하던 소진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희가 서찰 하나를 보내기로 했거든요.”
“소희……? 아, 그 참판 댁 여식?”
“예. 그거를 좀 기다리느라.”
“몸은 괜찮은 것이야?”
최씨 부인이 소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거뜬합니다. 눈만 잠깐 가린 채 숲에 갔다 온 것인데요, 뭘.”
“그리 쉬이 말할 일이 아니다. 그날 일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지는데.”
“송구하여요, 어머니. 많이 놀라셨죠.”
그때,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진은 속히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숙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대문 쪽으로 다가갔다.
“소, 소희 아씨 서찰이 당도하였나 봐요.”
그 말에 최씨 부인은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바람이 차니, 속히 들어가 몸을 좀 눕히거라.”
“예, 어머니.”
이내 최씨 부인이 돌아가고 숙자는 윤현에게 건네받은 서찰을 소진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들어가서 봐요, 아씨.”
“그래.”
소진과 숙자가 서둘러 별채로 들어섰다.
주위를 한번 살피던 소진은 서찰을 조심스럽게 폈다.
“뭐래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시겠다나요?”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소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진은 눈을 반짝이는 숙자를 돌아보며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몰래 나가면 당연히 들키겠지?”
“예. 당연히요.”
“또 고독한 싸움이 되겠구나.”
“예?”
“나와의 싸움.”
그렇게 말한 소진은 갑자기 푹, 쭈그리고 앉아서는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아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기된 얼굴로 마당을 휘젓고 다녔던 그녀인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숙자는 알 수 없었다.
“슬프다……. 나는 지금 너무…… 슬프다…….”
소진은 흙바닥을 빤히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벌떡 일어나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씨? 울어요?”
“울지? 나 지금 울지? 어?”
“예……? 아, 예. 눈물이 나는데.”
“되었다, 그럼!”
소진은 이내 헐레벌떡 안채로 뛰어갔다.
그러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문 앞에 다소곳이 서서는 다시 슬픈 생각을 머릿속에 분주히 떠올렸다.
“어머니…… 아버지, 저입니다.”
소진의 목소리에도 흐느낌이 묻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밑에서 바라보고 있던 숙자는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소진이니? 들어오거라.”
최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소진은 후다닥 안채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영의정은 서책을 보고 있었고 그 곁에서 최씨 부인이 수를 놓고 있었다.
“저…… 어머니.”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소진이 열심히 모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흐느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에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소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잠시…… 바람을 쐬러 밖을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영의정이 미간을 홱 구기며 절대 안 된다는 듯, 소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큰 고초를 겪고도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이냐.”
영의정의 말에 소진은 더욱 눈물을 뚝, 뚝 흘려보냈다.
그녀의 치맛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방에만 있으니 자꾸 눈물이 나서요.”
“뭐?”
“그날의 일이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누가 날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기에 그런 일까지 벌인 것일까,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던 소진이 눈시울을 연신 훔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씨 부인은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소진의 손을 잡았다.
“누가 널 미워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야. 널 간택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다른 가문이 네게 몹쓸 짓을 한 것이지, 결코 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많고 많은 후보 중에 왜 하필 나였을까……. 요리 과제도 망쳤고 꽃을 가지고 오는 과제에서도 변변찮은 대답을 올린 나인데. 왜 하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소진은 목이 메이는 척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최씨 부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소진의 등을 토닥였다.
“잘나서 그런 것이야. 네가 너무 잘나서.”
“두렵습니다. 방 안에만 있으니 비관적인 생각만 들고. 자꾸 그 끔찍했던 일이 악몽처럼 떠올라, 방 안에 있는 것도 두렵사옵니다.”
“대감, 이러다 소진이 마음에 병이라도 생기겠습니다. 마냥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게 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최씨 부인이 진지한 얼굴로 영의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영의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소진의 안색을 살폈다.
절대로 외출을 금한다던 영의정의 말이 떠올라 소진은 더욱 슬픈 낯빛을 해 보였다.
“닷새 내내…… 방 안에만 있었더니 그런 것 같아요.”
“그리 활동적인 아이를 가두어만 뒀으니. 대감, 바람만 잠깐 쐬고 오도록 허락해 주세요. 호위무사와 함께 움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쐐기를 박듯 소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훌쩍였다.
그제야 영의정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대신 꼭, 호위무사와 함께 나가야만 한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아버지.”
기어이 허락을 받아낸 소진은 안채를 나설 때까지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숙자와 눈이 마주치자 소진은 생긋 웃었다.
“아씨…….”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손끝으로 깔끔하게 닦아내며 신을 신었다.
“언제나 승리는 나의 것.”
“……예?”
“가자. 저하께서 기다리신단다.”
대문을 나서는 소진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