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명을 거두겠습니다.
2021.04.19.
중전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중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의정이 쐐기를 박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영의정 대감.”
“나는 지금 이 길로 세자 저하께 가, 당장 배후를 밝혀 그것이 누구든 목숨 줄을 끊어 놓으라 그리 청을 넣을 생각입니다.”
“……!”
“그 배후가 혹.”
“…….”
“이 궐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엄벌을 피할 수 없게 해달라고도 말할 것입니다.”
영의정은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한숨에 그 말을 뱉어냈다.
당연히 그 맞은 편에 앉은 중전의 얼굴은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내 영의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면을 향해 있던 중전의 고개가 스르륵 젖혀졌다.
“단, 이번 일의 배후를 찾는 것은 다른 이도 아닌, 꼭 내가 하겠다는 말도 함께 전할 것이고요.”
중전의 입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술을 뗐다.
“영의정 대감께서 직접 찾는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영의정은 지그시 중전을 눈빛으로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달라지고 말고요.”
“…….”
“배후를 알고 움직이는 것과 배후를 모른 채 허둥대며 사건을 파헤치는 것은 다르지요.”
“뭐라고요……?”
“나는 배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배후를 꼭, 반드시.”
“……!”
“추국청에 세울 것입니다, 오늘 안에요. 중전마마께서도 기대하고 계십시오. 내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배후를 잡아내 추국청으로 끌고 와 무릎을 꿇리는지.”
마지막 경고라도 하듯 영의정이 중전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을 씹어 뱉었다.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고 있는 중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중전을 내려다보던 영의정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중전이 다급하게 영의정을 불러 세웠다.
“대감.”
곧 영의정의 두 다리가 꼿꼿하게 멈춰 섰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중전의 말에 영의정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낯빛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내 산달도 얼마 남지 않았고…… 전하의 병세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
“이번 일로 궐을 어지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의정의 날카로운 눈빛이 중전의 얼굴을 세차게 훑어 내렸다.
그 눈빛에 중전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명을 거두지요.”
그러자 영의정이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명을 거두신다니요?”
“오늘 안에 배후를 찾지 못하면 대감의 여식이 모두 꾸민 일로 치부하겠다고 한 것, 그 명을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
“내 아까는 간택의 중단을 요청하는 세자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감정이 앞서, 대감의 여식과 대감의 가문을 벼랑으로 모는 줄도 모르고 그리 명을 내렸습니다.”
중전의 양 뺨이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그 속에서는 부글부글 뜨거운 물이라도 끓는 듯했다.
영의정은 느긋한 시선으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실수라고 하지요.”
하지만 끝까지 고고함은 잃고 싶지 않은 듯 중전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영의정이 꾹 앙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그것만이 실수가 아니지요.”
“뭐라고요?”
중전은 당황한 듯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결은 당황스러움으로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거칠긴 했으나 한 규수의 탈락이 확실시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영의정을 올려다보던 중전이 앙칼지게 쏘았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배후를 파헤쳐 죽음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감께서는 그자를 찾아 칭찬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
“나는 오늘 한 규수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기회로 삼으려 했을 뿐입니다.”
“기회?”
“오늘 재간택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간택은 이 일의 배후를 찾고 수습할 때까지 중단되어야 한다는 세자의 의견에 결코, 따를 수 없었으니까요.”
“…….”
“어찌 되었든 한 규수는 마지막 과제의 답안을 제출하지 못했습니다. 자동 탈락이지요.”
“…….”
“한데 이것을 없던 일로 하자? 게다가 간택까지 중단을 시킨다면 대감이나 한 규수가 이번 간택전(揀擇戰)에서 떨어지기 위해 애쓴 것이 모두 수포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흥분한 듯한 중전이 영의정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반대로 영의정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관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만약 한 수를 물린다면 세자의 뜻에 힘을 실어 주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중전마마께서 하나의 실수만 저지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
“나와 상의 없이 일을 벌인 것, 감히 나를 상대로 일을 저지른 것. 그것이 실수라는 거지요!”
“……!”
“중전마마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여식은 알아서 간택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간택 중단이니, 오늘의 재간택은 무효니 어쩌니, 이런 잡음 없이!”
“…….”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을 거란 말입니다.”
영의정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그러자 중전이 핏발 선 눈을 치켜뜨며 악다구니를 질렀다.
“아니요? 대감께서 대비의 표정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오늘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한 규수는 꼼짝없이 삼간택까지 올랐을 겁니다!”
“결과는 두고 보아야 알 일! 한데 중전마마 때문에 그 결과조차 두고 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닙니까! 재간택도 무효,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가던 간택조차 중단되었으니!”
영의정은 그렇게 소리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중전을 향해 묵직하게 다가갔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세자의 뜻대로…… 따라주는 수밖에.”
그가 부들부들 떨며 분기를 애써 삼키고 있었다.
차오르는 분노를 참아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대감!”
“세자를 만만히 보시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
“……!”
“이번 일은 마마께서 경거망동하신 것이며 명백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오, 또한! 영의정인 나, 한성준의 신뢰까지 잃게 된 것입니다.”
곧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중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중전의 몸은 사정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늘 내로 배후를 찾지 못하면 내 여식이 꾸민 일로 결론 짓겠다, 그리 내리신 명. 거두어주신다니 감읍(感泣)한 마음으로 물러나겠나이다.”
“하…….”
“하지만 간택은 여기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대감…….”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얼굴로 중전이 입술을 감쳐 물었다.
영의정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험악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 허망한 얼굴로 나를 부르지 마십시오. 마마의 뜻대로 이 간택을 휘저으려다, 결국 세자의 손에 간택의 주도권을 쥐여주고 말았으니.”
“…….”
“오늘 간택을 멈추게 한 것은 세자가 아니라 바로 중전마마시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셔야 할 겝니다.”
그러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중궁전을 빠져나왔다.
***
보은군은 헌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너의 배필로 욕심을 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보은군은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애써 벌려 대답했다.
“감히 어찌…… 욕심을 내겠습니까.”
“…….”
“하오나 소인의 오랜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헌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헌의 잔잔한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쿵, 떨어진 듯 커다란 파동이 일고 있었다.
“함께 있는 것이 좋아 곁에 더 머무르기를 바랐고.”
“…….”
“그 여인이 웃는 모습이 좋아 더 웃어주기를 바랐고. 그러다 한 번쯤은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보은군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갔다.
“배필로 욕심을 내본 적은 없지만 바란 적은 있습니다.”
“그것이 욕심이다.”
“아니요. 소인은 결코, 소진 낭자를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헌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굳건하게 맞물려 있던 그의 입술도 슬쩍, 벌어지고 말았다.
‘이 눈빛은…… 진심이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 짐작해볼 수 있을 만큼 깊고 차분한 눈빛에 헌은 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낭자가 싫다면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좋다면…… 기쁘고 감사할, 그저 바람입니다.”
그 말이 꼭 소진을 욕심내는 헌을 나무라는 것 같아 헌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은군은 조금 전보다 더 나지막한 음성으로 헌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데 이제는 소인이 묻고 싶사옵니다.”
“…….”
“소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진심은 아니길, 차마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소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길.
보은군은 속으로 바라고 또 바라며 헌에게 물었다.
하지만 헌은 쉽사리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저 그 질문을 몇 번이고 곱씹는 듯 생각에 잠긴 낯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헌은 묵묵히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세워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욕심이다.”
헌의 낮고도 근엄한 목소리에 보은군의 눈빛이 떨렸다.
“한 규수를 향한 너의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니길 바라는 내 욕심.”
듣고 싶지 않던 대답이 헌의 입술 사이에서 흐르자, 보은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갔다.
“하지만 네가 한 규수를 마음에 담지 않았으면, 진심으로 그 여인을 마음에 품지 않았으면 하는 이 마음은 욕심이 맞지만.”
“…….”
“나 역시 한 규수를 향한 진심은 소망이다.”
그래서 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은 보은군이었다.
차라리 왕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품었던 그 마음과 같이 욕심이고 야욕이었다면.
한때, 휩쓸고 지나는 폭풍우처럼 그저 불같이 타올랐다 꺼질 야망일 테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진을 향한 그 마음은 애절하고 아련한 진심일 뿐이었다.
가슴 깊숙이에 자리 잡은 연모의 마음인 것이었다.
“저하…….”
“해서 한 규수가 내가 아닌 너를 선택한다고 해도 나는 그 여인을 내 곁에 세워두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러니 너에게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한 것이겠지.”
헌이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뒷짐을 지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흩어지고 있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
“…….”
“한 규수를 향한 네 마음이 뻔히 느껴지는데도 믿기 싫어서.”
“아.”
“인정……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러다 그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보은군을 슬쩍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한데 네 대답을 듣고 보니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든 것일까, 보은군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접지 못했다.
“적어도 그 연모의 마음으로 한 규수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헌의 말에 보은군도 옅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네 그 감정을 해칠 생각은 없다. 나는 혹, 한 규수가 너와 같은 마음이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한 규수의 감정을 존중해줄 것이니.”
“…….”
“그러니 너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오직 소진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누구를 선택하든 그녀가 행복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행여라도 연모의 감정으로 소진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오로지 소진을 위한 마음이었다.
보운군은 왕세자인 저의 자리를 언제나 위협하는 경계 1호 대상이었지만.
소진을 두고서는 같은 마음이니, 보은군의 감정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보은군 역시, 자신을 왕세자로 앉히려는 세력 때문에 헌과 사이가 틀어지고 그가 자신을 평생 경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그런 그와 자신이 한 여인을 동시에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헌이 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것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당연히 그만두라고.
그 마음을 멈추라고, 그 여인은 세자빈이 될 여인이니 함부로 가슴에 품지 말라 윽박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보은군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자 헌이 다시금, 차분하게 보은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알겠느냐.”
그제야 보은군이 힘겹게 고개를 세우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찌…… 그 명을 거역하겠나이까.”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도록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