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너의 배필로 욕심을 내는 것이냐.
2021.04.16.
“뭐라?”
보은군의 말을 들은 헌의 표정에는 금이 갔다.
소진 역시 놀란 얼굴로 보은군을 응시했다.
“내가 빠져줘야 할 때라?”
“송구하옵지만, 소진 낭자를 만나기 위해 내내 기다렸습니다.”
“네가 기다렸으니 이젠 내게 꺼지라는 것이냐?”
“어찌 소인이 감히 저하께 꺼져달라는 불손한 언사(言辭)를 행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
“낭자에게 볼일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보은군을 바라보는 헌의 입술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조소가 번져갔다.
보은군 또한, 헌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생각 없다는 듯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사이에 낀 소진만 안절부절못하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볼일?”
“소진 낭자가 간택 중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고 하여…….”
“그 일이라면 보은군 네가 마음 쓸 일 없다.”
“……저하.”
“잠시 그런 일이 있었지만 보다시피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니.”
그 말에 보은군이 느리게 소진을 바라보았다.
보은군과 시선이 부딪힌 소진은 정말 괜찮다는 듯이 설핏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예. 그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낭자. 대체 누가 그런 일을…….”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보은군이 소진에게 다가가자 헌이 슬그머니 보은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저 안에서 밝히고 있으니.”
“……?”
“궁금하면 추국청 안으로 들어가 소상히 살펴도 좋다.”
그러면서 헌은 얼른 가자는 듯, 소진의 등을 떠밀었다.
소진은 헌이 이렇게 보은군을 경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자신을 지금까지 기다린 그를 이렇게 내버려 두고 헌과 돌아서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이내 소진이 걸음을 떼다, 헌을 돌아보며 표정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하면 혼자 가겠습니다.”
혼자 가겠다는 소진의 말에 그녀의 등에 닿았던 헌의 손이 흠칫, 떨어졌다.
“혼자 가겠다니요?”
보은군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진을 바라보았다.
“실은 원래 혼자 가려 했습니다.”
“낭자.”
“웬 규수가 사내와 함께 궐을 빠져나가면 구설에 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음성에는 옅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곧 그녀는 보은군을 돌아보며 그의 깊은 눈빛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제 소식에 많이 놀라셨지요?”
그러곤 다정한 목소리로 보은군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눈부신 소진의 미소에 두 사내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조금요. 한데 낭자가 놀란 것에 비교하겠습니까?”
“의도치 않게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소녀는 괜찮으니, 괘념치 마시어요.”
“예……. 낭자께서 괜찮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또 이리 괜찮은 모습도 보았으니요.”
보은군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소진이 헌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보은군의 앞에 한 걸음 다가갔다.
“한데 출궁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그 말에 헌 역시, 보은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은군은 편안한 얼굴로 소진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예. 곧 출궁할 것 같습니다.”
“출궁 날짜는 정해졌습니까?”
“아무래도 간택이 마무리되면 출궁을 할 것 같습니다.”
보은군을 바라보던 헌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간택은 중단될 것인데.’
소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헌을 돌아보며 입술을 뗐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궐에서 함께 자란 보은군 대감께서 이리 떠나시고 나면 저하께서 많이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러자 헌이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헌의 대답에 소진에 꽂혀 있던 보은군의 시선이 천천히 헌에게 향했다.
“아우가 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벌써 쓸쓸해지는 것을요?”
보은군과 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에게 닿은 시선에 어쩐지 냉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소진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우애가 보기 좋습니다.”
그 말에 헌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남다른 우애이긴 하지요.”
보은군도 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보은군, 궐을 떠나더라도 종종 나를 만나러 입궐하도록 하여라.”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제야 헌은 그에게서 싸늘한 눈빛을 거두며 소진을 바라보았다.
“하면 속히 퇴궐해 보도록 하시지요. 마음 같아선 궐 밖까지 배웅해 주고 싶지만.”
“…….”
“낭자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나는 여기서 이만 돌아서겠습니다.”
그러곤 보은군도 물러나라는 듯 그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보은군도 소진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아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소진 역시, 그에게 인사를 하며 헌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살펴 가세요, 낭자.”
“예. 보은군 대감.”
보은군의 말에 소진이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헌을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국청의 뒷일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헌 역시, 그녀의 고갯짓을 알아들은 듯 가볍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이내 소진이 멀어지고 헌과 보은군만이 남겨졌다.
헌은 보은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예정보다 일찍 출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멀어지는 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보은군이 헌을 돌아보는데, 그 표정이 의아하다는 듯 굳어 있었다.
“일찍……이라 하시면.”
“간택이 중단될 것이거든.”
중단이라는 말에 순간 보은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됐다.
“오늘 일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간택에 참여한 규수가 그런 큰일을 당했는데 간택을 강행할 수는 없지.”
“…….”
“게다가 한 규수는 아예 마지막 간택 과제 답안을 제출하지도 못하였는데 간택을 이대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 되는 것이고.”
헌의 말에도 보은군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묵묵한 시선으로 헌의 발끝만 바라보는 보은군.
헌이 뒷짐을 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헌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보은군이 고개를 세웠다.
“무엇이옵니까?”
“전부터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편히 하문하소서.”
“한 규수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보은군은 당황한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헌이 다시금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이미 네 마음에 한 규수가 들어 있는 것 같으니 질문을 바꾸어서.”
“…….”
“낭자를 단순히 마음에 품은 것인지, 아니면.”
입술을 느리게 벌리는 헌의 얼굴에 옅은 금이 가고 있었다.
“너의 배필로 욕심을 내는 것인지, 궁금하구나.”
***
“오시었습니까.”
중궁전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영의정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비스듬하게 돌아앉아 있던 중전이 영의정을 힐끔거리며 새초롬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영의정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김 상궁은 자리를 좀 비켜주지.”
그는 중전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상궁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궁은 중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나가라는 말 들리지 않는 것이냐!”
영의정이 호통치자, 그제야 중전이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가보아라.”
중전의 명이 떨어지자 상궁은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감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영의정이 중전 앞에 차분하게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중전을 바라보기만 했다.
중전이 그의 냉기 서린 눈빛을 직시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오늘 내로 배후를 찾지 못하면 내 여식이 자작극을 꾸민 것으로 결론 짓겠다고 하시었다던데.”
“…….”
“사실입니까?”
표정 하나 변함없이 영의정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었으며 고개는 빳빳하게 치켜세워져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중전을 내리누르고도 남을 만한 그의 눈빛이었다.
중전의 목울대가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그렇게 결론을 짓고 간택을 재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서.”
“누가 그것이 옳은 처사라 했습니까.”
“예……?”
싸늘하다 못해 칼의 심이라도 박은 듯한 목소리에 중전의 귓가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동공을 떨며 입술을 감쳐 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결론을 짓고 간택을 재개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영의정 대감…….”
“오늘 내로 배후를 찾는 것?”
“…….”
“한 시진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후의 일을 중전마마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영의정은 자신 있다는 모양새로 피식, 웃어 보였다.
마치 중전을 비웃는 듯한 그 웃음에 중전은 온몸이 결박당한 듯 뻣뻣하게 굳었다.
“무슨 감당을 말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중전이 눈에 힘을 주며 영의정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피식, 입술을 터뜨렸다.
“중전마마께서 모르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
“아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예상 못 했던 모양인데. 이렇게 된 이상 중전마마께서도 감당하셔야지요.”
“자꾸 이번 일에 나를 왜 끌어들이는 것입니까, 대감?”
“왜 끌어들이다니요. 먼저 나와 내 여식의 머리채를 잡아 그 일에 처넣은 것은.”
“……?”
“중전마마시지 않습니까?”
영의정은 입가에 웃음기를 지워내고는 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 한성준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그러고 보니 지난날. 간택을 앞둔 내 여식의 별채에 자객이 하나 잠입한 적도 있었지요.”
“……!”
“굳이 별채로. 그것도 둘도 아닌 꼭, 한 명이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중전은 애써 낯빛을 덤덤하게 유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던 영의정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정인 나를 노린 것도 아니고 곳간을 노린 것도 아니고 별채라. 거기에 오늘 일까지.”
“…….”
“그때는 긴가민가했었지요. 내 여식을 노렸던 이유 말입니다. 오늘도 내 여식이 간택 중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느리게 그러나 명확한 어조로 영의정은 말을 이어갔다.
중전은 점점 제 목을 옥죄는 듯한 느낌에 마른침만 꼴깍,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중궁전 앞에 다다르니 그 연유가, 또한 배후가 선명해지더이다.”
“……!”
“내 여식이 절대, 간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 여식이 세자빈이 되면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사람. 하니, 필사적으로 이번 간택을 방해해야만 하는 사람!”
“그것이 혹, 나란 말입니까?”
중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핏, 조소를 터뜨렸다.
영의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중전만 뚫어지라 직시하고 있었다.
“감히……. 국모인 내가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질렀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의정이 거칠게 입술을 벌렸다.
“감히!”
“……?!”
“영의정인 내 등에 칼을 꽂으신 건 중전마마입니다!”
그의 호통이 중궁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중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덤덤한 척, 애써 무감각한 척 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그것이 무슨……!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벌려 그렇게 소리쳤는데.
“근거는.”
“……?!”
“오늘 안에 배후를 찾지 못하면 내 여식의 자작극으로 결론짓겠다는, 해서 나의 가문을 욕보이고 내 여식을 재간택에서 실격 처리하고야 말겠다는.”
영의정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중전을 집어삼킬 기세로 번뜩이고 있었다.
“중전마마의 그 생각 자체가 근거이지요.”